미국은 핵무기를 어떻게 활용했나

['전쟁 국가' 미국] 대외 군사 개입을 위한 최후 보루

미국의 평화운동가 조셉 거슨은 저서 <제국과 폭탄 :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어떻게 핵무기를 이용했나>에서 핵무기는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단언한다.

거슨에 따르면 1945년 이래 미국의 핵무기는 다음 다섯 가지 용도로 사용됐다.

첫째, 실제 전투용.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이 그것이다.

둘째, 미국의 적들과 동맹국들을 암묵적으로 위협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만일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이 항복했다면, 한반도의 분단 대신 패전국 일본이 미‧소의 공동 관리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핵공격을 가함으로써, 즉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를 통해 미국은 일본을 단독 점령했고 동북아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했다.

셋째, 선제 핵공격 위협을 통해 상대를 위협함으로써 미국에 유리한 조건의 협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1946년 3월 북부 이란 주둔 소련군 철수 강요.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넷째, (1949년 소련의 핵무기 확보 이후) 미국의 재래식 병력을 '의미 있는 군사 및 정치적 도구'로 만드는 최후 보루. 예컨대 미국이 공격하려는 제3세계의 적을 소련이 돕는 것을 핵 위협을 통해 저지(1973년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를 돕기 위해 소련이 개입하려 하자 미국은 핵위협으로 이를 저지했다). 또한 미국의 핵공격에 화학무기 등으로 대항하려는 제3세계 국가를 억제(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은 이라크 주변에 핵무기 700~1000기를 배치해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저지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군이 공격해 온다면 이스라엘에 화학무기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했었다.)

다섯째, (1970년대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대등해진 이후) 비로소 '억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군사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억제'란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억제와 그 의미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억제란 미국에 대한 타국의 선제 핵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펜타곤 지도자들에 따르면 억제란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05년 채택된 미국의 합동핵작전교리(doctrine for joint nuclear operation)에 따르면 "억제의 핵심은 (핵 위협으로) 잠재적 적국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쳐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되는 행위를 스스로 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이 문서는 "분명히 말하건대 핵무기는 앞으로 50년간 미 군사력의 초석으로 건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핵무기는 미 제국의 유지를 위한 핵심 도구

한마디로 말해 미국은 지난 70여 년간 핵무기의 위력을 앞세워 세계에 미국의 요구를 강요해 왔고 타국이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해 온 것이다.

거슨은 "핵무기의 역할에 관한 미국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핵무기의 본질적 기능이 선제공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억제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과 연구자들은 미국의 핵무기가 제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핵심적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아이젠하워의 '대량 보복'에서 케네디의 '유연 대응', 그리고 클린턴의 '풀 스펙트럼 도미넌스(full spectrum dominance: 모든 군사력 부문에서의 압도적 우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선제 핵공격은 제국의 유지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거슨의 이러한 지적, 즉 '미 대외정책에서 핵무기의 중심성'은 역대 미 정치지도자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닉슨 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한 알렉산더 헤이그는 1979년 7월 24일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방의 일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징병제를 부활하거나 병력 규모를 3배로 늘리거나 또는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까지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런 조치들을 취하지 않고 '핵 선제 불사용'을 서약할 경우, 서방은 재래식 전력과 지정학적 위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소련의 군사력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핵무기 믿고 재래식 군사개입, 비밀공작 자행

한편 미국의 비판적 지성 노엄 촘스키는 미 대외정책에서 핵무기의 쓸모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리의 전략핵무기 시스템은 미국의 재래식 군사행동에 대해 일종의 우산 역할을 한다. 즉 침략과 정부 전복 활동을 벌일 때 어떤 형태로든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해준다(미국의 핵무기 보복이 두려워 소련 등 제3자가 미국의 재래식 군사행동을 방해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

카터행정부에서 국방 장관을 역임한 해롤드 브라운은 이것이야말로 미국 안보시스템의 핵심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핵무기가 있음으로써 미국의 재래식 병력이 '군사력 및 정치력의 의미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략핵무기라는 우산이 있기 때문에 (중략) 미국은 우리의 공격 대상 국가를 도우려는 국가를 마음 놓고 충분히 협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시키고 싶다면 (중략) 또는 중동지역에 신속기동군을 파견하려 할 때 (중략) 또는 인도네시아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고 싶을 경우 (중략) 또는 베트남을 침공하려 할 때 우리의 군사행동이 저지될지도 모른다는 아무런 걱정 없이 이를 실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방해하려는 그 어떤 세력도 겁을 주어 쫓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전략핵무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기에 타국에 대한 재래식 군사 개입, 중앙정보국(CIA) 등에 의한 비밀공작을 마음 놓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핵무기에 의존해왔다. 다른 대량살상무기와는 달리 핵무기의 효과는 즉각적이며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 효과가 있다. (중략)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의 국민들에게 제대로 겁을 주기 위해 제멋대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미친놈이라는 국민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비판했다.

▲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운데)가 지난해 9월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핵무기는 세계를 향한 국가테러의 핵심 수단이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해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다니엘 엘스버그는 "피해자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금품을 요구하는 무장강도처럼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국제적 위기나 갈등, 또는 전쟁이 있을 때면 언제나 핵무기라는 총을 꺼내 들었다. 2차 대전 이후 제럴드 포드를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이 (다른 나라들에) 핵전쟁의 위협을 가해 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노르웨이의 저명한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관총을 들고 학교 교실로 들어와 학생들을 인질로 잡은 채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학생 모두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험하고 미친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가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핵무기의 인질로 잡아두고 있는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이중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핵무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핵무기는 테러를 위한 도구이다"

미국은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고 미국의 핵무기는 세계 평화를 위한 좋은 무기인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되며 타국의 핵무기는 세계 평화를 해치는 나쁜 것이라는 이중기준이 지난 70여 년간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해 오면서 핵무기는 이제 미국인의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미국 소설가 E. L. 독토로프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1945년 이후 우리 마음속에는 누구나 폭탄을 품게 됐다. 그것은 처음에는 폭탄이었다가 다음에는 외교가 됐고 이제는 우리의 경제가 됐다. 어쩌다가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그 무엇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게 되었을까? 당초 적을 무찌르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거대한 골렘(자동기계, 로봇)이 이제는 우리의 문화, 우리의 폭탄의 문화가 됐다. 우리의 논리, 우리의 신념, 우리의 비전이 됐다"

미국 핵무기는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

필리핀 출신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미국의 핵무기야말로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이며 핵무기 확산의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려 하는 한, 이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핵무기 확산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미국의 핵무기는 지배의 수단인 반면, 소련에서 북한에 이르는 후발 핵보유국의 핵무기는 기본적으로 저항, 또는 억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없애지 않는 한 세계적인 핵무기 철폐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핵무기 철폐를 위한 캔버라 위원회'는 1996년 '핵확산의 공리(axiom of proliferation)'라는 원칙을 발표했다. '어느 한 국가가 핵무기를 갖고 있는 한, 다른 모든 국가들은 핵무기 보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회의 일원인 리차드 버틀러 호주 핵무기철폐 특임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원칙을 내놓은 근본적 이유는 정의, 즉 공정함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시민들에게 가장 심원한 중요성을 갖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핵확산 공리와 연결시켜 본다면, 핵보유 국가들이 자신들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비핵 국가들에 대해서는 핵 없이도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며 핵 포기를 설득하는 것은 완전한 실패로 드러났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UNSCOM(유엔 이라크핵감시위원회)의 마지막 의장을 역임한 버틀러 대사는 2002년 시드니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생 동안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위해 일해 왔다. (중략) 핵 보유국과 비핵 국가들 간의 문제는 핵심적이며 영구적인 것이다. (중략) 바그다드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이라크인들이, 200개가 넘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은 놔둔 채 왜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만을 추궁하는지 그 이유를 대라고 했을 때였다.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대량의 핵무기를 자랑스럽게 보유하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핵무기는 국가 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앞으로도 계속 보유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다른 나라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고"

"이런 경험들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명백한 불공정함과 이중기준 등이 일시적으로는 거대한 권력의 압력에 의해 용납되겠지만 결국에는 본질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그러한 불공정함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만큼이나 자명한 것이다"

"나는 미국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중기준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완벽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높은 교육 수준에 사회의식이 투철한 미국 인들도 자국의 이중기준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비핵 국가들의 원망과 불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의 지독한 불감증 때문에 때때로 나는 화성인들과 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핵무기가 이라크(가 보유하려 했던, 또는 북한이 개발하고 있는) 핵무기와 똑같이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의 핵무장과 북한의 핵개발

버틀러 대사가 이라크 관리의 항변에 대해 직면했던 곤혹스러움을 중국 측도 느꼈다. 지난 4월 26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미중 관계와 중국의 북핵 대응'이라는 강연에서 중국 인민대 청샤오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려줬다.

"2003년 미국의 파월 국무장관이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협조를 요청해 왔다. 당시는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문제 삼으면서 제네바 기본합의가 파기된 이후였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 개발을 재개했다(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 8년간 북한은 핵연료 생산 및 미사일 시험을 중단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 등과 함께 6자회담 개최를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위관리 다이빙궈와 푸잉이 평양을 방문해 강석주 외교부 부상에게 핵 개발 중단을 설득했다. 이에 대한 강석주의 대응은 '당신들도 (미국과 소련의 핵 위협에 맞서) 1964년에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다이빙궈 등은 '밥이나 먹자'며 대화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 제네바 합의 당시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R.갈루치(왼쪽) 대사와 북한측 수석대표였던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연합뉴스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북한을 설득할 마땅한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중국 자신이 걸었던 길을 북한도 가겠다는데, 무슨 명분으로 말릴 수 있겠는가. 중국은 한국전쟁과 대만해협 위기 등에서 미국의 무수한 핵 위협을 받아온 데다 1958년 소련과 결별한 이후에는 소련으로부터도 핵 위협을 받고 있던 터였다. 결국 중국은 1960년부터 핵 개발을 본격화해 결국 1964년 10월 16일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의 핵 개발은 미국에게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중국은 미국에게 세계 최대의 깡패국가였다. 요즘의 이란이나 북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이자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치른 최초의 전쟁, 즉 한국전쟁의 적대국이었던 중국이 핵무기를 가진다는 것을 미국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케네디 행정부는 중국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미소 합동으로 중국의 핵 개발 현장 로프노르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하자고 소련에 제안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무산됐다. 또 중국이 최초 핵실험에 성공한 이후 존슨 행정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단독 공습이 논의됐고, 핵 무장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숙적인 인도에게 미국의 핵무기를 제공하자는 기발한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의 대응은 핵클럽의 문을 닫는 것이었다. 1968년 체결되고 1970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핵확산금지조약(NPT)이 그것이다. NPT 체제가 성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핵보유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국으로 한정됐다.

NPT 체제 성립 이후 핵무기를 가진 나라는 인도와 파키스탄뿐이다. 인도는 1974년 5월 첫 번째 핵실험을(스스로 '평화적'이라고 주장한) 했으며 1998년 5월 11일과 13일 파키스탄 국경에 가까운 포크란에서 다섯 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대항하여 파키스탄도 뒤이어 같은 달 28일, 단 하루에 발루치스탄 주(州)에서 여섯 차례에 걸친 지하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 중반부터 핵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백인 인종차별 정권 당시 6, 7개의 핵무기를 보유했었으나 1994년 만델라의 흑인 정권이 출범하면서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핵무기를 해체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얼떨결에 핵보유국이 됐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은 미국이 주도하는 넌-루가 프로그램(Nunn-Lugar program)에 의해 보유 핵무기를 모두 해체했다.

현재 세계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의 공인된 핵 보유국과 함께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3개의 비공식 핵보유국이 있다. 뒤의 세 나라는 핵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인도는 라이벌 중국에 대한 대항마로, 파키스탄은 서아시아 최대의 미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이 미국의 적대국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가다피의 운명을 보면 알 수 있다. 1970년대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던 후세인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죄로 13년간 미국 주도의 가혹한 경제제재에 시달리다 2003년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이유로 미국에 의해 제거됐다.

가다피는 영국의 중재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과 국교를 회복했으나 내부 반란을 틈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개입에 의해 권력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북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이 핵 개발을 확고하게 결정한 것은 2003년 4월이라고 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2003년 3월 20일) 직후다. 후세인의 운명을 보면서 핵 개발을 결심했다는 얘기다.

군사력으로 북한 핵 개발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군사력으로 타국의 핵 개발을 저지한 사례는 딱 한 차례 있다.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의 이라크 오시라크 원전 공습이 그것이다. 이라크 후세인은 1970년대 초부터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바그다드 남부에 오시라크 핵시설을 운용했는데, 이를 단 2분 만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등 서방측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어쨌든 공습 작전은 대성공이었다(한국의 경우, 1970년대 중반 프랑스의 도움으로 핵 개발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압력에 의해 중도 포기했다).

1940년대 후반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을 때, 미 군사지도자들은 소련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중국의 경우는 앞에 얘기했다. 북한의 경우 1994년 6월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정밀 타격(surgical strike)을 계획하고 실행 준비까지 들어갔으나 당시 북한을 방문 중이던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무산된 바 있다. 군사력을 동원한 핵 개발 저지가 시도되지 못한 것은 그 파장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핵능력은 1994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화됐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전쟁 위협을 무릅쓰고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을 시행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얘기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DNI) 등 미국의 전‧현직 고위관리들, 전문가들도 같은 의견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 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인도, 파키스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드러난다. 인도, 파키스탄은 하루 또는 사흘 만에 5, 6차례의 핵실험을 해치운 반면, 북한은 2006년 첫 핵실험 이후 2016년까지 만 10년에 걸쳐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순식간에 핵실험을 해치운 이유는 자명하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반대와 제재가 현실화되기 전에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하자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10년에 걸쳐 핵실험을 했다. 국제사회에 대해 보란 듯이, '누가 나 좀 말려줘' 하는 식으로. 북핵 개발 초기, 미국과 북한은 핵 포기와 북미 적대관계 청산을 골자로 하는 합의를 맺기까지 했다. 2007년의 2.13 합의가 대표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핵 포기와 북한의 체제 보장을 맞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1991년 미국을 방문한 김용순 당시 북한 외상이 아놀드 캔터 국무 차관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용인하면서까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열망했다. 이후에도 줄곧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해 왔다.

과거 미국과 전쟁을 벌였던 중국과 베트남은 미국과의 화해 이후(중국은 1979년, 베트남은 1995년 국교 수립) 경제 개발에 나서면서 국제 사회에 완전히 복귀했다. 북한도 바로 그 길을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와 2005년의 6자회담 9.19 공동성명 등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두 번의 기회가 무산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미국은 북한에, 북한은 미국에 돌리고 있다. 그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단 필자는 미국 쪽에 더 책임이 크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 실패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추구'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평화 체제를 위한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 5대 정책 방향의 첫 번째로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고 선언했다.

올바른 출발이라고 본다. 물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정착은 쉽지 않은 과제다. 분단에 따른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 극우세력의 반발과 저항, 북한에 대한 남한 국민의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 남북한 관계 개선을 원치 않는 미국의 견제와 반대, 미국과의 협상을 중시하는 북한의 외면과 무시, 여기에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 등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 혁명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뜻과 지혜를 모을 수만 있다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다. 민주화란 결국 '우리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 체제의 완성이란 결국 19세기 말 이래 외세에 의해 휘둘려온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비상한 용기와,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단합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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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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