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인류 최초의 핵 홀로코스트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 (1)

미국의 역사학자 마틴 셔윈은 2차 대전의 가장 중요한 결과로 "인류의 생존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다"는 점을 꼽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이 인류 절멸의 위험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I. I. 라비는 셔윈의 지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히로시마 이후) 갑자기 내일이 심판의 날이 됐다. 이후 언제나 내일은 인류 최후의 심판의 날이었다"

전면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인류 전체가 몰살될 수 있다는 것, 바로 내일이 그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을 '핵에 의한 집단 학살(nuclear genocide)'이라고 규정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 리차드 미니어는 히로시마를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전쟁범죄, 즉 핵 홀로코스트(atomic holocaust)라고 말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는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로부터 절멸주의(exterminism)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승리를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으며 도시와 국가, 그리고 세계까지도 파괴하는 것, 즉 핵무기에 의한 전면적 파멸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전쟁의 목적은 무력의 사용을 통해 상대방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핵전쟁은 부도덕하다. 아니, 도덕 이전에 허망하다. 적과 우리 모두 파멸되기 때문이다.

학자들만의 의견인 것도 아니다. 도쿄 전범 재판(1946~1948년)에 참여했던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소수 의견을 통해 미국의 원폭 공격은 "(태평양전쟁에서 일어난 사건 중) 나치 지도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가장 근접한 유일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일본 공습을 지휘했던 미군 지휘관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전쟁 범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일본 64개 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자신의 부하였던 로버트 맥나마라(1961~1967년 국방장관 역임)에게 "만일 미국이 전쟁에서 진다면 미군 지휘부 전원이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이 잔학행위 면에서 히틀러를 능가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왜 '히로시마 원폭'을 사과하지 않았을까

이상과 같은 학자들의 지적과 경고, 전쟁 당사자들의 자기 고백은 대부분의 미국인이나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트루먼 등 2차 대전 당시 미국 지도자들의 공식 발언과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이다.

트루먼 등은 일본군의 극단적 저항에 직면해 미군 병사들과 일본 국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원자탄 사용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해 왔다. 트루먼은 원자탄 사용으로 미군 병사 50~10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의 히로시마 인식은 바로 이러한 정치지도자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히로시마 원폭 공격은 정당한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회복했다고 믿고 있다. 나아가 도덕적 우월성을 자부한다. 세계를 이끌 자격과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2차 대전은 '좋은 전쟁'을 넘어 '역사상 최고의 전쟁'이었다. 이런 미국인들에게 히로시마가 집단학살이자 핵 홀로코스트라고 한다면 커다란 도덕적 오점이자 모욕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의 경우 교과서 등을 통해 두 방의 원자탄으로 일본이 패망하고 나라의 독립을 되찾았다고 배워왔다. 원자탄이 해방의 은인인 셈이다. 또한 대다수 월남민들은 6.25전쟁 당시 북한에 대해 원폭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을, 그리하여 미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4만 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고, 원폭 공격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의 진실'은 무엇인가? 핵 홀로코스트였는가, 아니면 조기 종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가? 민간인에 대한 원폭 공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이 문제는 핵무기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대다수 미국인이 히로시마가 핵 홀로코스트였고, 민간인에 대한 원폭 공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믿는다면 핵무기는 미국의 전쟁 도구로서, 나아가 대외정책의 수단으로서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이다. ⓒ위키피디아

불행하게도 지난 70여 년간 대다수 미국인들은 히로시마가 조기 종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앞으로도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정책당국자들의 주장을 맹신해 왔다. 미국 핵이 존속돼 온 이유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난 1980년대 미국과 소련은 유럽에 경쟁적으로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유럽 시민들은 수년간 2차 대전 후 최대의 반핵 시위를 벌였다. 자신들은 미소 간 핵 대결의 인질도, 희생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의 반핵 시위는 1987년 미소 간 중거리미사일폐기조약(INF)으로 귀결됐다.

특정한 종류의 핵무기가 완전 폐기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INF가 성사된 데는 1985년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역할도 컸지만 그 원동력은 바로 서유럽 시민들의 반핵 시위였다. 그만큼 국민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조치였는가? 지난 70여 년간 미국 핵의 역사는 히로시마에 대한 기억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는 히로시마는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핵무기는 정당한 군사무기라고 주장하는 정치‧군사 지도자와 일단의 지식인들이 있다.

다른 한 쪽에는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조치였고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핵무기는 군사무기로 사용돼서는 안 될 '절대악'이라고 주장하는 양심적 지식인과 평화운동가, 비판적 시민 등이 있다. 지금까지는 전자가 다수 의견이다. 핵 위협이 계속되는 이유다.

하지만 미국 학계에서는 대중들의 인식과는 다른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새뮤얼 워커라는 역사학자는 "미국은 수십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원폭을 투하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원폭 공격이 없었어도 전쟁은 비교적 이른 시일에 끝났을 것이며, 일본 본토 상륙은 필요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말한다.

1945년 11월로 예정됐던 규슈 상륙, 46년 3월의 혼슈 상륙 작전에서 예상되는 미군 희생자는 2만 5000~4만 1000명, 아무리 많이 잡아야 5만 명 이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트루먼과 스팀슨 등은 일본 상륙작전으로 미군 병사 50~100만 명의 희생이 예상됐다고 주장했다. 엄청나게 과장된 수치다.

워커는 미 정부 기관인 핵통제위원회(NRC)의 공식 역사가로, 온건 성향의 제도권 학자다. 제도권 학자인 그가 이런 정도의 발언을 했다는 것은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이 미국 역사학계의 일치된 견해임을 말해준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20여 년간 미국에서는 트루먼 등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곧 히로시마의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65년 가 알페로비츠가 <핵 외교(Atomic Diplomacy)>란 책에서 '원폭 투하의 주요 이유는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었으며 '소련에 겁을 주어 전후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신화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2차 대전 당시의 비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면서 정부 당국자의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1975년 마틴 셔윈은 저서 <파괴된 세계(A World Destroyed)>에서 트루먼이 히로시마에 핵 공격을 가한 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이해할 만한' 처사이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으며 분명 핵 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히로시마 원폭이야말로 2차 대전이 남긴 최악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미소 간 극단적 핵 군비경쟁이 벌어지면서(한때 핵탄두가 7만 개 가까이 이르렀다) 민생에 쓰여야 할 수 조 달러 이상의 소중한 자원이 낭비됐고,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45년 여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직면한) 선택은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상륙작전이냐 핵전쟁이냐가 아니었다. 다양한 형태의 외교냐 아니면 전쟁(의 지속)이냐였다. 트루먼의 선택은 이해할 만하지만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피할 수도 있었다"

즉 트루먼 등은 당시 미국의 선택지가 상륙작전 아니면 원폭 투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외교적 방식에 의한 전쟁 종결이라는 다른 대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셔윈은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항복 조건의 변경(천황제 유지 인정), 둘째 소련군의 참전, 셋째 기존 해상 봉쇄와 공습의 지속 등이 그것이다.

첫째 대안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일본은 1945년 6월부터 최대한 유리한 조건의 항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천황제 유지만 보장된다면 항복할 심산이었다. 미국 고위층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이러한 일본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스팀슨 등 일부 참모들은 천황제 유지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으로서는 1943년 루스벨트가 선언한 '무조건 항복'을 거스르기가 어려웠다. 자칫 국내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원폭으로 무조건 항복을 관철시켰으나 종전 후 천황제는 유지시켰다. 무조건 항복이란 명분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셈이다.

둘째 대안은 미국 지도자들이 원치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독점적 지배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셋째 대안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끝낼 수 있는 대안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셔윈은 히로시마 이후 수 십 년에 걸친 역사학자들의 연구 끝에 '히로시마의 진실'이 거의 밝혀졌으나 이러한 역사 연구의 결과들이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는 미국에서 역사가의 역사 해석이 정치적 통제하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역사가는 진실을 밝혀냈으나 그 진실이 일반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개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95년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이 추진했던 원폭 50주년 기념전시회가 정치적 압력에 의해 사실상 무산된 사건이 그것이다. 스미소니언 측은 원폭 50주년을 맞아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복원해 전시하는 한편 피폭자들의 참혹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원폭 투하에 이르는 의사 결정의 전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셔윈은 이 전시회의 역사 자문위원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기획 단계부터 정부와 의회 및 재향 군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1995년 1월 사실상 무산됐다. 참전 군인들은 이 전시회가 일본 편향적이며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원폭 투하가 정당한 것이었다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있었을까?). 언론들은 반미적이라고 규탄했고 상원과 하원은 이 전시회가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비애국적이라는 이유로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기까지 했다.

미국 사회 전체가 찬반으로 갈려 격렬한 논란을 벌였다. 결국 1월 30일 스미소니언 측은 전시회를 사실상 철회했다. 전시장에는 에놀라 게이의 동체와 명패, 원폭 투하 당시 승무원들의 회고담 녹음 테이프만을 전시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셔윈은 "1995년에도 핵의 역사는 정치의 인질로 잡혀 있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2차 대전을 '우리 최고의 시간'으로, 스스로의 도덕적 우위를 굳게 믿고 있는 미국인으로서는 이러한 자기 이미지(self-image)에 어긋나는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차 대전에 대한 미국인의 집단적 기억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잔인하고 위험한 파시즘을 제거했고 아시아에서는 사악한 전쟁 기계를 파괴했다. 그리하여 세계의 평화와 자유, 질서를 회복했다.

또한 승전 후에는 관대함을 베풀었다. 이전의 적들을 먹여 살리고 경제를 재건시켰으며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미국인에게 2차 대전은 단순히 좋은 전쟁이 아니라 완벽한 전쟁의 모델이다. 정당한 전쟁이고 올바른 전쟁이며 인류를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좋은 전쟁의 끝이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핵 공격에 의한 수십만 민간인의 학살이라니, 이러한 역사적 해석을 미국인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지도자나 국민 대다수가 히로시마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소련과의 냉전은 이러한 진실 회피를 부추겼다.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은 소련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강조해 왔다. 또한 소련의 막강한 지상군을 막기 위해서는 핵 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만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사적으로 불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는 공격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소련과의 대결에 필수적인 도덕적 정당성과 군사적 무기를 잃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미국 지도층으로서는 히로시마 핵 공격이 유일한 선택지, 정당한 조치였다고 고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미국 대외정책의 도덕성 및 정당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원폭 사용의 부도덕성을 인정한 경우는 아직 없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 피폭 장소를 방문했으나 원폭 공격에 대해 사과, 또는 유감 표명은 하지 않았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2016년 5월 27일(현지 시각) 일본의 2차대전 피폭지인 히로시마를 방문,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에서 헌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는 취임 직후인 2009년 4월 프라하 연설에서 '핵 없는 세계'를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발언을 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핵무기의 확산은 막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더 많은 국가와 더 많은 민족들이 궁극의 파괴 무기를 갖게 되는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숙명론은 인류의 치명적 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핵무기의 확산이 불가피하다고 믿는다면, 이는 바로 핵무기의 사용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2016년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유감 표명도 하지 않았다. 트루먼이 '원자탄으로 50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했다'고 강변하거나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방문하고도 핵 공격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미국에게 핵무기는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70여 년 핵의 역사는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 투쟁의 역사였다. 핵의 역사는 또한 자기기만, 정보 통제(은폐와 왜곡), 여론 조작의 역사이기도 했다. 핵을 쓰려 하는 세력은 핵무기가 초래한 참상과 핵무기의 진실을 한사코 은폐, 왜곡하려 한다. 반면 원폭 피해자를 비롯한 대다수 양심세력은 핵의 참상을 알리고 그 진실을 밝히려 한다. 원폭 피해자가 그러하듯이 핵이 초래한 참상과 진실을 안다면 결코 핵무기를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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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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