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2016년 7월 28일 오전 6시.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곤히 자고 있던 이진영 씨를 깨운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문밖에서 누군가가 "집 앞에서 접촉사고가 났으니 잠시 나와보라"고 했다.
골목이 좁은 주택가에서 접촉사고는 흔히 일어날법한 일이었다. 부스스한 채로 문을 여니, 웬 장정들이 서 있었다.
"이진영 씨 맞습니까. 서울경찰청 보안수사 4대 보안수사팀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 씨에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500장에 달하는 압수수색 영장이었다. '국가보안법 제7조 1항 및 5항 위배', '찬양·고무 및 이적표현물 소지·배포 혐의'. 이른 아침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글자들이 종이 위에 찍혀있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아홉 명의 장정들은 곳곳을 털었다. 반지하 방 벽면을 가득채웠던 책들이 바닥 위로 쏟아졌다. 순식간에 데스크톱 하드디스크, USB, 스마트폰의 SD카드도 빼갔다.
압수수색을 마친 그들은 망연해진 이 씨를 잡아끌어 집 밖에 세워놓은 승합차에 태웠다. 승합차가 멈춰선 곳은 신촌 이화여대부속초등학교 인근 골목 안쪽이었다. 검은색 철문 너머로 벽면이 노랗게 덧칠된 이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간판도 없이, 태극기만 펄럭였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이곳은 '신촌 보안분실'로 불리는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 비밀분실이다.
2005년 폐쇄된 남영동 대공분실처럼 이적 행위, 국가안보에 위해가 되는 행위를 한 사람을 체포해 조사하는 곳이다. 이 씨가 이런 무시무시한 곳에 끌려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주의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이 씨는 수도권 경인선과 경부선 역무 자동장치 유지 보수를 하는 철도 노동자다. 그리고 생계 사업과는 별개로, '노동자의 책'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의 대표를 맡고 있다. 경찰이 그의 집에 들이닥친 건 바로 노동자의 책 때문이었다.
노동자의 책은 노동운동, 사회주의 사상 등 사회변혁적 담론을 다루는 서적을 모아 PDF 파일 등으로 제공하는 전자도서관이다. 지난 2002년 대학원생 네 명이 개설했다가 2010년부터는 이 씨가 전적으로 운영해왔다. 소장도서 4000여 권, 회원 1200명인 '아는 사람은 아는' 사이트다.
여기 올라오는 서적들은 <경제학 노트>(카를 마르크스 지음), <국가와 혁명>(블라디미르 레닌 지음), <세계사 편력>(자와할랄 네루 지음), <유한계급론>(톨스타인 베블렌 지음), <국부론>(애덤 스미스 지음) 등 고전으로 불리는 도서가 상당수이며, 절판됐거나 매우 희소해서 일반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있다.
이 씨는 사이트 하단 '취지문' 코너를 통해 "노동자의 책은 진보적 인문사회과학의 정보기지"라고 소개한다.
"현재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혹은 사회운동을 고민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있다. 이로 인해 대중조직의 외형적인 성장에 비교해 볼 때 그 사상적 기반은 반대로 약화되고 있다. (중략) 이 공간은 비판적, 변혁적 인문사회과학이 과거의 기억이 아닌 현실의 관심사가 되도록 활동하며, 비판적, 변혁적 사상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손쉽게 얻고 교환할 수 있는 베이스 캠프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이트 첫 화면에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하자면, 이 노동자의 책은 '마르크스주의 전자도서관'인 셈이다.
이 씨는 1980~199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지금 이 사회가 진일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전이라고 봤다. 1980~1990년대에도 이미 100여 년 가까이 된 마르크스나 레닌의 책을 통해 운동이 부흥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운동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고전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씨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투리 시간에는 수천 권의 책을 복사, 제본, 스캔하고 절판된 책을 구하러 다녔다.
노조 문서가 이적표현물?
사법당국은 그러나 노동자의 책 운영을 '이적 행위'로 단정했다. 여기 올라오는 도서들이 '이적표현물'이며, 이적표현물을 올린 이유 역시 '이적', 즉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찰은 이 씨의 집에서 107권의 책과 자료를 압수했다. 김일성·주체사상·통일운동을 다룬 책 59권이 포함됐다. 또 영화 <변호인>에 등장했던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에드워드 카의 <러시아 혁명>, 정치학 고전인 레닌의 <국가와 혁명>, 경제학 고전인 마르크스의 <자본론>, 교육학 고전으로 불리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자인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등도 '금서'로 판단해 압수했다.
이 가운데에는 공공도서관 등에서 열람이 가능하고 헌책방 등을 통해 구입이 가능한 것들이 상당수다.
이 씨가 철도 노조 활동을 하며 운동 방향 등을 밝힌 문건들도 이적표현물로 간주했다. 2013년 민영화저지 철도파업 당시 이 씨가 조합 게시판에 올린 "전면파업만이 살 길이다, 현재의 필공파업으로는 안 된다. 전면파업을 즉시 시행하자"는 게시글은 '국가변란을 위한 선전선동 활동'의 증거물이 되었다. 성과연봉제 퇴출 논의 내용이 담긴 지난해 철도노동조합 대의원대회 문서도 마찬가지였다. 대공분실에서 이 씨가 "이게 왜 압수대상이냐"고 묻자, 경찰은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전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신촌 보안분실에서 이 씨는 네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압수한 데스크톱 하드디스크, USB, 스마트폰 SD카드 등에서 '계급',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노동', '투쟁' 등으로 검색해 나오는 파일 모두를 복사해갔다.
사이트 운영을 넘겨받은 지 6년 만에 이뤄진 압수수색과 경찰 조사였다. 이 씨는 예전부터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2014년 통신사실 조회 신청을 했고, 그 결과, 수사기관에서 이미 자신의 통신 내역을 조회한 사실도 알았던 터였다. 그러나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이 씨는 '왜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씨가 경찰 조사를 받는 사이, 20여 개 시민사회 단체가 모여 '노동자의 책 국가보안법 탄압저지 공동행동'이라는 연대체를 결성했다. 이 씨는 지난해 8월 공동행동이 연 기자회견에 참석해 "노동자의 책에 국한된 탄압이 아니라 9월 퇴출연봉제를 앞두고서 지금 시기를 골라 탄압한 명백한 노동운동에 대한 침탈의 성격이며, 제 사상, 학문, 양심의 자유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선두부대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탄압"이라고 밝혔다.
철도노조도 이후 성명을 내고 "대부분의 자료가 합법적인 출판물이고 운영자가 누구인지와 누구든 접근할 수 있도록 수년간 운영된 사이트이고, 인데 특히 압수물품 중 철도노조의 정기대의원대회 자료가 있다고 하니 황당할 따름이라며, 노동조합 공식회의 자료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규탄했다.
촛불이 타올랐고, 그는 수감됐다
네 차례 조사 후 경찰 측은 잠잠해졌다. 주변에서 다들 '잘못 짚어도 한참 짚었다'며 별일 없을 거라 이 씨를 위로했다. 그렇게 흐지부지된 줄 알았다. 이 씨는 전과 다름없이 중고 서점에서 절판된 책들을 구입하고, 그것들을 PDF 파일로 만들어 노동자의 책에 올렸다. 그리고 지난해 늦가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졌다. 이 씨도 광화문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지난 1월 5일 100만 촛불이 200만 촛불로 더 크게 번지던 그 때, 그는 결국 구속됐다.
"한국철도공사라는 국영기업체 직원임에도 신분을 망각하고 사회변혁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학생과 일반인에게까지도 의식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한국철도공사의 영향력이 매우 높아 그 위험성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청소년, 학생이나 '노동자의 책' 회원을 포함한 다른 국민들에 대해 계속적인 의식화 시도가 예상되며, 이를 조기 차단할 필요성이 대단히 크다."
"특히,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학생과 일반 네티즌들에게 이 씨가 게시·반포한 이적표현물들이 지속적으로 유포되게 방관하는 것은 우리사회에 끼칠 해악이 너무도 크므로 조속한 격리가 필요하다."
검찰이 법원에 보낸 영장청구서의 내용이었다. 이 씨는 주거와 직장이 확실했고, 범죄 증거인 책들은 대부분 사이트에 올라와 있었다.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 씨와 변호인들은 반발했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검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구속되는지 몰라요?"
검사는 이 씨가 경찰 조사 후 더 열심히 활동한 게 죄라는 취지로 말했다. 왜 그동안 반성하지 않았느냐는 투였다. 이 씨가 조사 후에도 노동자의 책 업로드 활동을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적행위를 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떳떳했다. 하지만 공안의 판단은 달랐다.
반 년 만의 갑작스러운 구속에 공동행동과 노동자의 책 회원들은 분노했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곶감 빼먹듯 간첩 사건을 만들어내던 공안당국이었다. 이번에도 공안 몰이로 촛불 민심을 뒤집으려는 얄팍한 수가 아닌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씨와 과거 함께 운동을 했던 A 씨는 "검찰이 이진영 대표를 중심으로 이적 단체 사건으로 엮으려고 압수수색을 했다가 별 건수가 없어서 그보단 약한 이적표현물 사건으로 기획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 씨의 동지를 자처하는 이들은 촛불집회 연단에 서서 이 씨 석방을 촉구하는 한편 공안당국을 비판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했다.
또다시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치소 생활을 하게 된 이 씨는 온갖 불합리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복숭아뼈가 바닥에 부딪히면 통증을 느끼는 탓에 신발을 신고 양반다리를 하자 양손이 뒤로 꺾인 채로 수갑이 채워지는 벌을 받았다. 또 교도관 회의를 통해 서신 검열 대상자로 지정되기도 했다. 형이 확정되지도 않았지만, 그는 이미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배심원 '오염' 우려해 국민참여재판 거부한 검사
지금도 헌책방에 버젓이 놓인 1980~1990년대 금서들을 모으고 나눈 이 씨의 행위가 과연 죄일까. 평소 사회 변혁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의 행위는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공안당국의 주장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공안당국이 문제 삼은 그의 사상은 재판정에서 옳고 그름을 다퉈야 할 대상일까. 이 씨는 이 모든 질문을 '상식적으로' 따져보고 싶었다. 지난 3월 열린 재판준비기일에서 이 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담당 검사는 반대했다. "피고인이 이 사건을 사회화하여 정치적 선동으로 악용할 것이고 배심원 또한 오염시킬 것"이라고 했다. 방청석을 메운 이 씨의 '동지'들이 배심원들의 판단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주장인데, 검사는 이를 '오염'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이 씨는 이 발언이야말로 검사의 시대착오적 발상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격분했다.
"사상의 자유를 겉으로는 논하면서도 그 사상의 자유를 논하는 대상에서 일반 대중은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상의 자유는 이제 이 땅에서도 실현되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이미 인정되고 있는 것과 비교해 오직 사법의 영역에서는 여태껏 구태의연한 태도가 여전해 제가 이 재판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을 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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