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김경욱의 데자뷔] 김기덕과 홍상수, 또는 <그물>과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은 영화가 아니라 정치의 계절, 모든 이슈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 김기덕의 22번째 장편 영화 <그물>과 홍상수의 18번째 장편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차례로 개봉을 했다. 김기덕과 홍상수는 동갑이며, 1996년에 <악어>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나란히 데뷔작을 선보였다. 이후 두 감독은 쉬지 않고 영화를 찍었으며, 해외에 가장 널리 알려진 감독들로서 한국 영화의 중요한 작가들로 자리매김했다. 만일 그들의 영화가 없었다면, 지난 20년간의 한국 영화는 엄청난 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는 다소 초라했을 것이다.

김기덕과 홍상수는 위에서 언급한 공통점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영화 세계의 차이 때문에 그들 영화의 궤적에 특별히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단순한 차이 하나를 들어보면,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이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는 반면,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전자가 비극이라면, 후자는 일종의 희극이다. 이러한 차이는 <그물>과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먼저 분단 영화 <그물>을 살펴보자. 김기덕은 이전에도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수취인불명>(2001), <해안선>(2002) 등,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그물>에서, 북한의 어부 철우는 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다. 조사를 시작한 국정원은 철우가 설명하는 경위를 전혀 믿지 않는다. 국정원은 그에게 간첩이라고 자백하거나 귀순자가 되라고 강요한다. 아내와 어린 딸이 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북한에 돌아가야 하는 철우는 완강하게 버틴다. 심지어 그는 '본 것이 없어야 돌아가서 말할 것도 없다’면서, 조사실 밖에서는 눈을 감아버린다.

철우가 온갖 고초를 겪는 과정이 실제로 어떤지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최승호의 다큐멘터리 <자백>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결국 철우는 북한에 돌아가게 되지만, 보위부는 그를 간첩으로 의심한다. 그물이 스크루에 걸리는 단순한 사고는 분단 국가의 주민에게는 운명 전체가 그물에 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철우는 분단의 강고한 그물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철우는 김기덕 영화의 남성 주인공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북한 특수부대를 탈영한 <야생동물보호구역>의 홍산을 떠오르게 만든다. 홍산은 격투에 능하고 의리 넘치는 인물이지만, 자본주의 도시 파리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순박하다. 반면 화가가 되려다 실패한 남한 유학생 청해는 도둑질과 사기를 일삼으며 약삭빠르게 살아간다.

청해와 홍산은 생존을 위해 의기투합할 수밖에 없는데, 주로 청해가 홍산을 이용해먹는다. 김기덕의 다른 영화에서, 홍산과 철우 같이 우직한 인물은 보기 어렵다. 대신 청해의 형제 같은 인물들이 득실거린다. 이는 김기덕이 사회주의 북한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남한에서의 생존 방식에 대한 환멸과 회의 때문인 것 같다.

철우가 분단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희생자로 전락해갈 때,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영수는 민정을 찾아 연남동의 여기저기를 헤매 다닌다. <그물>에서, 우리는 철우가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진술하는 말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국정원과 보위부가 철우의 말을 믿지 않는 이유는 남한과 북한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국정원과 보위부는 함정을 파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를 몰고 간다.

그런데 영수도 민정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영수는 중행으로부터 '민정이 술을 마시다 옆 자리 남자와 싸웠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하는데, 민정은 전혀 아니라며 부인한다. 소문이 사실인지를 놓고 말다툼하다 영수와 민정은 헤어진다. 영화 내내 우리는 민정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우리는 그녀가 쌍둥이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홍상수는 민정이 등장할 때마나 그녀가 진짜 민정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홍상수 영화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 영화의 민정은 '유령' 같은 느낌마저 준다.

영수는 마침내 민정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는 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이 때 영수는 그녀가 민정인지 아닌지 따지는 대신,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믿을 거'라고 말한다. 사소한 소문의 진위 여부를 놓고 끝까지 추궁하던 그가 우리가 믿기에도 어려운 그녀의 말을 믿게 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첫 장면에서 영수는 중행에게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한다. 이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영수가 다리를 다친 상태로 등장할 때 시간의 경과를 인지하면서 아마도 그 사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홍상수는 <씨네21>과의 인터뷰(2016/11/10)에서 "영화 첫 장면 촬영 직전에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영수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연하게 민정이 아니라고 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다 버리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그녀를 잃는 것보다는 자신의 다른 욕망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죽음' 같은 절대적인 상실 앞에서, 그녀가 무엇이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운 일이므로,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홍상수 영화의 미장센에서 나타나는 경향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유독 공간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공간의 부분만을 보게 될 뿐이다. 영수의 방은 알아도 그의 집은 어떤지 알 수가 없고, 민정의 집 대문은 알아도 그녀의 방이 어떤지는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의 한계 또는 모호함을 생각하게 된다(영화포스터 참고). 또 파편화된 공간 속에 갇혀있는 것 같은 인물들을 보면서, 상실로 인한 트라우마의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물>에서도 철우가 계속 신문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 갇혀있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결국 분단 상태의 삶은 거대한 그물 아래 갇혀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포스터 참고). 그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김기덕은 이러한 자신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한국 사회가 너무나 나빠지고 있기 때문인지,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종이 한 장 차이의 간격 또는 김기덕 영화 특유의 매직을 고민할 여유조차 잃어버린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그물>은 현실에 지나치게 밀착해있고,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기이한 환상에 이끌린다. 그 결과 전자는 비극으로, 후자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철우가 원하는 건 물고기를 잡으면서 가족과 사는 것이다. 영수가 원하는 건 무수한 연애 행각을 멈추고 민정(또는 한 여자)과 결혼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소망을 이루기는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사회 때문인가? 인간 때문인가? <그물>과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겹쳐놓고, 다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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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동국대와 중앙대에서 영화이론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YU HYUN-MOK>(2008),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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