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사실 하정우는 죽었다

[김경욱의 데자뷔] 해피앤딩, 우리 현실은 더 나빠지고 있다

김경욱 영화평론가가 <프레시안>에서 '김경욱의 데자뷔'를 연재한다. 이를 통해 극장에 개봉되는 한국 영화 가운데 흥행작/화제작을 한국 사회 현상이자 증후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한국 영화만이 아니라 드라마 그리고 외국 영화도 상황에 따라 포함될 예정이다.

보통의 영화 평론이 개봉 직전, 또는 상영 중인 화제작들을 다루는 반면, '김경욱의 데자뷔'에서는 영화 개봉이 끝났거나 끝나가는 영화를 주로 다룰 예정이다. 좀 더 깊이 있고 심층적인 영화 평론을 위해서다. 한 편의 영화를 면밀하게 분석하려면, 다양한 방면(원작, 시나리오 등)에서의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독자에게 '김경욱의 데자뷔'가 자신이 본 영화, 또는 흥행작을 다시 한 번 곱씹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영화 <터널>을 보고, 원작 [터널]을 읽었다. 원작을 보고나니, 영화가 마치 '앙꼬 없는 찐빵'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원작에서 '평범한 가장 이정수가 개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실 공사로 붕괴된 터널에 갇혀 사투를 벌인다'는 아이디어와 부수적인 상황 정도만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원작은 주로 이정수의 구조를 두고 벌어지는 외부의 추이를 쫓아간다. 이정수가 고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그의 소식이 톱뉴스를 차지하고, 동정론을 기반으로 수많은 후원이 잇따른다. 이정수의 아내 김미진이 시공사를 찾아가 부실 공사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는 모습은 모든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한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녀는 정의를 추구하는 영웅처럼 부상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가 된다. 그러나 구조가 계속 지연되고, 구조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두 건의 사망 사건이 발생하자 여론의 향방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하나의 생명을 위해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방치해야 하는가'라는,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모두 그 방패 뒤에 숨어버린다. 이정수의 핸드폰 배터리가 완전히 소진되어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어렵게 되자, 여론은 완전히 돌변한다. 그들은 정의의 가면을 쓰고 마녀 사냥을 하듯, 피해자인 이정수와 가족들을 피해를 양산하는 악랄한 가해자로 몰아간다.

진짜 가해자들에게 편승한 언론 매체들은 군중 심리를 철저하게 이용한다. 절망한 김미진은 결국 라디오를 통해 이정수에게 '살아있다고 해도 삶을 포기해 달라'고 말하게 된다. 이정수가 자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중들은 그 책임을 김미진에게 떠넘긴다. 그들의 마녀 사냥은 피해자 가족 모두가 가해자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선택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원작 소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을 그리고 있다. 또 2013년에 출판되었으나,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이 겪었던 수난의 과정을 생각나게 만든다. 작가의 혜안이 있었겠지만, 권력과 언론이 유착해 입맛대로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상황을 적절하게 포착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에는 이 같은 원작의 내용이 거의 사라졌다. 원작을 그대로 각색해야 잘 만든 영화가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각색 과정에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럼에도 <터널>의 원작과 영화의 차이에는 주목할 점이 있다. 가장 다른 점의 하나는 김미진의 행동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의 김미진은 구조원들에게 고맙다며 배식 봉사를 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원작의 그녀가 사고의 책임 소재를 물으면서 수반된 모든 쟁점들이 사라진다.

물론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노란 잠바를 걸친 주무 부처의 여성 장관은 '잘 처리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면모를 드러내고, 이정수의 목숨보다 '하도 제2터널' 공사 지연에 따른 손실을 우위에 놓는 건설업자도 등장한다. 어쩔 수 없이 공사 재개에 동의한 김미진이 라디오를 통해 이정수에게 '아무도 안가니 기다리지 말라'고 할 때, 특히 '오지도 않는 우리'라고 표현할 때, 그리고 119구조대의 김대경이 구조를 위해 '다이빙 벨'을 닮은 장비를 타고 터널 아래로 내려갈 때,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결말 전까지 참혹한 비극을 그리면서도, 김성훈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2016년 8월 8일)에서, "관객이 재밌게 봤으면 좋겠다. 영화의 유머러스한 부분들도 즐기고 손쉽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말한 것처럼, 많은 부분들이 편하게 볼 수 있게 연출되었다. 김대경(원작에서는 이름 없이 '전문가'로 명시됨)을 코믹 연기의 달인 오달수가 연기함으로써,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게 만든다. 원작에서 이정수는 갇힌 지 25일째가 넘어가면서 '앙상하다 못해 미라 같은 모습'이 되지만, 영화의 이정수는 수염이 조금 났을 뿐이다([사진 1]).

▲ [사진 1]. ⓒshowbox.co.kr

무엇보다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엔딩이다. 끔찍한 비극을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바꾸자, 원작의 메시지는 살릴 수 없게 되고 대부분의 내용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외부의 이야기가 많이 사라지자, 이정수의 이야기 또는 하정우의 장면이 더 필요하게 되고 그래서 이정수 근처에서 사고를 당한 여성과 그녀의 애견의 에피소드를 집어넣었다.

이정수의 구조에 얽힌 에피소드도 원작과 다르게 전개되어 가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너무 난 데 없다. 이정수를 구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한 다음, 구조 영화의 재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제시하지도 않은 채, 하여튼 그는 구조된다. 여기에 납득할 만한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구조되는 장면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완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까지, 마치 죽어가는 이정수가 꿈꾸는 환상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구조되기 전 장면에서, 사고 터널의 풍경을 공중에서 훑어나가는 버즈아이 뷰 쇼트([사진 2])를 이런 생각의 근거로 제시하고 싶어진다.


무리수 같은 해피엔딩의 선택은 그것이 흥행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흥행 전략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은 몇몇 에피소드를 가벼운 톤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관객들에게 공분할 기회와 정의가 실현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정수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 나타나게 되면, 그들의 재난과 수난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결국 한국사회의 부조리 또는 기득권과 관련된 문제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은 영화'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구조에 성공하는 장면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한국방송(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대위 유시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국민을 구해내는 게 국가"라면서, 발전소 붕괴로 매몰된 사람들을 구조한다. 이것은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던 세월호참사의 트라우마를 구조에 성공하는 장면의 반복을 통해 치유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까? 판타지와 해피엔딩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사라지게/잊어버리게 만들면서, 이를 우리의 죄책감에 대한 방어기제로 동원하고 있는 것일까?

▲ [사진 2]. ⓒshowbox.co.kr

이 해피엔딩은 1990년대 말부터 2010년 이전까지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반복된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기의 한국영화에서는 특히 남성 인물들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살을 선택하는 설정이 많았다. <터널>의 해피엔딩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죽음도 반복되었다(<비천무>, <리베라메>). 집단으로 자멸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유령>, <무사>). 죽음에 이끌리는 한국 영화와 비극으로 끝장나는 남성 인물들을 보면서, 외환 위기 이후의 한국 사회를 반영한 결과라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사회에서, 영화는 죽음에 이르는 남성 인물들 즉, 가짜 희생양을 제시하면서 현실의 증폭하는 갈등과 폭력을 완화하는 일종의 '희생 제의의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제 해피엔딩이다(이 문제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이명박 시대의 간첩 영화 <의형제>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 송지원은 간첩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도 멀쩡하게 살아남아 이정수의 경우보다 더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면밀하게 차이를 가려내야겠지만 비슷한 해피엔딩의 영화를 투박하게 나열해보자면, <써니>, <7번방의 선물>, <베테랑>, <내부자들> 등이 있다.

물론 비극과 해피엔딩을 놓고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외환 위기 직후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완벽한) 해피엔딩에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지나치게 과잉으로 넘쳐흐르는 해피엔딩을 요구할 때, 사실 우리의 현실은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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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동국대와 중앙대에서 영화이론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YU HYUN-MOK>(2008),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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