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그는 왜 혁명을 했나

'독재자' 논란 속 무상의료·무상교육으로 폭넓은 지지 얻어

쿠바 혁명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26일(이하 현지 시각)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 평의회 의장은 국영 TV를 통해 전날인 25일 밤 10시 29분 경 피델 카스트로가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라울 카스트로는 "항상 승리를 향해"라는 혁명 구호를 말했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의 생전 유언에 따라 화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이라고 밝혔으며, <에이에프피>통신을 비롯해 외신들은 앞으로 9일 동안의 애도 기간을 거쳐 다음 달 4일 장례식을 열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 9월 쿠바 국영 매체가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와 면담하는 장면을 내보낸 이후로 공식 석상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외신들은 노환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지난 4월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서 열린 쿠바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 폐회식에 참석, "나는 곧 아흔 살이 된다. 곧 다른 사람들과 같아질 것이며 시간은 모두에게 찾아온다"고 말하며 사실상의 고별사를 전하기도 했다.

▲ 리커창(맨 왼쪽) 중국 총리와 만난 피델 카스트로 (맨 오른쪽) ⓒAP=연합뉴스

1926년 스페인 출신 이주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친미 독재 정권이었던 폴헨시오 바티스타를 무너뜨리고 공산 혁명에 성공했다. 이후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쿠바 공산당 제1서기, 국가평의회 의장 등을 맡으며 쿠바의 지도자로 군림해왔다.

그는 2006년 건강을 문제로 일선에서 퇴진했고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실권을 잡게 됐다. 2년이 지난 2008년에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라울에게 물려준 뒤 공식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49년 동안의 재임 기간을 마무리했다.

쿠바를 바꾼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의사 출신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의 공산 혁명을 이끈 주역이다. 그는 1945년 아바나 대학교에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투신했다. 당시 라몬 그라우 대통령의 부패에 대항하며 학생운동가로 주목을 받았다.

1952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지만 실패했다.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은 카스트로는 1955년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멕시코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혁명의 동지인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의사, 체 게바라를 만났다. 쿠바의 혁명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1956년 11월 함께 쿠바로 향하는 그란마호에 몸을 실었다. 수년간의 게릴라 운동 끝에 이들은 1959년 1월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쿠바 혁명에 성공했다.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쿠바의 경제부터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1902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여전히 미국에 종속돼있던 쿠바의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그는 1959년 5월 17일 제1차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당시 쿠바 농경지의 대부분은 사탕수수 작물 재배를 위해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미국의 대농장 시스템을 해체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외국인들의 농지 소유를 제한한 조치에 농민들은 환호했고, 1961년에는 미국의 기업을 국유화하고 집단 농장을 만들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추진했다.

이와 함께 카스트로는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시스템을 구축했다. 집권 이후 빠른 속도로 학교를 건립해 50%가 넘나들던 문맹률을 4% 안팎으로 떨어뜨렸다. 또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현재까지도 쿠바의 의료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피그만 침공 이후 국교 정상화까지 53년

미국에게 카스트로가 지배하는 쿠바는 '손톱 밑 가시' 같은 존재였다.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연대하면서 남미 국가들의 혁명을 지원하는 카스트로를 미국이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실제 미국은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한 바로 다음날 쿠바를 침공했다. '피그만 침공'이라고 불린 이 사건으로 미국과 쿠바는 본격적인 적대 관계에 돌입했다.

미국은 1961년 4월 17일 중앙정보국(CIA)을 주축으로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구성된 '2506 공격여단'을 창설, 쿠바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 침공에서 미국은 100명 사망, 1000여 명 체포라는 최악의 결과에 직면했다.

이 사건 이후 미국과 쿠바의 외교는 단절됐고 미국은 카스트로의 암살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한 언론은 미국이 카스트로에 대해 600여 번이 넘는 암살 시도를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카스트로가 "올림픽에 '암살에서 살아남기'라는 종목이 있다면 내가 1등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에 미국과 소련의 핵위기에도 쿠바는 어김 없이 등장했다.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 탄두를 설치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 쿠바와 미국 간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하기 시작했다. 1962년 미국의 금수 조치가 시작되면서 쿠바의 경제 상황은 차츰 어려워졌다. 여기에 냉전 이후 공산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쿠바가 기댈 수 있는 외부 세력도 없어져버렸다. 미국의 금수 조치와 이에 따른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쿠바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망명자도 많아졌다. 혁명 이후에 미국으로 넘어간 인원은 100만 명에 달한다.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에도 카스트로는 권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그를 지지하는 쿠바 민중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은 쿠바 국민들에게 과거 친미 독재 정권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 피델 카스트로 ⓒAP=연합뉴스

20세기에 들어서는 베네수엘라의 고(故) 우고 바체스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석유를 저렴하게 수입, 경제적 어려움을 다소 나마 만회했다. 차베스는 풍부한 석유자원을 쿠바에 거의 반값에 판매했고, 쿠바는 뛰어난 의료진을 베네수엘라로 파견했다.

부시 정부 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극한 갈등을 보였던 쿠바는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지난 2014년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추진했다. 지난 1961년 외교를 단절한 이후 53년 만이었다.

2015년 8월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이 개설됐고 올해 2월에는 양국을 오가는 비행기 정기 노선도 다시 개통됐다. 또 3월에는 라울 카스트로 의장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88년만에 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카스트로는 반인권적인 독재자?

카스트로는 국제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권좌에 머물렀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카스트로가 표현과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제한하며 독재자로 군림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서구에 기반을 둔 '휴먼라이츠워치'를 비롯한 인권 단체들은 카스트로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는 것을 비롯해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고문을 자행했다면서 쿠바 내 인권 침해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카스트로는 혁명 이후 체제 반대 세력들을 총살하거나 투옥시키면서 철권을 휘둘렀다. 반혁명적인 활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검열도 강화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쿠바 국민들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자유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50년 동안 계속됐던 미국의 금수조치가 쿠바의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보고서를 통해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관계정상화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 2000년 이후 쿠바 내에서 정치적 자유가 다소 개선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40여 년 간 상상하기도 힘든 반체제 모임 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미국의 가수가 쿠바를 찾아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일부에서는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가 처한 상황과 현실에 맞춰 개혁을 진행했다면서, 과격한 성향을 보이는 라울 카스트로보다는 유연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 피델 카스트로(왼쪽)와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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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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