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 쪽에선 참석자들에게 “쿠바 사람들이 미국에서 즐기는 자유를 아바나에서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쿠바 민주화의 압력을 계속할 것이다“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발언을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로 들려주기도 했다. 쿠바 당국은 독일과 폴란드의 국회의원 세 명을 비롯하여, 이 반체제 집회에 참가하려고 아바나 공항에 내린 일부 외국인 참석자들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고 도로 돌려보냈다. 반카스트로 성향을 지닌 몇몇 유럽 우익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로 입국이 거부당했다.
그렇지만 쿠바 당국은 이 집회 자체를 막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반대파를 허용하는 민주주주의가 쿠바에도 살아있다는 점을 바깥세계에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반체제 세력이 카스트로 정권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한 소수파이기에 내버려두었다는 풀이다. 같은 날 저녁 아바나 시내 ‘반(反)제국주의광장‘에서 열린 친(親)카스트로 집회에선 20만명이 참석, 카스트로의 반미 연설을 들으며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아바나 해변에 자리 잡은 이 광장은 지난 2000년 카스트로 정권이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기 위해 만들었고, 그 뒤 부시행정부와 마찰을 빚을 때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어 “양키는 각성하라”고 외쳐대는 곳이다.
***곳곳에서 일렁이는 변화의 물결**
쿠바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 반체제 집회가 열리기 두 주 전인 지난 5월 6일. 같은 반제국주의 광장엔 수천명의 쿠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반미 구호를 외쳐대거나, 카스트로를 찬양하지 않았다.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정치집회가 아니라, 미국 록(rock)악단인 '오디오슬레이브'(Audioslave)가 연주하는 생음악에 맞춰 신나게 온몸을 흔들어대는 자리였다. 미국 록 밴드의 쿠바 공연은 카스트로 혁명 뒤 46년만에 미국과 쿠바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허가를 받은 최초의 일로 기록된다.
긴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연주자들이 노래하는 록 음악은 쿠바혁명 초기만 해도 퇴폐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영국의 비틀즈 앨범을 갖고 있는 것조차 반혁명적인 사람으로 비판을 받았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아바나엔 존 레논의 동상이 서있다. 미 록밴드인 오디오슬레이브 공연을 통해 두 나라 정치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계산을 했을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쿠바 젊은이들에게 자본주의와 자유의 바람을 일으키고, 카스트로 행정부는 젊은이들의 욕구불만을 풀어주는 계기로 마련하길 바랬다고 짐작된다. 아무튼 이 또한 쿠바가 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이벤트다.
쿠바혁명의 당위성을 굳게 믿는 노년층과 사회주의 이념에 투철한 지식층은 그러한 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필자가 쿠바에 머무는 동안 필자의 통역으로 뛴 쿠바 외국어대학 강사 리버 프로메타(28)는 쿠바공산당의 하부조직인 청년동맹 회원. 그는 쿠바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힙합음악을 비롯한 미국의 ‘쓰레기문화’를 좋아한다고 개탄했다. 그는 이런 풍조가 미국의 교묘한 반(反)쿠바혁명전략, 카스트로 체제붕괴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다.
***미 봉쇄 견뎌낸 바탕은 민중지지**
쿠바를 겨냥한 미국의 경제봉쇄(embargo, 쿠바 사람들은 미국쪽 용어인 embargo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훨씬 강한 blockade를 용어를 즐겨 쓴다)는 쿠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옥죄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강점한 상태에서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집단적 징벌(collective punishment)과 맥을 같이 한다.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지난 46년 동안 미국의 줄기찬 포위망을 견뎌왔다. 그 저력의 바탕은 쿠바혁명을 지지하는 쿠바 민중들이다. 1950년대 바티스타 친미 독재정권 아래서 가난해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고, 돈 없어 병원 문턱에서 죽어야 했던 민초들은 쿠바혁명에 열광했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에겐 든든한 우군이 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이다. 쿠바에서 차베스 대통령의 인기는 대단하다. 길가는 학생들에게 차베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아홉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다. 차베스가 다스리는 베네수엘라는 풍부한 석유자원을 쿠바에 대주고, 카스트로는 쿠바의 뛰어난 의료진을 베네수엘라에 대준다. 자연자원과 인적자원의 교환이다. 베네수엘라엔 1만명의 쿠바 의사가 나가있고, 그 대가로 하루 5만3천배럴의 석유를 공급받는다. 쿠바로 수출되는 베네수엘라 석유는 세계석유시장 가격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카스트로-차베스 동맹은 남미를 미국의 전통적인 텃밭으로 여기는 미 부시행정부의 골칫거리다. 카스트로-차베스는 브라질의 좌파정권을 이끄는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의 지원 사격 아래 그동안 미국이 추진해왔던 미주 자유무역지대(FTAA) 구상에 맞선 대안을 찾는 중이다. 진보적인 쿠바 지식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FTAA는 ‘자유무역’이라는 이름 아래 반미국가인 쿠바를 ‘왕따’시키고 남북 아메리카 대륙경제를 미국 시장경제에 더욱 굳건히 종속시키려는 뻔뻔스런 구도에 다름 아니다.
***과도기 거쳐 집단지도체제로**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최고권력 자리를 지켜온 인물이 카스트로다. 33살의 나이에 쿠바혁명(1959년)으로 권력을 한 손에 쥔 지도 46년, 카스트로(1926년생)의 나이도 어느덧 80에 이르렀다. 쿠바는 민주주의 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9명 갈리는 동안 카스트로는 절대권력 자리를 지켰다. 미국의 쿠바봉쇄정책과 1990년대 초 공산권 몰락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쿠바에서 만난 사람들은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죽은 뒤 누가 권력을 이을 것인가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후계구도를 말하는 것을 삼가는 모습이다. 북한보다는 정도가 훨씬 약하지만 마찬가지로 통제사회인 쿠바에서 후계구도를 말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사항이다.
카스트로가 죽기 전에 정계일선에서 은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카스트로의 임기는 끝이 없다. 지난 2003년 3월 쿠바 의회의 투표로 5년 임기의 국가평의회 의장에 다시 뽑혔다. 그로선 6번째 의장직 재선이었다. 카스트로 혼자만 입후보자로 나섰고, 경쟁후보 없이 609명 의원 전원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 쿠바의 정치권력은 CCP로 일컬어지는 공산당 일당독점체제다. 피델 카스트로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다. 쿠바혁명 뒤 체제반대세력들을 총살하거나 투옥시키면서 철권을 휘둘렀던 카스트로는 그 특유의 선동력과 카리스마로 인구 1천1백만의 쿠바를 이끌어왔다.
카스트로의 건강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1년 연설 도중에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정신을 잃어 연설이 중단됐었다. 지난해 10월 공식행사 때는 걷다가 넘어져 팔과 무릎에 골절상을 입었다. 올해 3월 쿠바 카스트로 정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온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그 후유증 탓으로 전해진다.
카스트로가 자연인으로서의 수명을 다한다면, 현재로선 그의 친동생이자 권력서열 2인자인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1931년생)이 ‘후계자’ 0순위다. 그는 1959년 쿠바혁명 당시 체 게바라와 같은 지역 사령관으로서 실전에 뛰어들었다. 쿠바 현지 사람들이 품고 있는 라울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능한 한 쿠바 현실에 맞춰 개혁을 추진해가려는 형과는 달리 라울은 과격하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쿠바 국립대학의 한 철학교수는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런 어조로 “카스트로가 죽는다면, 동생인 라울이 권력을 이어받더라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집단지도체제가 도입될 것이란 예측이다. 차세대 지도자로는 카를로스 라헤 국가평의회 부의장(1951년생), 그보다 훨씬 젊은 펠리페 페레스 로쿠에 외무장관(1965년생) 등이 꼽힌다. 멀지 않은 시점에서 쿠바가 권력분립과 다당제를 비롯, 민주화를 향한 정치개혁의 세찬 물결에 부딪치리라는 생각을 하며 아바나 공항을 떠났다.
kimsphoto@yahoo.com
(사진설명@김재명)
1. 카스트로의 얼굴이 새겨진 쿠바혁명 46주년 기념 포스터.
2.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카스트로 체제를 돕는 끈끈한 동맹자로, 쿠바에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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