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 북미 협상 문 여나?

[정욱식 칼럼] 힘 빠진 박근혜 정부와 미국의 전환 징후

다소 엉뚱하지만 현실성 있는 생각을 해본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북미 협상의 문을 열어주는 '나비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안팎에선 한반도 평화협정에 대한 능동적인 입장을 갖추진 않고서는 북핵 능력 강화를 억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는 주장이 간간이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북한 붕괴론'이라는 주술에 사로잡힌 박근혜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식물 정권'으로 추락할 상황에 몰렸다. 미국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의 현실성이 높아질 수 있는 여러 징후들도 발견된다. 우선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25일 미국 외교협회(CFR) 간담회에서 "북한을 비핵화하겠다는 생각은 실패한 개념"이라면서 "북한은 핵무기를 그들의 생존을 위한 티켓으로 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북한의 핵 능력) 일종의 제한"이라며 "북한은 이 요구에도 순순히 응하지는 않을 것이며 중대한 유인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 내용은 국내 언론들도 크게 다뤘다. 그런데 주목할 게 또 있다. 클래퍼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이 며칠 전에 북한의 고위 관료들을 만난 리언 시걸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이었다. 그는 클래퍼에게 비핵화가 아니라 "북핵 프로그램의 유예(suspending)"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명확한 답변이 나오지 않자 '유예는요?'를 두 차례 더 반복했고 이에 대해 클래퍼는 최선의 희망은 "일종의 제한(cap)"라고 답변한 것이다. 유예, 동결, 제한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멈춰 세워야 한다는 공통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리언 시걸은 왜 '유예'라는 단어를 집요하게 사용한 것일까? 추측건대, 이게 바로 지난주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북미간의 '트랙 2' 회동의 핵심 의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북한과의 회의 직후 사견임을 전제로 "일부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마도 북한에게 핵 프로그램을 유예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고, 북한으로부터 미국의 상응 조치에 따라 고려해볼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클래퍼에게 이에 대한 입장을 물었던 것이다.

이번 말고도 클래퍼가 국내 언론에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난 5월 초 '비공개' 한국 방문이다. 이를 포착한 <중앙일보>는 복수의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과 관련한 논의를 할 경우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는 취지의 문의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문의를 일축했다. 하지만 클래퍼는 북핵을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중대한 유인책(significant inducements)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염두에 둔 유인책의 핵심이 바로 평화협정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클래퍼의 발언이 오바마 행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보긴 어렵다. 존 커비 국무부 대변인은 바로 "미국 대북 정책의 목표는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이라며 "클래퍼 국장의 발언은 우리 정부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시걸이 유도한 클래퍼의 답변은 차기 미국 정부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시기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조만간 미국 본토에까지 다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대처 방안에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싱크탱크들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이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성공해 핵탄두를 장착하는 상황은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한다고 말이다.

백악관행 티켓을 거의 손에 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이메일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클린턴이 2013년 6월 4일 골드만삭스 임원진을 대상으로 한 강연의 일부이다.

"만약 북한이 미사일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해 소형 핵무기를 ICBM에 장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면, 미사일 방어체제(MD)로 중국을 포위하고 더 많은 함대를 아시아-태평양에 보내겠다고 중국측에게 말했었다"

이 발언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클린턴이 설정한 금지선을 잘 보여준다. 그건 바로 '북한의 핵탄두 ICBM 보유 저지'이다. 그런데 미국의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북한이 2020년경에 이 문턱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클린턴으로서는 재선 가도에 악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클린턴은 백악관에 들어가자마자 '옵션'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무력 사용은 북한의 선제공격 신호가 명확해지는 상황이 오지 않는 한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중국을 압박해 대북 제재를 강화하고 그래서 북한의 굴복을 유도하겠다는 것도 클린턴이 국무장관 재임 시 '헛수고'한 것이었다. 마뜩치 않겠지만 대북 협상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마침 대북 협상의 문을 열지 못하게 했던 박근혜 정부의 힘과 신뢰는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힘을 쓸 수 있었던 데에는 "대북정책에서 동맹국인 한국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존중하겠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방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기 미국 정부는 이렇게 여유를 부릴 처지가 못 된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은 정당성을 상실했고 잔여 임기를 고수해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반면 협상의 문을 열려고 하는 중국의 움직임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최근 북중 간의 고위급 접촉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차기 미국 정부를 상대하기 위한 사전 작업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기실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동결과 평화협정 체결은 막장으로 치닫는 한반도 드라마의 최후의 반전 카드 가운데 하나이다. 비핵화는 장기적이고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반전의 희망이 박근혜 정부의 무력화로부터 나온다는 게 참으로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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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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