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과학연구위원회 제안으로 지난 21~22일(현지 시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진행된 접촉에 참석한 리언 시걸 미국 사회과학연구위원회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은 22일 기자들과 만나 "개인적인 견해로 말씀드리자면 일부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고 밝혀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한 협상 가능성을 타진해봤다는 점을 시사했다.
시걸 국장은 "북한은 핵과 미사일에 대해 논의하기 전 평화협정과 평화 프로세스를 원한다고 밝혔다"면서 "우리는 새로운 행정부에 (대북정책과 관련한) 새로운 사항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접촉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이번 접촉이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자리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측 인사로 참석한 로버트 갈루치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경험이 있으며, 조지프 디트라니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도출됐을 당시 미국 측 차석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특히 이들은 그동안 북한의 입장을 비공식적인 경로로 미국 정부 측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에서는 한성렬 외무성 부상과 장일훈 유엔 주재 차석대사 등 5명이 참석했다. 북한은 평화협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비핵화는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이는 미국의 차기 정부를 의식한 탐색용 발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접촉과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정부는 이번 협의가 민간 차원의 대화로 정부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면서 "참석자들 역시 미국 정부의 현 대북 정책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리언 시걸 국장을 포함, 이번에 북측을 접촉한 인사들은 접촉 결과를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어 미국의 차기 정부에 제언할 것으로 알려져, 이를 미국의 현 정부와 관계가 없다고 선을 긋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교부, 자기가 못하니까 평가 절하"
이번 접촉이 민간 차원의 대화일 뿐이며 미국 정부와 상관없다는 외교부의 반응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자기가 못하니까 이런 식으로 깎아 내리는 것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정 전 장관은 24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미국 측에서 접촉에 나온 사람들이 단순히 대학 교수나 전문가들이 아니고 과거에 북핵 문제와 관련, 최전선에서 북한과 협상했던 사람들"이라며 "이런 사람들은 북한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들은 돌아가면 보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이걸 단순히 민간 차원의 대화로 의미를 줄이기 어렵다"며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것을 예로 들었다.
정 전 장관은 "당시에도 민간 차원에서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고 남북 정상회담을 합의해서 돌아오니까 미국 정부가 '잘됐다. 한국 정부도 그거 받아라'라고 했다"면서 "민간 차원이니까 정부의 지시가 없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에 움직인 것을 간단히 볼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입장에서 이번 접촉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의 싱크탱크나 다음 정부를 구성할 사람들은 '오바마 정부 때 전략적 인내라는 북핵 정책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을 5번이나 하지 않았나, 앞으로 6차, 7차 핵실험 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사전에 이를 막으려면 북한과 대화 가능성을 타진하는 모임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라는 필요를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한미 양국이 압박과 제재를 통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합의됐기 때문에 갑자기 (입장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이번 북미 접촉을 계기로 북한이 미국 차기 정부와 대화와 협상 방식으로 문제를 풀 가능성이 높다는 데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북한이 핵 보유국 지위를 갖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북한이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북한은 대화를 하는 동안은 사고를 안 치거나 비교적 적게 치지만, 대화가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북한의 협상 카드는 커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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