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노틀담 성당 건너, 세느강을 사이에 두고 오랜된 작은 서점이 하나 있다. 헤밍웨이를 포함한 문인들에게 집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 문을 연 것은 1919년이다. 한국에서 3·1만세운동이 있었던 때부터 시작됐으니, 근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겐 3년 전 파리를 들를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방문할 곳으로 메모를 해놓았던 장소이다. 서점 안 곳곳은 시간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지문처럼 묻어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파리 시민들이 쉼 없이 방문을 하는 풍경이 마냥 부러웠다. 매년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은 2000만 명에 이른다. 온 도시가 관광지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서점 주변도 그렇다. 노틀담 성당과 세느강의 접근성이 좋은 지역이라 호텔과 레스토랑이 가득했다. 매니저와의 인터뷰 중에 물어봤다.
"이 주변은 다 관광지던데 서점말고 다른 것을 제안하거나 운영상의 문제는 없느나?"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서울사람스러운 질문이다. 매니저가 말하길 "우리 서점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시민,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어느 개인이 이 곳을 맘대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더불어 이런 말을 덧보탰다.
"상가 임대료 같은 경우도 법적으로 당연히 보호받기에 이 곳은 다음 세기에도 서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파리가 계속 남아 있다면…."
신촌에서 홍익대학교 정문 쪽으로 가는 길, 와우교 가까운 건물 지하에는 '꽃'이라는 술집이 있다. 20명만 앉아도 더 이상 앉은 자리가 없는 작은 곳이다. 홍대에 이른바 인디 문화가 시작될 때 문을 열어 지금까지도 운영된다. 간판도 없고 문 여는 시간도 주인 맘이라 제각각이다. 그러다보니 아는 사람만 찾아온다. 이런 곳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행사 포스터와 다녀갔단 손님들의 글들이 벽에 빼곡하다. 일 년에도 몇 번씩 한자리에서 가게가 바뀌는 홍대에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것이 놀라와 그 비결을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씩 웃으며 "다 집주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월세도 주변 시세를 따라 마구잡이로 올리지 않고, 세입자가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배려받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의 상가건물 임차인들은 계약 갱신 청구권을 가지고 있다. 임대인은 중대한 원인이 없는 이상 임차인이 요구하는 계약 갱신을 거절할 수 없다. 만일 중대한 원인이 없음에도 갱신을 거절하고자 하면 건물주는 상가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 보상에는 계약 만료로 인해 임대인이 상실하게 될 고객의 가치와 이전비용 그리고 동등한 가치가 있는 고객의 확보를 위한 비용이 포함한다. 계약의 종료로 입게 될 유형 무형의 재산 손실이 보상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비교적 동등한 선상에서 임대인의 재산권과 임차인의 재산권이 논의될 수 있도록 법이 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은 임대인의 권리 보호에는 충실한 반면 임차인의 권리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주택 임대 상황도 별 다를 바 없다. 서울의 상가건물 임차인들은 어쩌다 우연히 천사 같은 건물주를 만나 그가 은혜를 배풀어 주길 빌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유대인 샤일록처럼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가 금기시 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겐 너무도 당연한 금융업이 그런 취급을 받았던 셈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이자는 '시간'을 통해 돈을 버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시간'은 신의 것인데, 사사로이 개인이 그것을 통해 돈을 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공간'은 어떨까? 그런 관점으로 '공간' 즉 '땅'을 보면 어떨까? 내가 돈을 내고 샀기에 내 맘대로 한다는 식의 무한한 욕망의 인정이 과연 자연스러운 인류의 방식이어야 할까 싶다.
땅과 건물을 둘러싼 문제를 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조물주 위 건물주'의 위세는 여전하다. 어린 아이들의 희망 2순위가 건물주라는 미디어의 보도는 이런 우리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생존권'과 '소유권'이 같은 기준에서 소비되는 기이한 일이 상식처럼 변해가는 것이다.
다시 '생존권'과 '소유권'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다. 바로 어제 유명 연예인 건물주와 분쟁(?)을 겪고 있는 세입자 이야기가 여기 저기 매체에 올라왔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세입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모습에 놀랐다. 생각해보면 '용산 참사' 이후 우린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현장 하나를 사수하고 어찌어찌 살아남았다는 무용담만을 유통시켰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실질적 법치주의'를 살아가는 21세기 파리와 '형식적 법치주의'를 살아가는 18세기 서울 사이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 8991 km보다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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