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은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총 14차례 국장급 협상을 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지난해 정상회담에서 올해 안으로 협상을 하기로 합의했다. 협상 대표도 국장급에서 차관급으로 격상키로 했다.
그러나 7년 만에 열리는 이번 회담에서 실질적인 성과가 나올 지는 미지수이다. 한국은 양국 해안선의 중간선을 EEZ 경계로 정하자는 '등거리'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반면 중국은 해안선의 길이와 인구 등이 많은 쪽이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형평의 원칙'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유엔해양법협약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EEZ가 중첩되면 협상을 통한 해결을 주문하고 있다.
EEZ 획정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어도 관할권에 있다. '수중 암초'인 이어도는 한국의 마라도에서 149km, 중국의 퉁타오에서 247km가 떨어져 있다. 한국은 2003년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려고 했고, 이에 맞서 중국은 이어도를 '쑤옌자오'로 이름 짓고는 자신의 관할권이라고 주장해왔다.
더구나 중국은 2013년 11월에 방공식별구역(ADIZ)에 이어도 상공을 포함시켰고, 한국도 한 달 뒤 ADIZ에 이어도를 포함시켰다. 이로 인해 이어도는 한중 양국이 주장하는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 모두에서 중첩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EEZ 협상 모멘텀 살려 나가야
설상가상으로 현재 한-중 간의 EEZ를 둘러싼 갈등은 과거와는 다른 맥락을 품고 있다. 세 가지 흐름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중국이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해양 세력권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미국이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앞세워 중국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미-중 간의 해양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에 제주해군기지가 본격적인 가동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한-중 간의 EEZ 협상이 제자리를 맴도는 사이에 이들 세 가지 문제들이 악순환을 형성할 때 나타날 수 있다. 이어도를 사이에 두고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면, 한국과 중국 모두 유연한 태도를 보이긴 더욱 어려워진다. 이 틈을 헤집고 미국이 개입하려고 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오늘날 동중국해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이어도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남중국해는 이어도의 미래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중국과의 EEZ 협상의 모멘텀을 살려 나가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양국은 두 가지 사항을 이미 합의해놓고 있다. 하나는 이어도는 '수중 암초'이기 때문에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자는 것이다.
이에 더해 양국은 조속한 획정을 시도하되, 우선적으로 EEZ 협상 정례화와 군사력을 동원한 이어도 초계 활동 자제를 합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중첩 수역의 공동 관리 및 자원 탐사와 개발 등 협력적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지정학적 감옥'에서 '지경학적 허브'가 되려면
EEZ 협상은 한국의 백년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정학적 감옥'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지경학적 허브'로 발돋움할 것인가를 가름할 분수령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EEZ 문제를 잘 관리하지 못해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면, 서해권과 동중국해의 군사화와 이로 인한 갈등은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악화될 것이다. 북방한계선(NLL), 평택 및 오산 미군기지 확장, 군산기지 등과 맞물려서 말이다. 반면 이 문제를 슬기롭게 풀면 한국은 지경학적 허브로 비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남북한과 중국의 경제협력이 가장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서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큰 그림을 갖고 중국과의 EEZ 협상에 임할 필요가 있다. 지정학적 딜레마를 최소화하고, 지경학적 기회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큰 비전을 통해 작은 갈등을 완화·해결할 수 있는 전략적 지혜도 요구된다. 오늘 시작되는 한-중 EEZ 협상이 백년대계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갖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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