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나?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은 중국에서 왕조를 바꾸는 역성(易姓)혁명이 일어날 때 봉기하는 측에서 자주 사용하던 용어이다. 후진적 국가가 아니더라도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들도 상원의원이나 참의원은 물론 하원의원이나 중의원도 보통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이어 아들이나 손자가 당선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도 대를 이어 국회의원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현 대통령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크게 입은 경우이므로 여기에 해당한다.
꼭 정치인 집안이 아니라 해도, 여야를 막론하고 특정 명문대학교를 나오거나, 변호사 등의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기업가이거나, 각종 고시에 합격해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치로 입문하는 경우 등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학력과 경력 등 소위 '스펙'은 통상 우리 사회의 최고 수준으로 화려하다. 심지어는 특정 정당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 출신자들조차 나름대로 스펙이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정치권 가까이에서 지켜본 기성 정치인 중의 상당수는 개인적으로는 능력이나 노력 면에서 탁월하거나 우수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가진 유능한 분들이 국회에만 들어오면 하나 같이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낸다. 무능하고 무기력해서 정치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결국, 지금 정치의 문제는 시스템의 결함이다. 지역주의 정당과 인물 중심의 계파 정치가 지배하는 현행 정치 시스템 속에서는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
스펙인가 시스템인가?
최근 드라마로 방영된 <어셈블리>에 나오는 진상필(정재영 분) 같은 사람이 가끔 정당의 '보여주기 쇼'의 일환으로 '전략 공천'이라는 발탁 과정을 통해 정치권에 들어오는 수는 더러 있으나, 실제로 현실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지난 2012년 선거만 봐도, 당의 전략 공천으로 발탁된 분들의 의정 활동 평가가 어떤지는 충분히 알 만하다. 결국, 이런 정치권의 '보여주기 쇼'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더 키웠다.
정치 선진국들에서는 이웃집 아저씨, 뒷집 아줌마 같은 분들이 쉽게 국회의원이 되고, 청년이나 노인도 국회의원이 된다. 성공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아니어도 좋다. 남들이 인정할 만한 좋은 학력이 없어도 좋다. 특정 분야에서 열심히 살았고, 해당 분야의 식견과 대표성을 가진 분들은 누구라도 국회의원으로 발탁될 수 있다. 성공한 엘리트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보통사람들이 정치에 입문하고 유능한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이런 나라의 정치는 훨씬 더 민주적이다.
사실, 정치는 성격상 고되고 힘겨운 공적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달리 스웨덴이나 핀란드 등 북유럽의 정치 선진국에서는 국회의원이 선망의 직업이 아니고 기피의 직업이라고 한다. 과도한 업무량도 비해 권한이나 특권이 적어 3D 직종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치 선진국의 대의정치는 매우 생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개별 의원이 훌륭해서라기보다 정당과 정치 시스템이 개별 정치인의 능력이나 스펙보다 더 중요하고, 정치의 성과가 정당과 정치 시스템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누가 '복지국가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나?
복지국가 정당의 정치인은 다음과 같았으면 좋겠다. 우선 우리 주변의 누구나 정치인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복지국가의 비전에 동의하고 대한민국을 복지국가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희생과 봉사의 자세를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복지국가 정당의 후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분들이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능력이나 개별 정책에 대한 뚜렷한 식견과 의지가 있다면 더 좋은 일이지만, 좋은 학력이나 화려한 경력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90%의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분이라면 더 좋겠다. 비정규직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고 대변할 수 있는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 고단한 주부의 삶을 대표할 수 있는 실제 가정주부 중에서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각성하고 나오신 분, 그리고 등록금에 등골이 휘고 구직 활동에 지친 대한민국 청년을 대변하고 대표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청년들이 정치권에 들어와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치가 아닐까? 그렇다고 아무나 정치인이 되게 할 수는 없다. 다음의 4가지 시스템이 뒷받침해준다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해질 것이다.
첫째, 사이버 상임위원회 제도이다. 원하는 모든 진성 당원들이 한 개 이상의 상임위원회에 소속되어 인터넷상으로 관심 있는 분야의 정책 활동을 하며, 국회의원은 이들 상임위 소속 당원들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여 의정 활동을 수행한다. 복지국가 정당에서 국회의원은 당원들이 질의하는 내용을 대정부 질문으로 해당 부처에 전달하고, 그에 대해 의원실이 받은 답변을 사이버 상임위원회에 공개하고, 당원들의 추가 질문이나 정책 제안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국회의원 개인의 능력에 더해서 당원들의 집단지성으로 의정 활동이 이루어진다.
둘째, 전문 보좌관 제도이다. 현행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회의원의 지역구 보좌부터 수행에 이르기까지 할 일이 많다. 자주 교체되고 선발이나 진급도 국회의원이 좌우하는 구조라서 전문성이 보장되기도 어렵다. 그러나 국회의원보다 상임위별 보좌관을 먼저 선발하고, 이들 보좌관이 각 상임위를 4년에서 8년 동안 담당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보좌관이 국회의원과 팀을 이루어 자율적인 활동을 할 만큼 위상이 높아진다. 그리고 활동성과에 따라 차기에 국회의원으로 공천될 수도 있다. 이렇게 전문 보좌관의 선발과 진급, 신분, 권한과 책임, 활동을 보장해주면 우수한 분들이 보좌관으로 올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전문가 자문단 제도이다.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는 130여 명의 분야별 정책위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직접 정치를 하고자 하는 분은 거의 없다. 특히, 국회의원의 겸직 금지 신설로 국회의원이 되면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난 이후부터 전문가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그러므로 복지국가 정당은 전문 인력들이 전공분야에 따라 정당의 상임위별로 자문위원단을 구성하여 의제 설정부터 예산 심의와 법률 제안에 이르기까지 국회의원과 사이버 상임위원회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도록 해서 국회의원의 전문성을 보완할 것이다.
넷째, 당헌 재판소의 운영이다. 비리나 윤리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선출된 국회의원이 현격하게 당헌에 위배되거나 당의 정책 방향과 배치될 경우, 헌법재판소와 유사하게 정당에서는 당헌 재판소를 운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국회의원의 재선, 징계, 탄핵 등을 결정함으로써 국회의원의 개별적인 일탈을 막고, 이들을 당의 방침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당원을 배신하거나 당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일은 최대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4가지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우리 중의 누가 국회의원이 되어도 의정 활동을 훌륭히 해 나갈 수 있고, 전체적으로 당의 책임과 권한이 강화되고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성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질 있는 분들을 발굴하기 위해 당은 수시로 정당의 학교 또는 정치 아카데미를 운영하여 좋은 분들을 선발하고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 보좌관도 공채를 통해 선발해서 제도적으로 인재 발굴 시스템을 운영해야 한다.
지금까지 선거를 앞두고 여러 이름의 새로운 정당들이 창당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러 이름의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했지만, 사람이 바뀌고 당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정작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에 대한 확신을 주거나 이를 체감하게 해준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치는 여야를 막론하고 환멸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은 이제 '진짜 새로운 정치'를 원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는 기존 정당이 혁신위원회를 통해 몇 명을 물갈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며, 기성 정당을 탈당하고 화려한 스펙을 가진 성공한 엘리트들이 다시 모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현행 승자독식의 양극화된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민생 불안과 불행에 빠진 국민들, 그리고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힘든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정치의 주역이 되는 것이 '진짜 새로운 정치'이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 정당'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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