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포위하는 미-일, 그 '꼬붕'이 된 한국

[주간 프레시안 뷰] 미일 군사 동맹과 한국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70주년 만에 군사 대국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지난 26일부터 미국을 방문 중인 아베 신조 총리는 미일 방위 협력 지침(가이드라인) 개정,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 일본 총리 최초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등을 통해 패권 국가 미국의 핵심 군사 파트너라는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습니다. 1854년 미국에 의해 서방 세계에 편입됐고, 이후 미국의 지원과 묵인 아래 한반도를 병탄하고 중국을 유린했던 일본이 왕년의 위상을 되찾은 것입니다.

당연히 중국은 반발하고 있습니다. 1840년 아편 전쟁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때까지 영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에게 침탈당해온 '치욕의 역사, 100년'을 너무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중국은 '동양의 병자'로 불렸던 과거의 중국이 아닙니다.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력과 함께 군사력도 키워가고 있습니다. 중국 포위를 겨냥한 미일 군사 동맹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미일 대 중국의 군사 대결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와중에 한국은 미일 군사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속절없이 끌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미일 공모에 의한 일제의 35년 식민 지배, 400만 명이 희생된 한국 전쟁, 전쟁에 의한 분단 고착화와 남북 대결이라는 고난을 겪어온 한민족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사태 전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남북의 위정자들은 미일 대 중국의 대결로 요약되는 동아시아의 갈등 구조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미일, 글로벌 군사 동맹으로

지난해 7월 내각 각의 결정에 의한 이른바 해석 개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한 일본은 이번 아베 총리의 방미를 통해 미국과의 글로벌 군사 동맹을 위한 제도적 틀을 완비했습니다.

우선 27일 뉴욕에서 열린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이른바 2+2 회담, 양국 외교·국방 장관 참가)를 통해 미일 방위 협력 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했습니다. 양국은 공동 성명에서 "새 가이드라인은 미일 동맹이 평화 유지 활동과 해상 안보, 병참 지원 등 일본법과 규정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적절한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국제 안보에 더 큰 기여를 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제까지 동아시아와 중동 지역에 한정됐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 지원이 세계 전역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미-일 가이드라인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소련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처음 작성되고 나서 1차 북핵 위기 이후인 1997년 1차 개정됐고, 이번엔 중국의 부상에 대응해 18년 만에 미일 동맹을 글로벌 동맹으로 격상했습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자국의 안보에 영향을 끼치는 '주변 사태'의 경우에만 미군을 후방 지원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주변 사태라는 지역적 제약이 사라지고 '중요 영향 사태'라는 이름 아래 세계 어디에서든 미군과 타국 군을 후방 지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양국은 평시에도 활용할 수 있는 '동맹 조정 메커니즘'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양국은 "일본 방위성 중앙 지휘소에 미군이, 미군 요코타 기지에 자위대가 각각 연락원을 파견해 '미일 공동 조정소'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일 동맹이 한미 연합사령부를 유지하고 있는 한미 동맹만큼이나 일체화된 동맹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을 뗀 셈입니다.

양국은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의 목적이 "동맹의 억지력과 일본과 아시아·태평양의 안전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북한 핵 및 미사일 위협에 대비한) 미사일 방어(MD)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등의) 원유 수송로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댜오위다오(센가쿠열도)를 둘러싼 중일 간의 영토 분쟁에 미군이 개입할 가능성도 커진 만큼 중국과의 군사 대결 위험성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련 기사 : 일본 자위대 날개 달아준 미일 새 방위 협력 지침, 미-일 정상 '중국 견제 공동 성명')

일본의 전쟁 책임을 용서한 미국

28일의 미일 정상 회담과 29일 아베 총리의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 책임을 사실상 용서했다는 점입니다. 미일의 완벽한 군사 동맹을 방해하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한 셈입니다.

정상 회담 하루 전인 27일, 오바마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링컨기념관으로 안내해 단 둘이 20분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구체적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악관은 "이 달은 남북 전쟁 종식과 링컨 대통령 서거 150주년을 맞는 때"라며 "내일 공식 행사 전에 두 정상이 미국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일대일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기회"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 연설에는 화해와 치유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전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진의는 다음 날 정상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대규모 충돌 뒤에는 화해가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믿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양국 간의 대규모 충돌이었던 태평양 전쟁(1941년 12월~1945년 8월)을 이젠 잊자는 것입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을 잊자는 것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링컨은 남과 북으로 갈라질 위기에 처했던 미국을 전쟁을 무릅쓰면서 하나로 통합시킨 인물입니다. 태평양 전쟁과 미일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이죠.

다음 날(29일)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아베가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70년간 한국 대통령이 6번이나 했던 상·하원 합동 연설을 일본 총리가 처음으로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미 의회 관계자는 "1970년대까지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미국의 반감이 컸고, 1980~90년대는 일본과의 무역 분쟁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으며, 최근 10년간은 일본 총리가 너무 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미 의회가 아베의 상·하원 합동 연설을 받아들인 것은 태평양 전쟁, 그리고 일본과의 경제 분쟁 등을 과거로 돌리고 미래를 위해 일본과 하나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 일본 해상 자위대. ⓒ연합뉴스

아베 방미에서 드러나 미일의 역사 인식

28일 정상 회담에서 미일은 다음 세 가지 메시지를 내놓았습니다. 첫째 (중국의) 힘에 의한 기존 질서 변경 시도를 반대한다, 둘째 미일 동맹은 국제 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이다, 셋째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두 정상은 "힘 또는 강압에 의지해 일방적으로 기존 질서를 바꾸려 시도함으로써 주권과 영토의 일체성을 훼손하는 국가의 행동이 국제 질서에 도전이 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및 동남아 국가들과 동중국해 및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죠.

또 "이번 정상 회담은 미일 협력 관계를 전환시키는 역사적인 전진"이라고 평가한 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일본의 '적극적 평화주의' 정책을 통해 양국은 아시아 및 국제 사회의 평화적이고 번영된 미래를 위해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미국은 일본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포함시키는 안보리 개혁을 고대한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팽창하는 중국이 동아시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으며, 미일 동맹이 이를 막을 수 있고, 이를 위해 일본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돼야 한다는 얘깁니다.

한편, 아베는 29일 미 의회 연설에서 "전후 우리는 지난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을 담고 우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사과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대해서만 사과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한 겁니다. 오히려 "1980년대부터 한국, 대만, 아세안 국가들이 발전하고 이후 중국이 발전할 때 일본은 헌신적으로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그들의 성장을 도왔다"고 강변했습니다. 이런 걸 보고 적반하장(賊反荷杖 : 도둑놈이 매를 든다)이라고 하는 겁니다. 19세기 중반 이래 한반도와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착취는 나 몰라라 하고 20세기 후반 이후의 경제 협력만 부각시킨 것이죠.

아베 방미와 관련해 한국 언론은 위안부 문제 사과와 일본 군대의 한반도 상륙 등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1840년 영국이 일으킨 아편 전쟁으로부터 현재까지 175년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오바마와 아베가 말하는 '힘에 의한 기존 질서 변경 시도'는 이미 그때,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지금 중국의 부상은 그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으로 봐야 합니다. 또 미국은 한반도 해방의 은인이기 이전에 한반도 식민지화의 공범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의 탁월한 저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한길사 펴냄)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해방의 은인'이기 이전에 '식민 지배'의 공범

아편 전쟁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까지(1840~1945년) 동아시아 질서의 본질에 대한 기존 패러다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과 갈등의 질서였고 미국은 예외적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즉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욕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이삼성 교수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까지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협력한 측면이 더 강했다는 얘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대한 중국에 대한 통제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제국주의 국가들 전체가 연합하거나, 또는 일부를 배제하기 위하여 다른 다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연합하는 질서, 즉 '제국주의 카르텔'이었다. (…) 미국도 이 카르텔의 일부였다."

러일 전쟁의 경우가 바로 "일부를 배제하기 위하여 다른 다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연합"한 경우입니다. 중국 및 한반도 침략에서 러시아를 배제하기 위해 영국, 미국, 일본이 연합했던 것입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1898년) 한 것은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에게도 제국주의적 야욕이 있었던 것이죠. 물론 미국은 이른바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이란 것을 통해 타국 영토에 대한 독점적 지배가 아닌 경제적 지배만을 추구했지만 말입니다.

러일 전쟁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지배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에서 자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러일 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 함대가 뤼순 군항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됐고, 1905년 5월 27일 일본이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후 미국 중재에 의해 그 해 9월 5일에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 지배를 공동 모의합니다.

강화 조약 협상이 진행되던 1905년 7월 27일,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 육군 장관이 도쿄에서 만납니다. 이들은 이틀 후인 7월 29일 합의 각서를 마련했고, 7월 31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 내용을 승인합니다. 당시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던 태프트 장관은 8월 7일 가쓰라 총리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 사실을 알렸고, 가쓰라는 다음 날 러시아와의 강화 협상 전권 대표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로 가 있던 고무라 주타로 외상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이로써 일본과 미국의 합의 과정이 완료됐고, 9월 5일 일본과 러시아 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됩니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태어난 과정입니다. 밀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합의 각서의 내용이 20년 가까이 지난 1924년에야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는다.
둘째, 극동의 평화 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은 동맹 관계를 확보한다.
셋째,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한 것입니다. 나아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사실상 식민 지배에 들어갑니다. 미국은 일제 식민 통치의 공범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1854년 매튜 페리 제독에 의한 개항을 시작으로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되고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미국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적대로 만일 미국의 남북 전쟁(1861~1865년)이 없었다면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북 전쟁에 따른 국내 혼란으로 미국이 정신이 없는 사이, 일본은 근대 국가로 발돋움했고 이후 일본은 한반도 및 중국 침략에서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합니다.

1908년 11월 30일의 루트-다카히라 밀약, 1917년 11월 2일 랜싱-이시이 밀약 등은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공동으로 경영하기 위한(즉 착취하기 위한) 합의였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영향력이 퇴조한 192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은 중국 경영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미국과 일본의 공동 전선에 균열이 생긴 것은 대공황 때문입니다. 대공황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은 만주 침략(1931년), 중국 본토 침략(1937년)을 단행했고 중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추구합니다. 즉 미국은 중국을 (일본과 함께) 공동으로 나눠 먹자는 입장인 반면,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중국을 혼자 먹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바로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그리고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죠.

중요한 것은 1930년대 중국 경영에 관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견제하지 않았으며, 중국 침략을 위한 전략 물자의 최대 공급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삼성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1938년 중반까지 항공기와 항공폭탄을 비롯해 석유, 폭탄 제조 원료인 폐철을 일본에 수출했습니다. 1940년 1월 26일에야 대일본 경제 조치(석유 폐철 기계 설비 및 여타 전쟁 물자 수출 제한)를 시작했고, 1940년 7월 강철 및 항공유의 수출을 중단했으며, 1941년 7월 석유 수출을 전면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넉 달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결국 100여 년에 이르는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 기간 중 미국과 일본이 공개적으로 대립, 충돌한 것은 단 5년에 불과하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를 요구한다 해도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이 받아줄 가능성은 없습니다. 미국은 식민 지배의 공범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1930년대 군부의 폭주에 의한 만주 및 중국 침략이 잘못됐다는 공감대는 있지만, 한반도 식민 지배는 그 당시 (제국주의적 경쟁의) 상황에서는 불가피했다는 게 대세라고 합니다. 최근 반둥 정상 회담에서 아베 총리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에게 사과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미일 군사 동맹의 하위 파트너가 된 한국

2011년 11월 미국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한 이후 한국은 급속하게 한미일 군사 동맹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해 말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관한 (3자) 정보 공유 약정'이 체결돼 한미일 간의 3자 군사 정보 네트워크가 형성됐고 이제 남은 것은 한일 상호 군수 지원 협정(ACSA)뿐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군수 협정을 맺고 있습니다. 한일 상호 군수 지원 협정이 체결되면 3국 간 군사 물자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고 이로써 한미일 삼각 군사 동맹이 완성되는 셈입니다.

오는 5월 아시아안전보장회의(샹그릴라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된다고 합니다. 최근 나카다니 겐 일본 방위상이 3국 국방 장관 회담을 제안했고 애슈턴 카터 미 국방 장관이 받아들였다고 하는군요. 정보 공유 약정의 전례로 보아 타결될 것이 분명합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자위대 한반도의 상륙 요청 주체가 한국 대통령이 아닌 주한 미군 사령관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합니다. 전작권이 없는 한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한국에 주둔해온 미군이 중국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바뀌는 것이죠. 미일 군사 동맹으로 일본이 미국의 중국 포위를 위한 사냥개가 됐다면 우리는 그 부하가 되는 셈입니다.

중국은 대응은?

최근 중국을 다녀온 군사 평론가 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에 따르면 중국의 대응도 심상치 않습니다. 29일자 <한겨레> 칼럼의 일부입니다.

"중국 정부의 핵심 지식인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인물은 "앞으로 3년간 중국의 국방비에서 매년 증액되는 규모가 한국의 국방비보다 클 것"이라고 전망한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기존 국방비에다가 매년 400억 달러, 3년간 1200억 달러를 더 늘린다는 놀랄 만한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3년 후 중국의 국방비는 250% 성장한다."

김 편집장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이 개발 중인(즉 아직 실전 배치도 되지 않은) 신무기와의 가상 충돌을 TV로 보도하는 등 "갖은 허풍으로 임박한 전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또 미국의 사드 한반도 배치가 중국의 심기를 건드린 결정적 계기였다고 전합니다.

"다른 중국 관리를 통해 우리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국가안전위원회가 올해 2월부터 미국의 사드 요격 체계가 한반도에 배치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정치·군사적 대응 매뉴얼을 구상하는 데 착수하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확인했다.

(…)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증폭된 계기는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였다. 중국은 일본과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영토 분쟁으로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막후 접촉을 통해 미국의 입장을 고려한 몇 가지 양보 조처를 했다. 그런 와중에 미국이 한국에 사드 배치를 추진함으로써 자신들은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고 본다. 이것이 시진핑 주석이 사드 문제에 직접 개입한 배경이다. 화가 난 중국은 이제 분쟁의 눈으로 미국을 바라보려고 하고, 미국은 그걸 또 이용하는 그야말로 확실히 망가진 비정상으로 가고 있다."

(☞관련 기사 : 비정상이 정상이 된 동아시아)

한 쪽의 군비 증강이 다른 쪽의 군비 증강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꼴이 된 것입니다. 미일 대 중국의 군사 갈등을 풀 해법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바로 남북 관계 개선입니다. 나아가 남북 관계 개선을 바탕으로 한 북핵 문제 해결입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 핵 및 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그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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