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덕에 잘살게 된 농촌? '눈덩이 빚' 안 보이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9> 경제 개발, 열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경제 개발을 거치며 여러 차원에서 커다란 격차 문제가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된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농촌이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경제 정책에서 불균형 현상이 여러 면에서 심하게 일어났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계층별 격차가 아주 심해졌고 그와 함께 도시와 농촌 또는 대도시와 중소 도시 사이의 격차도 매우 심각해지는 상황에 들어갔다.

지금 우리 농촌은 심하게 얘기하면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땅이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우리 마음, 정서의 고향이었는데 이 좁은 국토에서 언젠가부터 농촌을 사람이 살 곳이 아닌 곳으로, 떠나야 할 곳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농촌을 떠나고 노인만 남아 있다. 그래서 어린아이 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고, 학교도 폐교되고, 60대가 이장 노릇을 하고 50대가 간혹 있으면 청년회장을 맡아서 해야 한다고들 하지 않나.

농업 취업 인구 통계를 보면 1960∼1970년대에 세대별로 큰 차이가 나는 걸 알 수 있다. 예컨대 1965년에 14∼19세가 농업 취업 인구의 15.4퍼센트였는데 1980년에 5.1퍼센트로 이 연령층이 줄어든다. 무지하게 줄어들었다. 20∼29세 연령층은 1965년 25.5퍼센트에서 1980년에 15.4퍼센트로 줄어들었다. 많이 줄었어도 그래도 덜 심하다. 그런데 50세 이상은 18.3퍼센트에서 32.3퍼센트로 증가했다.

이렇게 된 것은 1960∼1970년대의 정책이 기본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에 이어서 1960년대에도 한국은 저곡가 정책을 썼다. 저임금 정책을 쓰려니까 저곡가 정책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원래 한국은 농촌, 농민, 농업을 천시하는 면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그런 것 때문에 이렇게 농촌이 버림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1960년대 농산물 가격 유지법이 저곡가 정책의 무기로 작용한 걸 볼 수 있다. '농업이 공업화의 중대한 원천이다', '농업과 공업은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본 대만과 달리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 정책은 농촌 인원을 희생시키면서 이뤄졌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산 잉여 농산물이 대거 들어왔다. 미국산 잉여 농산물은 식량난 해소에 다소 도움을 줬지만, 국내 곡물 가격을 급락하게 해 농촌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5.16쿠데타 한 달 후인 1961년 6월 27일 농산물 가격 유지법이 공포됐다. 농산물 가격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 농업 생산 및 농가 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구호에 그쳤다.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고수하는 데 농산물 가격 유지법을 활용했다. 이 때문에 국회가 반발하는 일도 발생했다. 예컨대 1966년 정부가 국회 동의 없이 하곡(夏穀) 매입 가격을 낮게 책정하자 야당은 물론 여당인 민주공화당도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야당은 정부의 매입 가격이 생산비에도 못 미치며 이는 정부 스스로 농민 수탈에 솔선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공화당 역시 정부가 결정한 것보다 높은 매입 가격을 제시하는 한편, 정부가 양곡 관리법에 의거하지 않고 농산물 가격 유지법을 활용해 국회 동의 없이 일을 처리한 것에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편집자')

▲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웠다. 집권 후 모내기 현장 등을 찾아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기에 농민들은 희생양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빚더미에 깔렸다. 사진은 1962년 6월 3일, 경기도 김포 지역 모내기에 나선 박정희(사진 가운데, 선글라스를 쓴 사람) 최고회의 의장. ⓒ연합뉴스


농촌 황폐화와 극심한 지역 불균형 초래한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농촌이 체계적으로 배제된 것과 더불어 국토 불균형 문제도 짚어야 할 사안이다. 서울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 지나치게 몰리면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서중석 : 박정희 경제 정책이 중소기업을 소외시키고 재벌 중심으로 이뤄진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과 대도시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과 연관해서 경부고속도로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서 특정 지역은 경상도를 주로 가리킨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해서 박정희의 결단으로 높이 평가하는 주장들이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생활에 굉장한 편리함을 갖다 줬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시간을 단축해서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그런 부분은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를 놓을 때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었다. 한꺼번에 다 놓으려고 하지 말고 부분 부분 놓는 방법이라든가 도시와 도시 사이에 있었던 국도를 고속도로화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하는 건 좀 문제가 있다고 그 당시에 문제를 제기한 제일 큰 이유는 그렇게 되면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중심으로 한국 경제가 편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것이 대도시 중심으로 움직이는 방향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갈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경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한국 사회가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들이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놓을 때 제기된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됐다. 1960∼1970년대 서울의 인구를 보면 1960년에 244만 명이었는데 1966년에 379만 명, 1970년에는 543만 명이 됐다. 1975년에 688만 명을 넘었고 1980년에는 무려 836만 명이 됐다. 20년 사이에 세 배를 훌쩍 넘긴 것이다. 이것 못지않게 큰 문제는 경제적으로 집중됐다는 것이다. 1980년에 전체 법인세 부과의 50.7퍼센트, 은행 예금의 64.9퍼센트, 대출의 64.4퍼센트가 서울에 다 몰려 있었다.

문화 집중처럼 무서운 게 없다고 예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병원, 의료, 보건, 금융 기관 이런 것이 다 서울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인구를 분산시키고 전 국토를 효율적으로 잘 이용하도록 하겠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국토개발연구원에서 1984년에 낸 자료를 보면 문화 집중 현상이 아주 심각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신문의 71.4퍼센트, 방송의 51.0퍼센트, 통신의 85.3퍼센트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다. 같은 자료에서 1975년을 기준으로 보면 대학생의 59.7퍼센트, 교원의 61.6퍼센트, 대학원 석·박사 학생의 77.6퍼센트가 서울에 몰려 있었다. 그러니까 머리 싸매고 다 서울로 몰려든 것이다. 교육이라는 게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고 돈을 버는 데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돼 있으면 이건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분교를 만든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왜곡된 기억, 위험한 박정희 신화

▲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밀어붙이기식 공사가 강행되면서 77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2007년 7월 6일 경부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충북 옥천군 동이면)에서 열린 합동 위령제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는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지적한 것처럼, 경부고속도로와 관련해 박정희의 영단을 강조하는 주장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순수한 우국충정과 선견지명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는데 야당 등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았다', 대체로 이런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문제를 예로 들며("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야당 정치권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요즘과 비슷한 반대")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 여론을 '반대를 위한 반대'로 몰아간 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여러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우선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일각에서 오해하는 것과 달리, 당시 야당 등은 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노선의 적합성, 건설 방식 등에 대해 다른 의견을 냈다. 예컨대 남북 종단보다는 동서 횡단 교통망을 구축하는 데, 한정된 재원을 우선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남북 종단 중심의 교통 체계를 구축했고 해방 후에도 그 틀이 유지되던 상황에서 균형 발전 문제를 고려한 주장이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이 1965∼1966년에 한국 교통망을 조사한 후 남북 종단이 아니라 동서 횡단 및 지역 연결 도로를 우선 건설할 것을 조언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후 지역 불균등 문제가 훨씬 심각해졌다는 점에서도, 당시 야당 등에서 편 주장을 '반대를 위한 반대'로 볼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이 사심 없이 이 문제에 임했는가 하는 부분도 따져볼 문제다. 이 문제를 "정치에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박 대통령이 언급한 것과 달리, 1969년 3선 개헌 국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실적을 적극 홍보하며 활용한 내용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며 비판한 야당을 향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고 박 대통령 본인이 몰아붙인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청와대에서 전투를 치르듯 공사 관계자들을 다그치면서 밀어붙이기식 공사가 강행됐고 그 결과 77명이나 공사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점, 일부 구간의 부실 공사 때문에 완공 후 보수비가 건설비보다 많이 든 문제 등도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지 않고,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왜곡된 기억을 바탕으로 박정희 신화를 내세우는 주장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고속도로 문제와 관련해 개인적인 일화가 있다. 88고속도로가 뚫릴 때 난 <신동아>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보고 그걸 취재해오라고 그러더라. 그 취재 지시를 내릴 때는 가서 적당히 해오라는 뜻이 강했던 것 같은데, 내가 그걸 잘 몰랐다. 뭐냐 하면, 1980년 5월 광주 참극이 있고 나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너무나도 강한 반발이 전라도 쪽에 있게 되니까 그걸 완화하기 위해 뚫은 것이 88고속도로였다. 오월 광주 직후에 뚫지 않나. (88올림픽고속도로는 1981년에 착공돼 1984년에 개통됐다. '편집자') 그 고속도로 공사를 막 하고 있을 때, <신동아>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나한테 취재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광주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사실대로 써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내 딴에는 열심히 취재했다.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토건업 쪽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지역마다 들러서 경상도 쪽이건 전라도 쪽이건 지역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 특히 거창, 고령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 주민들이 '뭣 때문에 이걸 만드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전라도 쪽은 말을 잘 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냐 하면 88고속도로가 그 당시 있던 국도하고 거의 같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양쪽을 다 다녀보니까 실제로 그렇더라. 국도 바로 옆에다가 88고속도로를 놓는 식이었다. 그럴 거면 국도를 잘 연결하면 될 것 아닌가. 예컨대 읍내라든가 이런 데를 우회 도로를 만들어서 지나가게 하고 길을 반듯반듯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실제로 88고속도로와 국도 간의 길이 차이가 몇 십 킬로미터가 안 되는 걸로 그때 자료에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국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제일 우려하면서 많이 한 이야기가 '이제 우리 지방은 망했다'는 것이었다. 전부 대구한테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지방 경제가 살아날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바로 대구로 가서 뭐든지 하려고 하지 우리 걸 사려고 하지 않을 것 아니냐', '우리 지역의 작은 기업체가 죽어난다'는 얘기였다. 큰 도시에 경제권을 뺏길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이런 것들을 기사에 썼다가 '왜 이런 글을 썼느냐'는 이야기를 윗선에서 듣기도 했지만, 나중에 다른 데에서 칭찬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농민의 아들' 내세운 박정희 집권기에 농촌은 압축 쇠퇴

프레시안 : 다시 농촌 이야기를 짚었으면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자신이 농민의 아들이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1963년 대선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제시하면서, 농민의 아들이자 젊은 일꾼임을 내세웠다. 귀족적인 윤보선 후보와는 출신부터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박 대통령을 숭배하는 이들 중에는 박 대통령이 모내기 현장 등을 찾아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신 일 등을 높게 평가하며 '박 대통령이야말로 농촌 친화적이었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고 농민들과 막걸리를 함께한 것과 실제로 중농 정책을 썼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적잖게 있다. 이와 더불어 새마을운동 덕분에 농민이 잘살게 됐다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서중석 : 일부에서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건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주장이다. 1970년대 중반에 식량 자급이 이뤄졌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그건 새마을운동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농정의 일환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는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게 다수확 품종을 보급하는데 바로 그 다수확 벼를 대상으로 이중 곡가제를 하면서 엄청난 식량 증산이 이뤄진 것이다. 1974년에 3000만 석으로 돼 있던 수확량이 1977년에는 4000만 석으로 돼 있다. 사실 이 통계가 맞느냐 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의심을 많이 했다.

어쨌든 식량 자급이 이뤄지면서 1970년대 중반에 농촌이 괜찮아졌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바로 그 순간부터 농촌이 또 나빠진다. 새마을운동 절정기가 끝날 무렵 농촌은 이제 사람들이 과거 못지않게 계속 떠나는 장소로 변했다. 1978년 12.12총선, 유신 제2기 총선이었는데 이 선거에서 농민들조차 예전보다 여당을 외면하는 그런 농촌으로 바뀌어가는 걸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농민들의 삶이 더 팍팍해졌다는 걸 단적으로 얘기해주는 것이 농가와 도시 근로자 가구의 1인당 실질 소득이다. 1인당 실질 소득 자료를 보면, 1970년에는 농가가 도시 근로자 가구의 68.7퍼센트였던 것으로 돼 있는데 1975년에 그게 높아져서 93.9퍼센트나 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1980년에 가면 1970년보다 더 낮아진다. 62.4퍼센트로 나온다. 정부에서 낸 통계다. 1인당 GNP를 비교한 걸 봐도 1961년에는 농민 1인당 GNP가 전체 1인당 GNP의 74.3퍼센트였다. 그게 1970년에 62.7퍼센트로 떨어진다. 1975년에 64.1퍼센트로 조금 높아지지만, 1979년에는 55.8퍼센트로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

통계가 그렇게 나와 있다. 농촌은 그야말로 버림받은 땅으로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농업 전문가인 조석곤 교수가 한 글에서 아주 짤막한 말로 당시 상황을 얘기했다. "압축 성장 속의 농업은 압축 쇠퇴를 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농가 경제가 악화됐다는 건 농가 부채가 이때부터 급증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한 자료를 보면, 농가 부채가 1971년에 1호당 2만9500원으로 나와 있는데 1976년에는 17만600원으로 돼 있다. 그러던 것이 1980년에 펄쩍 뛰어서 80만8400원으로 나온다. 빚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늘어났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양곡 자급률이 높아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물론 이건 국민 전반의 생활이 좋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한데, 1970년에 양곡 자급률이 86.1퍼센트로 돼 있는데 1975년에 79.1퍼센트로 떨어진다. 1980년에는 무려 56.0퍼센트로 떨어진다. 식생활 해외 의존도는 1968년에 15퍼센트였는데 1978년에 26퍼센트가 된다. 이런 여러 자료는 1970년대 중후반에 농촌이 얼마만큼 퇴락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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