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정주영 신화 밑바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5> 경제 개발,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룬 역사적 배경으로 평준화와 교육열, 그리고 농지 개혁과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 문제를 앞에서 짚었다.

서중석 : 1970년대에 와서 국가 동원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이 지구상에서 특이한 역사를 가진 점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중앙 집권화 문제다.

중세 시대에는 대부분 분권 사회였다. 일본도 그랬고 서양도 대개 그랬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중국과는 또 다르게 적어도 고려 시대 초기부터 계속 중앙 집권화 방향으로 갔다. 조선 후기에 가면 면리도 이제는 중앙 정부가 상당히 장악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는 한국을 더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1914년 면리제를 실시한다. (이해 조선총독부는 지방 행정 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한반도 전역의 말단 행정 구역 수를 3분의 1 정도 축소·단순화할 정도로 큰 폭의 개편이었다. '편집자') 그리고 파출소를 면 단위까지 두고 한국인을 꼼짝 못하게 한다. 특히 일제 말에 가면 한국인을 대거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일제는 정신대, 근로보국대는 물론 방공협회와 그 지회라는 것을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만들어서 방공 운동이라는 걸 했다. 또 애국반 같은 것을 조직했다. 방공 운동을 펴는 것도 애국반에서 많이 했지만 이런 것들은 공출, 징용, 징병 같은 것을 하는 데도 필요했다. 하여튼 이런 모든 것은 한국 사회가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미군정 시절에 경찰까지 완전히 중앙 집권화가 이뤄지면서 그런 경향이 더욱더 강화된다. 미군은 서울에 경무부를 설치하고 경찰 조직을 중앙에서 장악해버렸다. 경찰 중앙 집권화는 노무현 정권 때 좀 지양할 것처럼 보이더니만 안 되더라. 사실 경찰을 중앙 집권화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경찰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각 지역 치안 업무를 맡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처럼 정치에 뛰어드는 경찰이 그리 많지 않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헌병 경찰제를 실시하며 무단 통치를 했다. 헌병 경찰제는 조선주차군 헌병대 사령관이 모든 경찰 업무를 지휘·총괄하는 체제였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헌병 경찰제는 폐지됐다. 그 후 조선총독부에 경무국(이후 경무부)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서는 도지사가 경찰권을 행사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미군정도 초기에는 이 틀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말 미군정은 도지사가 관할하던 각 도의 경찰부를 서울에 있던 경무국(얼마 후 경무부로 명칭 변경)이 직접 통제하는 체제로 바꿨다. 이처럼 중앙 집권화된 경찰 조직을 만든 것은 각지에서 분출하던 변혁 운동을 힘으로 누르기 위해서였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동원적 경제 발전에서 효과 발휘한 강력한 국가 동원력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 억눌려 있던 한국 사회는 해방을 계기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분단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등을 거치며 민중은 움츠러들고, 반공주의를 앞세운 국가가 국민을 일상적으로 동원하게 된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 때도 얼마나 동원을 많이 했나. 특히 북진 통일 운동 같은 게 그랬다. 1953년 이전에도 동원했지만, 1953년 휴전이 이뤄지기 한두 달 전부터 여러 형태의 북진 통일 운동이 1959년 연말까지 쉬지 않고 일어난다. 또 이 당시엔 도지사가 순시를 나가도 학생들이 나가서 손뼉 쳐야 했다. 이건 박정희 정권 때에도 그랬다. 나도 고등학생 때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환영을 나갔고, 베트남에 파병할 때도 여의도에 환송 나가고 그랬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학생을 동원했다. 이렇게 동원을 많이 했는데, 그건 그만큼 국가 동원력이 강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는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지고 향토예비군이 생겨나고 1970년대 중반에 가면 민방위가 생기고 반상회가 생기고 학원이 완전히 병영화되고 그러면서 개인의 신상이 낱낱이 파악되지 않나. 이렇게 철저하게 국가가 민(民)을 장악하고 동원할 수 있는 사회였고, 그런 측면에서 한국은 옛날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철저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돼 있었다.

사실 일본 역시 역사적 전통 때문에도 개인 파악을 잘하는 나라였다. 내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일본에서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외국인 불법 노동자가 일본에서는 버텨내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만큼 파악이 잘된다는 말이었다. 그런 일본조차 부가가치세, 금융 실명제를 오랫동안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는데, 한국은 척척 실행하지 않나. 이것도 국가가 민을 동원하고 장악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세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센 나라다. 지구에서 제일 센 나라에 들어간다. 이게 동원적 경제 발전을 할 때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프레시안 : 학생을 마구잡이로 동원하는 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언론이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이다. 당시 이 신문은 고위층이 행차할 때 아침밥도 못 먹은 학생들을 불러내 뙤약볕 아래 몇 시간 동안 환영 인파로 세워두는 풍조를 질타하는 사설('학도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을 실었다가 수십 명의 관변 단체 회원들에게 테러를 당했다. 경찰이 "대낮(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폭도를 비호한 것으로도 유명한 사건이다. 나아가 이 사설이 북한 방송에 인용됐다며, 사설을 쓴 최석채 주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진다. 다시 돌아오면, 국가의 동원력과 더불어 눈여겨볼 대목으로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사회 전반적인 능력, 이걸 국가 능력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회 전반적인 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통계를 가지고 설명하면 이것에 대한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50년대에는 거의 모든 통계가 부정확했다. 사실 통계를 못 냈다고 이야기하는 게 좋다. 1950년대 국민총생산(GNP) 통계 같은 것을 낸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유엔에서 나온 건 있는데, 그건 그쪽 전문가들이 추정했다고 그런다. 유엔만 해도 고등 전문가들을 쓸 수 있었는데 한국은 그게 좀 약했다고 하더라. 심한 사례를 하나 들면, 대한노총에서 자기들 대한노총의 조직 노동자가 몇 명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 나라가 전반적으로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경제 개발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겠나.

1960∼1970년대를 보면 경제 성장률이나 물가 같은 중요한 통계조차 1980∼1990년대에 계속 수정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이야기할 경제 관련 여러 통계도 어떤 자료를 보느냐에 따라 다 다르게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은 그전에 비해서는 나았다. 왜냐하면 한국은행, 산업은행 조사부 같은 것을 통해 각종 통계가 비교적 정확하게 제시될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회가 역량을 축적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미국 등에서 통계 전문가를 계속 초빙한다. 그렇게 해서 통계를 배우는 것이다. 또 사실은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이 통계와 관련해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다. 전쟁 시기에는 통계 낼 게 많지 않나. 이런저런 것을 통해 한국이 스스로 통계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면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가서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실효성 있게 되는 것 아닌가. 그것도 바로 이런 것과 관련 있다. 1950년대 초반이나 중반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겠나. 통계 하나 제대로 못 잡던 시기였는데.

사회 전반적인 능력 문제를 헛짚은 뉴라이트

프레시안 : 통계를 예로 들어 설명한 사회 전반적인 능력의 문제가 다른 영역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서중석 : 그 점은 테크노크라트, 기업인 그리고 회사의 중견 간부 문제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뉴라이트의 대부 격인 모 교수 그분이 쓴 논문을 보면, 1930년대 한국의 산업화, 경제 발전이 1960∼1970년대 경제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래서 정말 유심히 읽어봤다. 그런데 왜 가능하게 됐는지는, 그리고 인적 자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그 교수는 주장했는데 도대체 인적 자원이 어떻게 그랬다는 것인지 하는 부분은 제대로 알게끔 써놓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것은 주먹구구식이 아닌가. 우격다짐으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 글을 보고 실망을 많이 했다. 어떻게 그런 분이 이렇게까지 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테크노크라트만 하더라도 1950년대에 미국에 가서 연수도 받고 공부도 하고 하면서 이게 쌓였고,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가 탄생한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거기서 최초로 제대로 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도 세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면 정부에서 성취형 관료, 이들을 테크노크라트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나고, 1950년대부터 활약하던 그 사람들이 박정희 정부에서도 장관이나 실무 책임자로 여러 명이 기용된다. 그러면서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걸 볼 수 있다. 이처럼 테크노크라트 성장 과정을 보더라도 1950년대 말경부터 기술 인력이 관료 속에서 어느 정도 쌓이게 되는 것이다.

기업인의 경우를 봐도 1950년대에는 경제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는 기업인이나 중간 경영인, 회사원 같은 사람들이 상당히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에는 인적 자원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여러 자료에서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나오지 않나. 그런데 1950년대에 기업들이 망하고 새로 흥하는 부침을 거듭하면서 경영 수완을 쌓아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대기업도 그랬지만 그 시기에는 중소기업도 많았다.

그러면서 장면 정권, 박정희 정권에 가게 되면 부정 축재자 처리를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예컨대 태창처럼 그 당시 큰 재벌이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권력 쪽에서 이른바 알래스카 계통이 당한다고 하듯이, 재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부가 밀려나고 하면서 새롭게 살아나는 경영인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관을 끌어다가 기업을 운영하며 국제적 경영 시야를 갖추는 사람까지 생겼다. (태창은 이승만 정권과 유착해 각종 특혜를 누리며 덩치를 키운 재벌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내리막길에 접어들면서 태창 전성시대도 막을 내린다. 알래스카 세력은 5.16쿠데타 정권의 중심 세력 중 하나이던 함경도 출신 군인들을 말한다. 경상도 출신 군인들과 경쟁하던 이들은 1963년 3월 이른바 '반혁명 사건'에 연루돼 대부분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 경상도계와 함경도계의 힘겨루기는 5.16쿠데타 후 부정 축재자 처리 과정에서도 벌어지는데, 함경도계가 밀려나면서 경상도 기업 중심으로 재계가 재편된다. '편집자')

이건 1960년대에 와서야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일제 때건 해방 이후건 그전까지는 그런 경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뉴라이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2013년 2월 19일, 서강대 캠퍼스에 걸린 연극 '한강의 기적 - 박정희와 이병철, 정주영' 현수막 아래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모습. ⓒ연합뉴스


사회적 경험의 축적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들의 형성

프레시안 : 고도성장과 관련해 한국 사회에는 박정희 신화뿐만 아니라 이병철·정주영으로 대표되는 몇몇 재벌 회장들에 관한 신화도 있다. 요약하면,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그룹을 만들고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는 내용이다. 물론 경쟁하던 여러 자본가들 중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선택과 수완은 그것대로 평가할 대목이 있다. 그렇지만 신화로 표현되는 놀라운 성장을 가능케 한 밑바탕 즉 역사적 배경, 국제적 조건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탁월한 경영 능력'이라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평준화, 교육열, 농지 개혁,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 문제, 그리고 국가 동원력과 사회 전반적인 능력 문제 등을 두루 살핀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재벌이 누린 수많은 특혜, 숱한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재벌의 거듭된 반칙, 평범한 국민들의 희생과 노력 등을 쏙 빼놓은 채 몇몇 재벌 회장의 탁월한 경영 능력을 치켜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쨌건 다시 돌아오면,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을 이끈 이들이 경영 수완을 쌓은 과정을 보면 뉴라이트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맨 파워'론과는 거리가 있다.

서중석 : 사실 나는 아까 이야기한 그 논문에서 뉴라이트의 대부 격인 그 교수가 삼성을 예로 들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적절한 예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내 기억으로는 그 사람을 예로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삼성 이병철 같은 경우도 일제 말에 몇 가지를 좀 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1950년대의 기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구나 1960년대 규모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병철의 경우도 계속해서 노하우, 경영 능력이 쌓인 것이었다. 국제 정세를 1960년대부터는 아는 것 아닌가. 그때쯤에 일본을 자주 왕래하지 않나. 그리고 1970년대 들어 자동차를 제외한 거의 모든 중화학 공업에 뛰어들고 1977년에 대대적인 체제 개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 업계가 참 재미나다. 왜 그렇게 자동차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는데, 자동차 업계에는 풍운아들이 많았다. 많은 경험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울산 현대의 정주영 같은 탁월한 기업인들이 생겨나게 되고, 중간 경영인들의 인적 자원도 점차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와 함께 1960년대부터 제대로 된, 능력 있는 회사원들이 많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는 그런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면 바로바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람들이 회사에 헌신하면서 자신의 업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사업도 챙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과로사도 많이 했다. 1970년대에는 뱀탕 먹고 술 마시며 접대하는 게 일이었던 '술상무'들 때문에 뱀이 다 사라졌다는 말까지 나오고 그랬다. 그게 다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런 걸 거치면서 한국 사회가 산업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 한 사람이 시켜서 이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 내 말은 그것이다.

하여튼 1970년대 중후반에는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새로운 기업가들이 나타나고, 중화학 공업이 대거 생겨나지 않나. 정주영뿐만 아니라 다른 '신데렐라'들이 나타나 활약하면서 율산·제세·대봉 같은 데가 등장했는데, 이 기업들은 한때는 대단한 기업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망한다. 그런 일도 생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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