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 '검은 황금'에 박정희 정권이 갈팡질팡한 이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6> 경제 개발,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은 국제 상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서중석 : 한국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경제 발전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진다고 이야기했는데, 외부 상황도 한국의 경제 발전에 아주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에 차관 도입과 관련해 얘기했지만, 세계의 변화와 한국 경제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 지난번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만 다시 짚어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엄청난 변화를 했다. 1950년대에는 사회주의권이 크게 경제 발전을 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1956년 전당 대회 때 그렇게 자신 있게 평화 경쟁을 하자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는데, 로빈슨 교수 같은 저명한 학자도 북한이 1950년대에 놀라운 변화를 했다고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자본주의권은 전후, 그러니까 1945년부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여러 지역에서 대단한 발전, 이걸 동시 발전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런 엄청난 발전을 이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경우 1945년에서 1975년까지 연평균 경제 성장률이 5.5퍼센트로 나와 있다. 산업혁명 초기부터 1945년 이전까지는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가 참 어렵다.

한동안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었고 현재는 제3의 경제 대국인 일본이 그전부터 경제 대국이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은 군사적으로는 강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대국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악착같이 잘 싸우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약했다. 국내 시장이 너무나 협애했다. 그래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같은 전쟁을 계속 일으키고 침략을 거듭하면서 시장을 획득해나갔고,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전쟁을 거듭 일으켰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 않나. 그만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전 일본은 경제적으로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일 때부터 '일본이 너무 무리한 짓을 한다'고 본 제일 큰 이유는 그런 규모의 전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소위 일본의 군인 정신, 육군이 갖고 있던 그 돼먹지 않은 군인 정신을 내세우면서 미국 등과 붙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그렇게 되고 만 것인데, 패전 후 일본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1950년부터 전쟁 특수를 맞게 되고 1950년대 말경에는 엄청난 경제 발전을 한다.

놀라운 건 이 시기에 일본 내수가 아주 튼튼해졌다는 것이다. 일본을 보통 수출 국가로 많이 아는데, 그게 아니라 내수가 기본이고 수출은 그다음이다. 이 시기에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해서 엄청난 판매가 일본 국내 시장에서 이뤄지지 않나. 전전(戰前)에 비해 일본 내수 규모가 아주 커졌다. 그에 더해 베트남전쟁 시기에 다시 특수를 누리면서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된다.

한국 경제 발전에 유리했던 국제 조건, 자본주의 황금시대

▲ <자전거 도둑>. ⓒDe Sica
프레시안 :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가 무너진 일본이 남의 나라 전쟁을 발판 삼아 다시 우뚝 섰다는 것은 여러모로 씁쓸한 일이다. 어쨌건 그러한 일본이나 독일뿐만 아니라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모두 1945년 이후 장기 호황을 누렸다.

서중석 : 프랑스만 하더라도 1945년에서 1975년까지를 영광의 30년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연평균 4.8퍼센트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사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농업 국가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독일과 전쟁을 하면 상대가 안 된다는 식의 선입견을 일반 사람들에게 줬던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작용했다. 그랬던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놀라운 경제 성장을 했다. 특히 항공기라든가 원자력, TGV로 통칭되는 교통수단 같은 데에서 전 세계 선두권에 서는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 이런 경제 발전이 굉장한 정치 혼란 상황에서 이뤄졌다. 샤를 드골이 정계에 복귀해 집권한 1950년대 말 이전 시기에는 정치 혼란이 아주 심했다. 그런데도 경제는 경제대로 발전했다.

이건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는 G7에 들어가는데, <자전거 도둑>(1948년 작) 같은 영화를 봐라. 전쟁 직후 이탈리아가 얼마나 어려웠나. 그리고 이탈리아는 정치 혼란이 지독했다. 1970∼1980년대까지 정말 심했다. 지금 와서는 훨씬 덜한 셈이다. 그때는 내각이 몇 달에 한 번씩 바뀌고 그랬다. 그런데도 경제 발전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프레시안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을 누리며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은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특히 동아시아에서 고도성장이 이뤄졌다.

서중석 : 가장 경이적인 경제 발전을 한 나라는 한국과 함께 대만이다. 1961년에서 1988년 사이에 연평균 9.3퍼센트 성장했다. 세계 최고라고 했다. 대만하고 한국은 어느 시기를 잡아 비교하느냐에 따라 세계 1, 2위를 다퉜다. 대만에서는 1972년부터 장개석(장제스)의 아들 장경국(장징궈)이 요직을 맡고 1975년 장개석이 죽으면서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는데, 중요한 것은 장경국이 등장하면서 점차 정치가 해빙기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1972년 이후 장경국에 의해 중화학 산업화가 대거 이룩되고, 양안 관계도 장경국에 의해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지 않나. 이 점에서도 한국과는 정반대 패턴이다. 산업 발전 형태도 다른 점이 아주 많다. 성장률이 최고라는 점만 비슷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1945년에서 약 25년간 자본주의 세계는 심각한 물가 문제 없이 지속적으로 생산 증대가 이뤄졌다. 한국은 조금 달랐다. 물가 문제가 심했다. 어쨌건 과학 기술 발전, 국제 무역 증가로 1960년대 말까지 자본주의가 황금시대를 맞는다고 이야기한다. 1973년과 1979년의 유가 파동으로 이런 황금시대가 끝난다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사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히 자본주의권의 경제가 활력이 있었다. 다만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견인차이자 중추 역할을 했던 미국이 월남전을 치르면서 1960년대 말부터 상당히 힘들어진 점은 있다.

(자본주의 황금시대에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이 누린 성장과 풍요는 산업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주요 원료를 아시아, 아프리카의 국가들로부터 헐값에 들여오는 불평등한 교환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큰돈이 되는 핵심 자원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그 자원이 있는 제3세계 국가의 정부와 국민이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의 거대 자본이 상당 부분 장악한 데서 비롯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 호황의 이면이다. '편집자')

은혜로운 미국 덕분에 발전한 한국? 미국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 대만과 달리, 1972년 한반도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며 기대를 모으지만 몇 달 후 남쪽에서는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고 북쪽에서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강화되며 해빙과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치닫는다. 유신 쿠데타와 유일 체제 강화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면서, 남북한 독재자들이 시쳇말로 짜고 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다시 돌아오면, 한국의 경제 발전을 짚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다. 이와 관련해 '적화를 막아준 것에 더해 한국의 경제 성장을 크게 지원한 미국의 은혜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서중석 : 미국의 대한 정책, 이 부분에서 한국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듯이 이건 미국의 이해관계, 반공 정책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까 '미국이 잘했다', 이것하고는 상관없는 것이다. 미국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는 게 제일 빠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국의 38도선은, 나중엔 휴전선이 되지만, 미국 반공 정책의 최전선이 됐다. 보루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알기로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터키와 함께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나라다. 군사 원조뿐만 아니라 다른 원조도 많이 받았다.

미국은 1950년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권 때까지는 소련, 중국과 경쟁하는 데 주로 군사 대결을 중시했다. 그런데 소련이 1953년 수소 폭탄을 만들고, 1957년에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린 것에 더해 ICBM(대륙 간 탄도 미사일)까지 개발해버렸다. 이렇게 되니까, 직접적인 군사 대결로 소련을 누르겠다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렸다. 핵의 균형이 확실해지고, 공포의 핵 균형 시대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런 속에서 1960년대에 존 F. 케네디 정권이 등장한 이후부터 미국의 세계적 규모의 반공 정책이 크게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반공 최전선에 있는 나라를 경제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뭐냐 하면 '이제는 군사 대결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고 공산권을 물리치는 것은 상당히 장기적인 과제다.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논리가 그 밑바탕에 많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1950년대에 미국은 여전히 자유 경제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귀속 재산을 팔아 치우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오면서 달라진다. 비사회주의 국가인 인도 같은 데에서 계획 경제를 실시하는 것을 보면서, 계획 경제가 일정한 수준 즉 미국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높은 수준이 아닌 나라, 그러니까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1950년대 중반, 자와할랄 네루가 이끌던 인도는 '정치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 경제는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라는 전략을 택한다. '편집자') 처음에 만들어진 제1차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에서 미국이 못마땅하게 여긴 것들이 많았지만, 그다음부터는 상당히 협조한다. 한국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키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점이 1960년대 들어 대공 정책의 보루를 더 튼튼히 하기 위한 조치로서,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서 강력하게 대두하는데, 미국으로서는 그걸 더욱더 강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하나는 대공 전선 강화는 어디까지나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을 중간축으로, 한국을 최전선으로 하는 미·일·한 수직적 안보 체제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중국이 이때 계속 상승하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중국 상공에 미국 정찰기가 계속 떠 있기는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힘, 가장 기본적인 힘은 일본한테서 나와야 하고 한국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미국이 분명히 하지 않았나.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1960년 미일안보조약이 개정되면서 그것이 구체화되고 그러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까지 안 갈 수가 없게 된다.

더 직접적인 것은 베트남전쟁이다. 뭐니 뭐니 해도 미국이 깊은 수렁에 빠지는 속에서 한국만이 대규모 군대를 파병할 수 있지 않았나. 그러니 한국에 대한 지원 규모가 아주 클 수밖에 없었다.

반공 최전선이자 베트남 파병국이었기에 받을 수 있었던 미국의 대규모 지원

프레시안 : 이 시기 미국이 지원한 규모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가.

서중석 : 1962년에서 1969년 사이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한국에 16억5800여만 달러를 지원했고 군사적으로는 25억여 달러, 그래서 모두 41억5900만 달러를 지원한 것으로 자료에 나와 있다. 이 당시에도 굉장한 지원을 했다. 이건 1970년에서 1976년 사이에도 계속돼서 경제적으로 9억6300여만 달러, 군사적으로는 월남전도 작용했겠지만 27억9700여만 달러를 지원한 것으로 돼 있다. 물론 이건 차관 형태일 것이다. 그래서 합계 37억6100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나와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공공 차관 같은 것을 많이 지원했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1967년에서 1971년에 보면, 미국이 4억4300만 달러를 공공 차관으로 줬다. 이 시기에 일본이 준 공공 차관은 불과 1억7700만 달러밖에 안 된다. 서독은 공공 차관으로 1750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렇게 공공 차관에서 미국이 압도적이었다. 상업 차관, 이것도 미국이 많이 줬다. 1967년에서 1971년 사이에 미국이 준 상업 차관이 5억2580만 달러였는데, 일본은 그보다 적다. 3억6560만 달러였다. 서독도 1억4990만 달러로 이 시기에 꽤 많이 줬다.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미국이 시장 제공을 크게 해줬다는 것이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는 노동 집약적 상품 수출이 많았는데, 제1차 계획 기간 동안 평균해서 우리나라 전체 수출량의 26퍼센트가 미국으로 갔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는 48퍼센트를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굉장한 것이지 않나. 그래서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때부터 무슨 말이 많이 나왔느냐 하면, 무역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미국이 초기에 한국이 산업화하는 데 시장 제공 면에서도 많이 지원했다. 그건 박 정권에 해당하는데,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에 비하면 그 점에서도 손해를 봤다.

기술 도입 건수를 보더라도, 도입 건수 자체는 일본이 압도적이지만 기술 지도 금액은 미국이 압도적이다. 또 고급 신기술의 경우 일본은 잘 안 주려고 한 반면에 미국은 좀 줬던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인을 경제 및 경영 전문가, 과학 기술자, 테크노크라트로 상당히 훈련시켰다. 연·고대 경영학 교육 확립에도 ICA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연세대 상경대 동창회에서 내는 <연경포럼> 2005년 가을호에서 정종진 연세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7년부터 1958년까지 1년간 ICA 프로젝트로 미국에 다녀왔어. 워싱턴 프로젝트의 전신이었는데 우리나라 경영학 발전을 위해서 연·고대 교수를 1년 동안 미국에 보내서 커리큘럼과 교수법을 배워 오게 한 거야. 연대에서는 나하고 이정환 교수, 고대에서는 김순식·송창완 교수가 다녀왔지. 테네시주립대와 펜실베이니아대 워튼 스쿨에서 한 학기씩 배우고 왔어. 그렇게 해서 1958년 연대에 경영학과가 신설된 거야." '편집자') 포드재단에서는 1963년부터 프로젝트를 줘서 서울대 등 16명의 교수를 연수시켰다. 이런저런 것들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에너지 정책을 석유 중심으로 펼 것인지, 석탄 중심으로 펼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던 한국은 결국 석유를 택했다. 사진은 국내 유일의 석유·가스 시추선인 두성호. ⓒ연합뉴스


세계 경제를 강타한 석유 파동과 한국

프레시안 : 자본주의 황금시대는 1970년대에 막을 내린다. 그 계기 중 하나가 석유 파동이었다. '검은 황금'이라 불리는 석유 가격이 요동치면서 세계 경제는 큰 타격을 받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이는 에너지를 헐값에 쓸 수 있었던 것이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가능케 한 주요 조건 중 하나였음을 뜻한다.

서중석 : 1960년대에 특히 해당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 국가가 그렇게 경제 발전을 하고 한국도 그 대열에 끼어드는 데 유리한 조건 중 하나는 에너지를 싸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한정한 에너지를 아주 싸게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인 때가 있었다. 그게 1950∼1960년대다. 이때는 7대 메이저, 세계 최대의 석유 메이저들인데, 여기서 전 세계 석유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비아에서 무아마르 카다피가 등장하면서 석유를 국유화한다. (196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무아마르 카다피는 1973년 9월 1일 석유 국유화를 선언하고 유가를 2배 올렸다. '편집자') 아울러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1973년에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가격을 올려버리고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뭉쳐서 발언하면서 여기에 금이 가고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부터 7대 메이저가 약해진다.

1960년대에는 석유 가격이 굉장히 낮았다.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싸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배럴당 1달러에서 2달러 사이였다. 물보다 월등 쌌을 것이다. 10여 년 전에 아랍에미리트에 갔을 때도 들었는데, 석유 가격이 많이 오른 후에도 어떤 지역에서는 물값보다 석유 가격이 싸다고 그러더라. 하여튼 페르시아만 원유 가격을 보면 1947년에 배럴당 3.80달러였던 것이 1957년에는 2.10달러가 되고 1969년에 가면 1.20달러까지 내려간다.

이게 제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는 1973년에 가면, 그해 4월에 2.50달러가 된다. 두 달 후인 1973년 6월에는 3달러까지 가는데, 그해 하반기에 석유 파동이 터지면서 대폭 오른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중동 산유국들은 하루 만에 석유 가격을 배럴당 3.02달러에서 3.65달러로 올렸다. 아울러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매달 원유 생산량을 5퍼센트씩 줄이겠다고 선언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나라들에 대한 원유 수출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74년 초에 유가는 배럴당 11.65달러까지 치솟았다. 석 달 사이에 네 배 수준으로 석유 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 경제는 휘청거렸다. '편집자') 석유 파동으로 일본 같은 곳이 아주 큰 타격을 입는다. 그 후 진정됐던 유가는 제2차 석유 파동 때 다시 팍 오른다. 1979년 4월에 배럴당 14.50달러가 된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아주 싸지만, 그때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때는 한국도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은 같은 시기에 중동 건설 수출이 있었기 때문에, 그 타격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유리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1960∼1970년대에 한국 정부는 에너지 문제에 대해 어떤 정책을 폈나.

서중석 : 한국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 에너지 정책에서 갈팡질팡했다. '이렇게 싼 석유가 있으니까 석유를 써야 한다',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외부에 의존해 모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에너지를 100퍼센트 의존해서야 되겠느냐', 이렇게 갑론을박했다. 한국 정부 내에도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 않나. 이 문제 때문에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 또는 주탄종유(主炭從油) 정책 해가면서 논란이 많았다. (말 그대로 주유종탄은 석유를 주된 연료로, 석탄을 보조 연료로 하는 것이다. 주탄종유는 그와 정반대다. '편집자')

그러다가 1967년에 석유류 자유 판매제라는 것을 시행한다. 그러면서 석유 자본이 막대한 이윤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그와 동시에 석탄 개발은 후퇴를 면할 수가 없었다. 1970년대에 중화학 공업이 다량의 에너지를 또 요구하게 됐고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이제 석유는 필수가 된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 그렇게 된다. 그러다 보니까 1979년에 쓴맛도 톡톡히 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석유 가격이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탄광 산업이 사양 산업화하는 것도 주유종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러면서 폐광시키지 않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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