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밥'에 굶주린 아이들, 닭장 속에서 괴롭히며 논다"

['학교폭력'을 말하다] 놀이운동가 편해문 "'놀이밥' 못 먹은 아이는 '죽은 목숨'"

편해문 씨는 놀이운동가다.

우리나라 전래놀이를 집대성한 놀이연구가, 놀이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결국 놀이'운동가'다. 평화운동, 인권운동이 필요한 것처럼, 놀이운동 역시 절실하다는 게 편 씨의 생각이다. 평화, 인권 등이 삶의 기본 조건이듯, 놀이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리고 평화, 인권을 억누르는 구조가 있는 것처럼 놀이를 짓밟는 구조가 있다. 이런 구조에 맞서 놀이를 지켜내는 게 놀이운동이다.


그는 '놀이밥'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밥을 제때 먹지 않으면 탈이 나듯, 아이가 제때 충분히 놀지 않으면 결국 탈이 난다. 특히 '놀이 허기', '놀이에 대한 굶주림'이 강력한 어린 시절에 충분히 놀아야 한다. 그때 채워지지 않는 '놀이 허기'는 아이의 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건 표출된다. 밥과 다를 게 전혀 없다. 어릴 때 혹독하게 굶주렸던 기억은 어른을 과식하게 하고, 결국 성인병을 일으킨다.

"아이가 '놀이밥'을 제대로 먹었는가"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그를 만났다.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줬던 학교폭력, 왕따 사건들도 이런 프레임으로 보면 핵심이 명료하게 잡힌다. 어른들은 흔히 왕따, 괴롭힘을 놀이처럼 여기는 아이들을 보며 경악한다. 하지만 이는 어릴 때 충분히 놀지 못해서 생긴 '놀이 허기'를 뒤늦게 나쁜 방식으로 채우려 해서 생긴 일이다. 놀이에 너무나 굶주렸는데, 닭장 같은 학교는 놀이에 접근하는 통로를 모두 막아버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아이들은 자기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며 논다. 마치 닭장 속의 닭이 서로 쪼아대는 것처럼 말이다. 배가 너무 고픈데, 밥이 차단돼 있다면 결국 쓰레기라도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놀이밥'을 푸짐하게 차려 주는 게 답이다.

학교폭력이 부각되면서 함께 문제로 떠오른 온라인 게임 중독 역시 '놀이밥'이 답이다. 편 씨가 보기에 보수 언론이 연일 공격하는 온라인 게임의 선정성, 폭력성은 큰 문제가 아니다. '짐승의 시기'를 지나는 아이들은 원래 어느 정도 폭력적이기 마련이다. 다만 문제는 아이들이 놀이에 너무 굶주린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온라인 게임을 만나면 '빛의 속도'로 중독이 된다. 반면, 어릴 때부터 '놀이밥'을 충분히 먹고 자란 아이는 쉽게 중독이 되지 않는다. 밖에서 하는 놀이와 안에서 하는 놀이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라고 하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한다. 이게 정상이다.

'놀이운동가'이면서 아이들에겐 '놀이밥 삼촌'으로 통하는 편해문 씨를 지난달 말 서울 서교동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만났다. <편집자>

▲ 놀이 운동가 편해문 ⓒ프레시안(이명선)

"학교폭력, 아이들이 '놀이밥' 충분히 먹었는지부터 살펴야"

프레시안 : 학교폭력이 교육계의 화두로 떠오른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가해학생만 찾아내 격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학교폭력'을 말하다" 연속 인터뷰를 진행하며 만난 이들은 이런 방식에 대해 한결같이 비판적이었다. 학교폭력은 우리 사회와 교육이 앓고 있는 병이 나타내는 증상의 하나일 뿐이라는 게다.

그래서 조금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뭘까'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떠오른 게 '놀이'였다. 아이들은 충분히 놀아야 하는데, 지금 아이들에게선 놀이가 사라졌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편해문 지음, 소나무 펴냄)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저자에게 인터뷰를 청하게 됐다. 제목 그대로 '아이는 놀이가 밥'인데,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을 밥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셈이다. 병이 드는 게 당연하다.

편해문 : 학교폭력 문제는 주로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얘기되고 있다. 그런데 '놀이'는 그보다 어린 아이들, 초등학생이 중심이다. 이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학교폭력이 불거진다. 중·고등학생들의 폭력 성향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물론, 학교폭력 문제를 이야기할 때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을 딱 잘라서 접근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폭력이 주로 발생하는 특정 시기만 놓고, 해법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들이 살아온 내력을 봐야 한다.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봐야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 이르는 시기가 아이들이 '놀이'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는 점이다.

"아이들, '짐승의 시기'를 제대로 보내야 사람이 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쩌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되기 이전, '짐승의 시기'를 보내는 시절이다. 짐승들을 보라. 끊임없이 집어던지고 물고 뛰어내리고 하지 않나. 아이들도 그래야 한다. '짐승의 시기'를 제대로 보내고서야, 아이는 '사람의 시기'로 넘어온다.

어린이집에 가보라. 아이들을 칸막이(또는 교실) 안에 가두어 놓는다. 또 배꼽에 손을 얹게 하고 의자에 앉혀 놓는다. '짐승의 시기'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이 그런 공간에서 견딜 수가 있겠나.

다섯 살짜리 아이와 두어 명 되는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관찰해봤다.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놀자'라고 약속하고 오후 7시 반, 8시가 되도록 놀았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 '오늘 오랫동안 잘 놀았다'라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놀이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밖에서 그렇게 많이 몸을 움직이고도 아이들은 저녁 내내 놀았다. 이런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충분히 놀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놀지 않는 아이'='병든 아이'…어릴 때 못 털어낸 놀이, 언젠가 터져나와"

문제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의 시기'에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점이다. 소리 지르고 뛰고 달리고 물어뜯고 던지고 등. 이런 걸 충분히 해서 털어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못하게 하면, 그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아이들의 몸 안에 그대로 잠기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때가 되면 이런 것들을 반드시 꺼내기 마련이다. 조금 더 나이가 찼을 때, 몸밖으로 터져 나온다.

아이들이 책을 보고, 교사의 말을 듣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기에 말이다. 제때 털어내지 못한 '놀이'가 뒤늦게 터져 나오면, 당연히 여러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된 아이들을 볼 때, '오늘'만 이야기하는 것은 참 허망한 일이다. 문제가 있다고 한 단면만을 잘라서 보면 안 된다. 아이들이 지나온 놀이의 이력을 봐야 한다. 아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거꾸로 살펴야 하는데, 정부와 언론이 이야기하는 학교폭력 대책에는 이 대목이 빠져 있다. 그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멀쩡하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니까 갑자기 폭력적으로 바뀐 것처럼 비친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놀지 않으면 몸이 부서진다. '아이들이 놀지 않는다'라는 것은 '아이들이 아프고 병들었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닭장에 갇힌 아이들…왕따 가해자, 그들도 살자고 하는 짓"

아이들이 놀아야 하는데 놀지 못하니까, 그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결국 '왕따', '폭력' 등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왕따', '폭력'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은 그걸 '놀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정상적인 '놀이'를 완전히 막아놓았더니, 아이들은 왕따와 폭력을 '놀이'라고 생각하며 노는 것이다.

학교폭력 사건에서 가해학생만을 나무라는 게 어렵다고 보는 것도 그래서다. 아이들은 놀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도 살려고 하는 것이다. 많은 놀이 중에서도 한두 가지, 괴롭히는 쪽으로 쏠린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선 학교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닭장에서 닭들이 버티는 방법이 그런 식이다. 그래서 닭이 태어나면 제일 먼저, 부리부터 자른다. 부리로 약한 닭을 쪼아대며 괴롭히기 때문이다. 닭들이 고통을 잊는 방법, 그나마 놀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다. 위에서는 똥과 오줌이 쏟아지고 불은 24시간 켜져 있다. 살 수 없는 환경이다. 닫힌 공간이다.

지금 교실과 꼭 닮았다. 아이들 역시 닭장 속의 닭들과 마찬가지 선택으로 내몰린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닫힌 공간이라는 점이다. 닭장도 교실도 닫힌 공간이다. 그토록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놀이'는 많지 않다.

"아이들이 '싸움' 해봐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프레시안 : 잇따른 학교폭력 사건에서 드러난 아이들의 공격성, 가학성에 대한 설명으로 들린다. 어릴 때 충분히 놀지 못해서, 즉 '놀이'를 다 털어내지 못해서, '놀이'가 몸 안에 잠겨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잠겨 있던 '놀이'를 언젠가는 결국 털어내야 하는데,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대부분 닫혀 있다. 닫힌 공간에서 놀이를 털어내는 방식은 제한돼 있고, 그게 결국 폭력과 왕따라는 설명으로 들린다.

편해문 : 여기서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다. 아이들에게 싸움은 필요하다는 점이다. 폭력은 분명히 나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싸움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나는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닐 때라면 거친 싸움을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두들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의 낌새가 보이면 뜯어말리기에만 급급하다. 잘못이라고 본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닐 나이에 싸움을 해봐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놀이와 싸움의 경계 말이다. '상대방을 어느 정도 힘으로 밀면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구나'라는 것을 아이들이 감(感)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 이 나이 때 뛰어 놀면서 거친 몸싸움을 해봐야 놀이와 싸움의 경계를 알게 된다. 이런 학습이 되지 않은 채 나이를 먹은 아이들은 힘 조절을 못 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을 다치게 만든다.

물론,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어른들이 싸움을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안전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 하다.

"어른들이 모든 위험 치워준다?…아이는 놀이도, 세상도 못 만난다"

놀이와 위험과 뗄 수 없는 관계다. 모험과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놀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적당한 위험이 섞인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잘못하면 다칠 수 있다'라는 점을 배운다. 이건 어른들이 말로 설명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나서서 위험을 모조리 치워준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놀이도 만나지 못하고, 위험에 대한 경각심도 기르지 못한다. 이는 결국 아이들이 세상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현병호 <민들레>발행인도 '아이들이 싸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도 깊이 공감한다. 지금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아이들 세계에서 '싸움 놀이'가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본다. 놀이 속에서 싸움을 하며 몸의 힘을 쓰면 초등학교 4학년 정도에는 그 힘이 소진된다. 그런데 이걸 못하게 하니까 '싸움 놀이'가 폭력으로 넘어간다. 어린 시절에 했어야 할 '싸움 놀이'가 결국 시간이 지나 뼈가 굵어진 뒤에 아주 맹렬하게 진행된 것이다. 그게 학교폭력이다.

아이들을 보라. 이유 없이 악을 쓰고 물건을 던지고 뛰어내리곤 한다. 어른이 했으면 크게 다칠 일들이다. 아이들이니까 별 탈 없이 지나간다. 아이들 시기에 이런 식으로 서서히 몸의 힘을 빼야 하는데, 우린 지금 그걸 막아놨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나중에 그걸 한다. 그때는 자기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한다.

"놀이에 굶주린 아이들, '놀이 허기' 채우려 돈 뺏는 '일진' 된다"

프레시안 : 이번에 낸 책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일진들이 연결 고리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일진들이 하는 주 업무가 아이들로부터 피라미드 다단계처럼 돈을 상납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왕따'의 최종 목표가 돈 수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왕따'라는 것은 사람 관계보다 경제 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37쪽)라고 지적했다. 학교폭력을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는 '일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이다.

ⓒ프레시안(이명선)
편해문
: "'일진' 아이들이 하려는 '놀이'가 무엇일까"를 고민해봤다. 놀이의 시기를 놓친 지금 아이들 마음속에는 놀고 싶은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놀이에 대한 허기가 차갑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기가 지나버렸으므로,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 놀 수 없다. 사실상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놀이는 끝난 것이다. 예를 들면 비석치기 같은 것을 중고생들이 하고 놀 수는 없지 않나. 공기놀이 역시 못한다. 하지만 놀아야 한다. '논다'는 것은 생(生)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대신 들어선 놀이가 '소비', 즉 '돈을 내고 사는 놀이'이다. 일진 아이들이 돈을 거두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면서 하는 놀이이다. 노는 시기를 놓친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놀이 허기를 채운다.

"'놀이=소비'라는 아이들, '진짜 놀이' 잊어버렸다"

초등학교 5~6학년 아이에게 "쉬면서 너만의 시간을 보내봐라"라고 말해보라. 많은 경우,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에게 '논다'는 것은 '돈을 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묻는다. "그게 얼마예요?"라고.

어린 시절 '놀이'를 못하게 하면 할수록 아이들이 '돈 내고 사는 놀이' 같은 것으로 넘어오는 시기는 점점 더 앞당겨질 것이다. 요즘 부모들이 제일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무엇을 사줄 때'이다. 아이들 세계에선 돈으로 사주면 '놀이'는 끝난다. 그 뒤엔 '사는 놀이'만 남는다.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경험하는 건 '배반의 연속'"

프레시안 : 부모들은 아이들이 갖고 놀라고 장난감을 사주는데….

편해문 : 아이들이 장난감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배반의 연속'이다. 자동차를 사주면 '어?'하며 금방 반응을 보이지만, 곧 '내가 놀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난감을 통해 만나는 감정은 '놀이'에서 느끼고 싶은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자동차 장난감을 보라.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 딱 네 가지다. 뜯어보면 복잡하지만 기능은 단순하다. 그래서 금세 싫증이 난다. 아이들 입장에선 장난감이 큰 행복을 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배반의 연속'이라는 게다.

아이들에겐 사람과 노는 것 만큼 좋은 게 없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놀고 싶어 한다. 엄마는 소리 지르고 울고 때리고 껴안고 따뜻하고 말하고, 그 기능이 몇 가지인가.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닌텐도를 쥐여주는 것으로 아이를 만난다.

"텔레비전 꺼도 아이들 머릿속에선 계속 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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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편해문 지음, 소나무 펴냄) ⓒ소나무
프레시안
: 책에서 "대한민국 아이들은 놀이와 헤어진 채 손바닥 게임기와 스마트폰을 한 대씩 들고 오갈 데 없이 '어린 난민'으로 떠돈다"(217쪽)라고 지적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요즘 아이 키우는 부모들에겐 스마트폰이 화두다.

편해문 : 스마트폰 쥐어주고, 늘 텔레비전 켜놓고 아이를 키우면, '그 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부모의 이야기를 아이가 들을 수 있는지, 자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지.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 그림책이 36쪽 정도이다. 펼치면 장면이 16개 정도 된다. 자기 전에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그걸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잠이 든다. 엄마의 목소리, 그림, 이야기 등 정보의 양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1초 동안에도 수많은 장면이 지나간다. 아이들은 열여섯 장면도 소화하기 힘들어하는데, 텔레비전을 소화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을 끊다고 해도, 아이들 머릿속에선 계속 켜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컴퓨터 게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겐 눈 앞에서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잠을 제대로 못 잔다. 학교에 가도 몸이 학교에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텔레비전 속 물건 가질 수 없다며 괴로워하는 아이들"

더 큰 문제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완전한 소비자로 키우고 있다. '소비'가 '놀이'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본 수많은 물건들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진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에게서 '놀이'는 확 사라진다.

앞서 <프레시안>과 인터뷰했던 우치다 타츠루 선생도 "학교와 사회 사이에는 담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생애 초반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엄마, 아빠와 지내는 가정 역시 바깥에 있는 세상과 구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 구분이 없다면 우리가 왜 엄마이고, 아빠이겠는가. 세상과 가정 사이에서 구분이 되는 강을 만들어줘야 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아이들은 결국 바깥 세상을 만날 날이 온다. 또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생애 초반 시기에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이런 구분을 깬다. 텔레비전이 위험한 이유다.

아이들은 눈앞에 있는 것들을 자연의 속도 그대로 봐야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아이들이 자연의 속도를 넘어선 방식으로 보게끔 한다. 정보가 지나치게 집중돼 있고, 또 필요 이상으로 넘쳐난다. 이 역시 위험하다.

"온라인 게임, '중독' 피할 길이 없다…'셧다운제' 소용없어"

프레시안 : 요즘 아이들의 '놀이'를 이야기하려면, 온라인 게임을 빠뜨릴 수 없다. 사실상 온라인 게임이 몸으로 하는 놀이를 대체한 지 오래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을 둘러싼 논의는 좀 더 복잡하게 진행된다. 예컨대 보수언론은 온라인 게임을 학교폭력과 연결짓는다. 학교폭력이 온라인 게임의 선정성, 폭력성 때문에 생겼다는 게다. 이런 식의 단순 논리는 분명 잘못이다. 온라인 게임을 규제한다고, 학교폭력이 사라질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을 무작정 옹호하는 것도 위험해보인다.

편해문 : 한마디로 말하자면, 게임은 끝났다. 아이들의 '놀이'를 둘러싼 싸움에서 게임업자들이 완전히 승리했다는 말이다. 이쪽은 완전히 참패했다고 본다. 싸움의 전선도 형성되지 않은 채 졌다.

지금 게임 중독 상태인 아이들이 아주 많다. 셧다운제(16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심야시간의 인터넷 게임을 차단하는 제도-편집자)나 인터넷 종량제 얘기가 나오지만, 게임 사업에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게다. 이제는 게임을 들고 다니면서 하는 세상이 됐다.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니 말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게임을 들고 다니면서 하는데 부모가 언제까지 아이들을 단속할 수 있겠는가.

게임 상품이 출시될 때도 중독을 전제로 한다. 뇌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 한마디로 '머리 나쁜 아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만든 게임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중독되지 않고서는 배겨낼 길이 없다. 셧다운제 등으로 규제한다 해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나쁜 '진짜 이유'…'싸움의 시기'에서 영영 졸업 시키지 않는다"

학교폭력과 게임을 연결시키는 쪽에서는 게임의 폭력성을 문제 삼는다. 단순 논리를 피하려면 좀 따져봐야 한다. 아이들은 실제로 폭력적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싸움의 시기가 필요하다. 어릴 때 이 시기를 거치면서 몸에서 힘을 털어내야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싸움의 시기에서 졸업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온라인 게임이 진짜 나쁜 이유는 이 대목이다. 온라인 게임은 아이들이 싸움의 시기에서 영영 졸업하지 않게끔 한다. 도무지 졸업을 시켜주지 않는다. 온라인 게임은 대부분 폭력을 써서 남을 죽이면 자신의 점수가 올라가는 구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높은 점수'에 상당한 가치를 둔다. 그러니까 게임이 주는 쾌감을 끊기 힘들다. 아이들 입장에선 남을 죽이는 나쁜 짓을 했는데, 사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높은 점수'를 얻으니까 혼란스러다. 적당한 때 이런 혼란에서 '졸업'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아이는 영영 '싸움의 시기'에 갇혀 있게 된다. 게임 콘탠츠의 선정성, 폭력성이아니라 이게 진짜 문제다.

"놀이 허기 못 채운 아이들, 온라인 게임에 '빛의 속도'로 빠져든다"

프레시안 : 보수 언론이 온라인 게임의 폐해를 콘탠츠의 선정성, 폭력성에서 찾는 것과는 다른 지적이다. 아이들이 영원히 '싸움의 시기'에 머물게 하므로 온라인 게임이 나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대책이 뭘까. 아이들이 온라인 게임에 중독된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편해문 : '놀이'에 대한 허기가 진 상태에서 아이들이 온라인 게임을 만난 순간, 빛의 속도로 빠져 들어간다. 온라인 게임은 몸으로 하는 놀이는 아니지만,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쌓인 허기를 채우게 된다. 이런 아이들을 부모들이 PC방에서 끌고 나온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놀이에 대한 허기, 굶주림은 금방 채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방법이 없다.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세상이다. 정부 역시 온라인 게임을 문화산업으로 보고 지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막는다고 아이들이 게임을 끊을까.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 게임 중독으로 가는 길이 뻥 뚫려 있다.

"'놀이밥' 꼬박꼬박 먹고 자란 아이들, 좀이 쑤셔서 게임 중독 안 된다"

ⓒ프레시안(이명선)
그런데 이런 대한민국에서도 게임에 중독이 안 된 아이들이 있다. 어떤 아이들일까. 어린 시절, 대략 초등학교 4학년 정도까지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은 아이들이다. 드물지만 이런 아이들이 있다.

부모들이 '나도 어릴 때는 실컷 뛰어놀며 자랐는데'라는 생각으로 뛰어놀게끔 한 아이들이다.

물론 이런 아이들도 게임을 접하면 좋아한다. 그리고 열심히 한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해 왔던 놀이와는 다른,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니까.

하지만 '놀이밥'을 충분히 먹고 자란, 이런 아이들이 게임을 대하는 모습은 꽤 다르다. 이 아이들은 게임을 해도 두세 시간을 못 버틴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이들을 '산 목숨'으로 키울 건가, '죽은 목숨'으로 키울 건가"

프레시안 : 밖에서 노는 게 더 재미있어서?

편해문 : 몸이 근질근질해서, 좀이 쑤시기 때문이다. '짐승의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을 의자에 딱 붙여 놓고 있으니 못 견디는 것이다. 밖에서 몸짓을 하면서 놀았던 아이들인데, 게임을 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니 곤욕인 것이다. 머리가 아닌 몸이 근질거리고 좀이 쑤셔서 못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야말로 '산 목숨'이라고 본다. 결국 밖에서 인라인스케이트라도 타고 와야 한다. 이렇게 밖에서 하는 놀이도 재미있고, 안에서 하는 놀이도 재미있다는 균형이 생겨야 한다. 이런 균형을 아이들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 중독 등 여러 문제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아이들은 밤새도록 게임한다고 의자에 앉아 있어도 불편을 못 느낀다. 이런 아이들은 '죽은 목숨'이다. 그래서 부모들에게 묻고 싶다. 아이들을 '산 목숨'을 만들 것이냐, '죽은 목숨'을 만들 것이냐.

"'놀이 수업' 끝난 아이 '선생님, 이제 놀아도 돼요?'"

프레시안 : 학교폭력 대책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문예체(문화·예술·체육) 교육을 권장한다. 교실을 벗어나 바깥 활동을 하라는 말인데, 이런 교육에 대해 어떻게 보나.

편해문 : '놀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국면이다. 아이들을 놀게 하겠다는 것인데, 그 시간(문예체 교육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놀았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안 놀았다'라고 답한다. 문예체 교육의 일환으로, 비석치기 등 전래놀이를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아이들에게 그건 '놀이'가 아닌 것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보면 놀이방, 놀이교육, 영어 놀이 등 '놀이'가 붙은 과정이 많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하는 게 진짜 '놀이'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교사에게 '아이들이 뭐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놀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종이접기한 것을 교사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이제 놀아도 돼요?"

결국 아이들 입장에서 이런 놀이들은 '가짜 놀이'라는 것이다. '가짜 놀이'와 '진짜 놀이'가 있는데,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배치돼 있는 '놀이'나 유치원에서의 '놀이'를 아이들이 '진짜 놀이'로 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에게 '정규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을 제발 놔둬라'라고 말하고 싶다.

"'놀이 본능'에 칼질하는 어른들…아이에게 '멍 때릴' 시간을 줘라"

'가짜 놀이'는 결국 한 명의 교사가 여러 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는 수업일 뿐이다. 교사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지금 저 모습이 아이들이 진짜 노는 것인지. 아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가한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한가한 시간을 줘야 한다.

"애들아, 이제 놀이를 시작하자"라는 말은 필요 없다. 연극 놀이하자고 한들, 아이들이 눈치 못 채겠는가. 진짜 노는 것과 노는 시늉을 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들이 '진짜 놀이'를 언제 시작하는지 다시 눈여겨봐야 한다.

'놀이'는 어른들이 '하자', '저기 가서 해라'라고 말한다고 시작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심심해야 '놀이'를 한다. 아이들이 심심하게 놔둬야 한다. 한가하게 멍 때리는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멍 때릴까봐 시간을 촘촘하게 채우려고 한다. '놀이'를 다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놀이 본능에 칼질하는 것이다.

"함께 놀 아이가 없다?내 아이가 놀이터에 나오는 첫 번째 아이가 되게 하자"

프레시안 : 아이들이 심심해 할 시간, 일종의 여백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시간과 공간의 여백 말이다. 빈 시간, 빈 공간. 그런 게 참 없다. 그런데 설령 이런 여백을 만들어도 여전히 없는 게 있다.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 텅 빈 운동장에 아이를 내놓으면, 그 아이 혼자뿐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조리 학원에 있다.

편해문 : '아이를 놀게 해주려고 밖에 데리고 나왔더니 아이들이 한 명도 없다'라고 한다. 참 논리적인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한번 따져보자. 이런 말은 어른들이 자기 생각만 하는 경우다. 어른들이 그동안 아이를 놀지 못하게끔 여러 군데로 빼돌리는데 깊이 공모한 결과다. '아이를 여기저기(학원 등에) 보낼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리 아이가 밖에 나왔더니, 아이들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아이를 동네 놀이터에 나올 수 있는 첫 번째 아이로 만들어야 한다. 내 아이가 먼저 나오게끔 하지 않으면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한국에는 용기 있는 부모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아이들을 밖에 나가서 놀게끔 하는 용기 말이다.

ⓒ프레시안(이명선)

"'즐거웠던 어린 시절' 기억 없이 어떻게 힘든 어른 시절을 견뎌내겠나"

프레시안 : '놀이밥 삼촌' 또는 '놀이 운동가'라는 호칭을 쓴다. 조금 낯선 표현인데, 계기가 있나.

편해문 : '평화운동가', '인권운동가' 등과 마찬가지다. 평화나 인권 등은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가치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가치를 억누르는 구조가 있다. 이에 맞서서 평화, 인권을 지켜내려니까 '평화운동가', '인권운동가'가 되는 것이다.

놀이도 마찬가지다. 평화, 인권 등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밥과 다를 게 없다. 밥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면, 죽거나 병이 드는데 놀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밥심'으로 산다고 한다. 어릴 때 충분히 놀면서, 그렇게 기른 흥겨움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

청소년 시기를 보내는 게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더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된다. 그런데 어른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기마저도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도록 강요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시절에 행복한 기억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청소년 시기와 어른 시기에 앞선, 어린이 시기는 그나마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시기이다. 세상과 담이 쳐진 상태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때다. 아이들이 이때를 돌아보며 '노느라고 참 좋았어'라고 할 수 있어야 이후 두 시기를 지나갈 수 있다.

"놀이는 나의 힘"

논다는 것은 행복을 만나는 것이다. '즐겁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라는 느낌을 새기는 것이다. 청소년 시기, 어른 시기는 이런 느낌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없는 느낌을 어떻게 찾아가겠나. 누구나 청소년, 어른 시기에 힘든 일을 겪는다. 즐겁다는 느낌을 아는 사람은 힘든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반면, 그걸 모르면 시련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유혹을 받는다.

요즘 왕따, 학교폭력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청소년 시기에만 겪는 게 아니다. 어른 사회에선 따돌림과 폭력이 없나. 그렇지 않다. 다만, 이런 문제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소년들이 나타나니까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다른 청소년들도 돌아봐야 한다. 그들에겐 문제가 없을까. 당장은 멀쩡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놀이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지 않은 채 자란 아이들은 언젠가는 문제가 생긴다. 사람은 허기를 반드시 채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뒤늦게 허겁지겁 놀이 허기를 채우는 과정에서 결국 탈이 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힘들 때가 있었다. 돌아보니, 그 시기를 버티게끔 한 힘은 결국 어릴 때 즐겁게 놀았던 기억에서 나왔더라. 내가 '놀이운동가'로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다.

"놀이 통해 한번 죽는 게 끝 아니라는 걸 배운다"

놀이가 지닌 힘은 이밖에도 많다. 어릴 때 했던 놀이를 떠올려 보라. 대부분 금을 밟으면 죽는 식이다.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죽었다, 살아났다'를 되풀이한다. 이런 경험이 소중하다. 한번 죽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익혀야 한다.

비석치기나 공기놀이를 처음 하면, 누구나 못 맞추고 못 꺾는다. 그러면 보통 누나나 형들이 '깍두기'를 시켜준다. 계속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놀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진짜 살벌한 경쟁에선 이런 일이 없다.

우리 편에서도 하고, 상대 편에서 해보면서 계속 꺾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된다. '자꾸 하다 보면 결국 되는구나'라는 경험은 도서관의 책 만 권을 읽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바로 긍정의 힘이다. 어른들이 '하다보면 된다. 용기를 가지고 해봐라'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건 그냥 말일 뿐이다. 몸으로 경험하는 게 진짜다.

"마음껏 놀며 자란 아이는 함부로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놀면서 벽을 넘어간다. 많이 놀면, 이런 경험이 쌓인다. 그래서 마음껏 놀며 자란 아이는 함부로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정말 힘든 순간이 와도 결국에는 긍정적인 선택을 한다. 놀이를 하면서 벽, 싸움, 낭떠러지를 감당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힘을 키우지 못한 아이들을 그저 앞으로만 내몬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기운, '긍정'이라고 할 수 있는 힘, 한마디로 생기가 필요하다. 이런 것 없이 싸움터로 내몰린 아이들이 나쁜 감정과 만났을 때 뛰어내릴 곳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너무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막아야 한다.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하라. 한가한 주문이 아니다. 절박한 외침이다.

"한 그릇 '놀이밥'"

1. 아이에게 한가한 시간을 줍니다.
2. 아이와 함께 놀 수 있는 이웃 동무를 만듭니다.
3. 아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4. 학습이나 창의력 등을 놀이와 연관 짓지 않습니다.
5. 하루에 두세 시간씩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입니다.

놀이를 살려 아이를 살리는 어린이놀이운동을 감히 제안하며 여러 해 고민한 다섯 가지 실천안을 내놓는다. 늘 아이들 가까이 두고 마음을 다잡았으면 한다. 아이들이 놀아야 자고 놀아야 먹는다. 그리고 아이들 문제는 어쨌든 놓아야 풀린다. 이게 순리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정성스레 따듯한 '놀이밥' 한 그릇을 퍼줄 때이다.

-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178쪽
- '학교폭력'을 말하다

"'일진' 솎아내면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폭력과 섹스 말고 놀 줄 모르는 아이들, 방법은…"
"내 아이 인생설계가 아이를 망친다"

"교육부의 '밥상머리 교육'? 밥 먹다 체할라"
"2주에 한번씩 자살…학교는 폭력의 숙주"

전학 학생 첫 마디, "어느 아파트 살아?…그런대로 사네"

"아빠, 자살하면 기분이 어떨까?" 묻던 아들, 실제로…
합기도 7단 일본 지성이 말하는 '학교 폭력'의 이유

'계집애 같다' 놀림받던 아이가 자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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