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지났습니다.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공정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이라는 같은 병으로 죽거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린 딸을 잃었던 황유미 씨의 아버지가 작은 몸뚱이로 거대한 삼성과 세상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이후 하나 둘씩 피해자는 늘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삼성은 여전히 '직업상 재해가 아니다'는 입장만 되풀이합니다. 고 황유미 씨의 유족이 신청한 산업재해 인정 요구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가 조만간 나올 예정입니다. 과연 백혈병과 삼성반도체 공정 사이의 인과관계가 드러날까요? 역학조사 결과 발표를 앞두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과 <프레시안>은 다섯 번에 걸쳐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 그리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도 여전히 삼성반도체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가진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
조만간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이 조사는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건강 실태에 대한 국내 최초의 조사이자,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병이 업무와 관련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두번째 역학조사이기도 하다.
고 황유미씨는 국내 반도체 노동자들 중 백혈병 산재보상을 신청한 최초의 사례였다. 산재보험을 관리하는 근로복지공단은 업무관련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산업안전공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했고, 2007년 하반기에 1차 역학조사가 있었다. 유미씨가 일하던 공정에서 백혈병 유발물질을 찾는 조사였다.
하지만 뾰족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이미 유미씨가 병에 걸려 일손을 놓은지 2년이 지났고, 그 후 유미씨와 짝지어 일하던 동료마저 백혈병으로 사망한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발암물질을 버젓이 내놓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단 며칠 간의 현장 조사를 통해 몇 년 전 그 곳에 발암물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래서 2007년 12월 산업안전공단은 유미씨 사례에 대한 업무관련성 판정을 보류하고 추가조사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번 2차 역학조사 결과는 유미씨의 백혈병이 직업병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녀가 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병들어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꼭 알고 싶다시던 아버님을 비롯하여, 유미씨의 뒤를 이어 산재를 신청한 4명의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 그리고 '반올림'에 상담을 해오면서 산재신청을 준비하고 있는 또다른 피해 노동자들 모두가 이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헌데 이처럼 중요한 조사임에도, 그 결과를 기다려온 지난 1년 간 우리에게는 진실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는 불안과 불신, 실망이 더욱 크게 자리잡아왔다.
불신의 뿌리에는 삼성반도체가 있다. 역학조사는 기본적으로 회사가 내놓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회사가 조사에 협조하는 것은 법적인 의무이기도 하고, 윤리적으로도 당연한 일이긴 하다. 문제는 그 회사가 '삼성'이라는 데 있다.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가.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황민웅씨에 대한 사내방송을 틀면서 한쪽에서는 유미씨 아버지에게 '백혈병은 당신 딸 하나 뿐'이라고 거짓말하던 회사. 매년 작업환경측정이나 노동부 관리감독 사항인 동시에 현장에서 늘 걸레에 묻혀 쓰고 있는 화학물질조차 '쓰는지 안쓰는지 모르겠다'라고 국정감사장에서 시치미를 떼는 회사. 정작 십년 간 일했던 노동자는 한번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안전보건교육을, 매달 꼬박꼬박 실시했다고 주장하는 회사. 엑스레이로 제품검사를 하는 노동자에게 엑스레이가 유해 방사선이라는 것조차 알려주지 않으면서 '방사선은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회사다.
이런 회사가, 역학조사를 위해 유미씨 생전의 작업환경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빠짐없이 자료를 내놓을 것이라고 믿기란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근무했던 노동자들이나 삼성과 직접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전문가들이 회사 자료를 검토하게 하여, 이 조사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꾸준히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은 시종일관 이를 거부해왔다. 때로는 '회사 자료에 대해 비밀 유지를 약속했다', '일부 자료에는 개인 정보가 들어있다'라는 이유를 댔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로 회사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면 그 자료는 빼고 보아도 좋고,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가공된 자료만을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조차 불가능하다고 했다. 회사와 '모든' 자료를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게 그들의 이유였다.
때로는 '피해 노동자 측이 참여하면 회사 측도 참여하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게 거부의 이유였다. 우리는 그게 좋겠다고 했다. 상충되는 쟁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면, 조사 과정은 어려울 지 모르나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투명한 조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된다'라는 것이 최종 답변이었다.
사실 역학조사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법령 그 어디에도 당사자들의 참여를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결국 당사자 참여 문제는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 무슨 의견을 내놓건 번번히 거부당하면서, 우리는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버려야했다. 과연 그들은 베일에 싸인 반도체 공장의 실태를 제대로 알아내려는 의지가 있는 걸까. 조사에 대한 당사자들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걸까.
그래도 또다시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을 찾아갔다. 최종 결론을 내놓기 전에 공청회라도 열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지난 1년간 조사과정에 전혀 참여할 수도 없었고, 공정하게 진행되는지 감시할 수도 없었지만, 최소한 조사 내용을 검토하고 의견을 낼 수 있는 한번의 자리는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청회와 관련된 두 번의 면담에서 그들은 아무런 확답을 줄 수 없다고만 했다. 우리는 아직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서 암을 얻어 투병 중인 노동자들과, 이미 아끼던 가족의 죽음 앞에 먹먹한 슬픔으로 견디고 있는 가족들 모두가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원인 모를 암으로 쓰러져간 노동자들을 이 사회는 그동안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물으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세상이라면, 기업과 정부가 이런 문제에 대해 어찌 해야 하는 건지를 물으며. 진실을 기다리며.
"저희는 또다시 '벤젠은 쓰지 않고, 방사선은 잘 관리되고, 백혈병 유발 물질은 찾을 수 없었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진 않습니다. 그걸로 백혈병이 삼성반도체에서 했던 일과 관련이 없음을 증명할 수 없잖아요. 그렇게 건강했던 애기 아빠가 왜 죽어야 했고, 새파랗게 젊은 노동자들이 왜 백혈병이며 암에 걸리고 있는지, 그건 우리가 찾아낼 수 없잖아요. 그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 노동부와의 면담에서 유족 정애정씨의 말
▲ 우리는 아직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서 암을 얻어 투병 중인 노동자들과, 이미 아끼던 가족의 죽음 앞에 먹먹한 슬픔으로 견디고 있는 가족들 모두가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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