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창조적 역량, 결국 시스템의 문제이다

[이슈인시네마] 프레시안 영화포럼 (1) - 다시 날자, 한국영화!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9월 26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영화포럼을 개최했다. 창조산업연구원과 D&D 미디어가 공동주관한 이번 포럼은 '다시 날자, 한국영화 : 한국영화와 창조성'이라는 주제로 위기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오고 있지 못한 한국영화의 현재를 '창조력'이라는 측면에서 재점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과 대안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창조산업연구원의 김혜준 대표가 사회를 맡아 1부에서는 '영화에서 창조역량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공공의 적>, <실미도> 등의 각본을 담당한 김희재 작가와 <라이어>,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연출한 김경형 감독, <인어공주>, <두번째 사랑>을 제작한 나우필름의 대표이자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부회장을 맡고있는 이준동 프로듀서, 그리고 영화전문기자이자 본지의 편집장인 오동진 전문위원이 패널로 참석했다. 2부에서는 '기획개발 역량,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주제로 김경형 감독,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프로듀서이자 프로듀서조합의 대표를 맡고 있는 안영진 프로듀서, 기획개발 전문투자조합의 십사역을 맡고 있는 서영관, 위즈덤미디어의 노진선미 대표가 패널로 참가했다.
패널들의 공통된 결론은, 영화산업이 한두 사람의 작업이 아닌 만큼 결국 개인의 창조적 역량을 시스템의 창조적 역량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산업이기도 하고 문화예술이기도 한 만큼, 산업적 관점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 그럼에도 산업적 관점에서 보다 철저하게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프레시안은 이 날의 포럼 내용을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한국영화가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가,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 포럼에 참석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 기사를 읽는 이들에게도 좋은 영감이 되리라 믿는다. - 편집자 주 .
김혜준 : 한국영화는 과거와의 단절이 심한데다가 양극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소위 '대박영화'와 묻혀버리는 영화들 사이의 격차가 심해지는 가운데 중급 규모의 영화가 실종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사이에서 과연 영화란 무엇인가, 관객과 교감하는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은 이들이 하고있다. 오늘은 누구의 탓을 하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생산적인 논의를 하기 위한 자리다. 영화 <모던보이>, 드라마 <바람의 화원>, 그리고 최승희의 일대기를 다루는, 현재 제작 준비 중인 <나는 춤이다> 등은 모두 시중에 소설 형태로 원작이 나와있다. 환경이 어려워짐에 따라 일종의 대응 차원에서 장르간 벽도 많이 허물어지고 있고, 원-소스 멀티 유징도 많이 고민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모범적인 예가 아직 그리 많은 것 같진 않다. .
김희재 작가
김희재 :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가 창조성 때문이라고 한다면, 시나리오 작가 입장에서는 결국 작가를 질책하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산업 안에서 창조성이란 비창조적일 만큼 영악한 계산과 계획 속에서 접근해야 할 만큼 산업 안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막연하게 한 작가의 개인적인 역량에만 기대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개인의 창조적 역량을 시스템 차원에서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업계 간 어떻게 조화를 이뤄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단계로 부상했다. 적절한 자본이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투자됐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창조성이란 어떤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매체와 자본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이 안에서 작가는 어떻게 위치해 있는가? 시스템 안에, 자본 안에 존재하고 있는가? 재투자가 이뤄지고 있는가? 대중과 교감을 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원-소스 멀티-유징에 대한 고민 때문에 원천 컨텐츠 형태로 스토리를 만들어 대중의 검증을 거친 후 자본의 투자를 유치하고 이 과정을 기업화하기 위해 올해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기존의 작가들의 공동창작집단 형태는 아니다. 산업계에서 기대하는 바와 해외에서의 반응 등이 어떤지 보고하겠다. . 영화의 창조적 역량은 시스템의 창조적 역량과 직결된다 김경형 : 포럼의 주제가 마치 한국영화의 위기가 창조성의 결핍 때문이라고 전제돼 있는 것 같은데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표면적 현상들이 그런 문제의식을 갖게 만들고 있는 건 사실이다. 개인의 창조적 역량이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개인의 역량은 개인적으로 키워야 하는 것이며, 이를 문제 삼으려면 우리나라 교육의 전반적 문제점부터 짚어야 할 것이다. 상업영화의 관점에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창조성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이런 창조성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영화 한 편이 기획되어 완성되기까지 통상 2, 3년이 걸린다고 했을 때, 결국 창작자의 최초 아이디어가 관객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되는 시점은 첫 아이디어에서 2, 3년이 지난 후라는 얘기가 된다. 결국 산업으로서, 대중매체로서 영화란 최소한 2, 3년 후의 트렌드를 예견하고 예측, 기획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2, 3년 후 마켓에서 드러날 창조적 역량의 표현은 작가나 감독의 개인적 역량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까지 영화 전체의 제작과정을 관할하는 시스템의 역량이야말로 영화의 창조적 역량이다. 영화는 한두 사람의 창조적 역량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영화화를 위해 아이템을 골라내는 것에서부터 2, 3년 후 이를 마케팅하는 마케터의 역량 등이 모두 총화된 역량이다. 지금 한국영화 전반의 수준이란 결국 한국영화 시스템 전반의 수준을 반영한다. 나를 포함해 창작자들 모두가 자신이 한계를 반성해야겠지만 제작자의 제작역량이나 투자자의 투자 안목 역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오늘 그런 고민과 대안까지 심도깊게 이야기됐으면 한다. .
오동진 전문위원
오동진 : 이 주제를 마련한 것은 "지금 한국영화가 과연 창조적인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한국영화가 과연 창조적인 적이 있었던가? 해외영화제를 취재하다 보면 해외영화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한국영화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한국영화가 좋은 이유를 물으면 "한국영화여서 좋다."라고 대답한다. 독창적이고 창조적이란 얘기다. 김경형 감독의 말대로 감독과 작가 등 개인의 창조성은 뛰어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시스템의 창조성으로 연결됐는가? 그렇지 않다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지금의 한국영화의 파워를 상실하게 됐는가? 여기에서 이 세미나의 주제가 시작됐다. 개인의 창조성을 시스템의 창조성으로 연결시키는 부분에서 무엇이 부족했는가,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영화의 창조성을 강화하기 위해선 일정한 철학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위기란 결국 이 사회 안에서 영화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하는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저널리스트로서 나는 미학적인 접근보다는 산업적인 접근을 주로 해왔고, 산업적 논리를 개인의 창조성보다 우위에 둬온 감이 있다. 시스템 안에서는 특히 지난 5년간 영화를 영화로 사고하기보다 산업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경향이 높았고, 영화 본연의 예술성과 창조성이 폄하된 감이 있다. 지금은 이것이 새롭게 반성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현재 산업적 규모에서 조정과 조율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국영화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단계인 만큼 산업 자체가 예술적, 창조적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미학적 성과를 어떻게 가져가며 장기적으로 이어가야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영화, 산업적 논리로만 보면 안 된다 이준동 : 오늘 토론에는 두 가지가 전제돼 있는 듯하다. 먼저 한국영화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다시 날자'는 얘기는 지금 추락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 번째는 창조력 부족이 그 위기의 중요한 원인이이라는 것. 나는 한국영화가 위기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원인이 창조력 부족이라는 데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금 과연 한국영화의 창조적 역량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상영되고 있는 영화들 중 창조적 역량이 부족해 보인다면, 그건 영화의 창조력이 부족한 것인가, 창조력이 있는 시나리오들이 사장된 결과인가? 한국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데에 결정적인 결정권은 창작자가 아닌 자본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성은 물론이고 창조성의 깊이까지,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시나리오들이 대거 사장되고 있다. 한국영화의 창조성에 기반이 될 잠재력 자원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많다. 우리 공동체에 상처가 되는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은 한편으로 삶을 성찰하게 되는 큰 자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한국전쟁과 긴박하고 극단적인 대치상태의 분단 상태, 좀더 현대로 오면 광주가 있다. 게다가 압축성장한 사회인만큼 전근대성과 근대성, 탈근대성이 한 공동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게 우리 사회다. 우리가 갖고 있는, 특히 영화가 가져야 하는 창조성의 자원은 대단히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환경의 변화에 창작자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면 반성할 수밖에 없지만, 창조성이 부족해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창조력 있는 시나리오가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 그 구조에 대해 얘기해봐야 한다. 또 하나, 창조성을 얘기하면서 산업의 공정만 얘기하고 공정만 개선하면 될 것처럼 얘기하는 것, 그러니까 컨베이어 벨트의 순서만 얘기하는 건 덜 창조적일 뿐만 아니라 반-창조적인 방식이다. 영화라는 것을 일반 공산품처럼 바라보는 데에만 너무 익숙한 것이 아닌가? 산업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반성해야 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면서도 모두들 '그래도 이익이 나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자본이 가지는 역할과 역량과 결정력 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최근 급격하게 모든 컨텐츠들이 디지털의 영향을 받고 있고,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 수없이 새로운 윈도우와 플랫폼이 나오고 있다. 수용자 측면에서도 UCC라는 창조적 영상제작자가 등장했고 이를 게시하는 포털 환경도 등장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새삼 영화란 무엇이며 새롭게 규정되는 창조성은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은 위기 상황과 상관없이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답을 찾은 건 아니다. 이 자리를 통해 논의되었으면 한다. . 김희재 : 나는 원래 10년간 라디오작가, 만화 스토리작가 등을 거쳐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공동창작 시스템을 충분히 오래 경험해 보았기에 장단점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 지망생의 아이템을 내가 대표작가의 개념으로 윤색, 각색하여 공동창작을 하는 형식으로 '베네딕투스'라는 공동창작 법인을 설립하여 여러 작품을 작업했다. <마파도>의 경우 베네딕투스의 이름이 크레딧에 정식으로 올라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인작가의 원래 아이디어를 시나리오화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꼈는데, 가장 큰 것이 산업적 책임이 너무 크더라는 것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경우 워낙 장편으로 가기 때문에 신인작가가 한 권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한 번의 실수나 실패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베네딕투스를 운영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 베네딕투스와 맞물려서 철필방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김대우 작가, <올드보이>를 작업한 황조윤 작가, <주먹이 운다>를 쓴 전철홍 작가,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주식회사 형태로 만든 회사다. 네 명 모두 자신의 작품을 책임지고 써나갈 수 있는 작가들이고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회사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자기 컬러와 장르가 워낙 분명한지라 서로 조언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고 시너지를 내는 과정이 지지부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최종적인 형태로 지금의 회사 '올댓스토리'를 만들게 됐다. 올댓스토리는 기본적으로는 영상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지만, 세상의 모든 스토리가 모였다가 나가는 일종의 게이트의 역할을 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다. 어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썼든 일단 그 이야기가 올댓스토리에 들어오면, 영화가 됐든 소설이 됐든 아니면 출판만화, 그래픽 노블, 웹툰이 됐든 그 스토리에 가장 어울리는 매체를 선정해준다. 길이가 길든 짧든, 국내 산업엔서 소화할 수 있든 아니든 일단 작가가 마음껏 스토리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고 그 뒤에 그에 맞는 매체를 찾는 것이다. 원천 컨텐츠 형태로 만들기 때문에 영화에 비하면 자본이 적게 들어가지만, 절대적인 수치로 봤을 때 적은 자본은 아니다. 만화의 경우 두 권을 제작한다고 했을 때 만화가에게 기본적으로 5백만 원 이상이 투입되고 권수가 늘어나면 비용이 더 늘어난다. 프로젝트 당 천에서 2천만 원 정도가 투자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그 원천 컨텐츠가 마켓에서 어떻게 수용되는가 검증을 받는다. 웹툰이나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대중과의 교감이 어떻게 되나 확인할 수 있다. 영상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은 그 결과를 확인하고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작가에게 가장 좋은 점은,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배경이 어디가 됐든, 시대물이 됐든 SF가 됐든 한계를 두지 않고 일단 마음대로 써나가는 것이다. 또한 기존 시스템에서는 한 작품을 일단 계약했다 해도 그 시나리오가 반드시 영화화될 것이란 보장이 없는 경우가 있다. 영화화가 무산될 경우 시나리오는 공중에 떠버리고, 세상에 발표될 기회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원천 컨텐츠 형태로 제공할 경우 일단 세상에 한번 공개된 상태의 이야기를 영상화하는 것으로, 이는 판권 전체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라이선스를 일정 기간 동안 임대해주는 형태가 된다. 영화화나 드라마화가 무산된다 하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라이선스가 다시 작가와 회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작품을 잘 만들 수 있는 다른 회사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세상과 계속 소통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올댓스토리의 설립취지이다. 내가 접촉한 제작사 등에서는 이런 방식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이 방식은 해외와의 소통에 있어 더 용이하다. 시나리오나 영화의 형태로 거래되는 것은 상대에게 위험부담이 크다. 헐리웃의 작가나 프로듀서들이 가장 환영하는 콘텐츠도 코믹스나 그래픽노블의 형태이지 않은가. 원천 콘텐츠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내보낼 때에도 상당히 용이하다. 마켓을 넓혀가는 일에서도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 젊은 프로듀서들, 이렇게 돌파구를 찾고 있다
안영진 프로듀서
안영진 : 대부분의 선배들은 한국영화 호황기의 혜택을 누린 분들일 것이다. 나를 비롯한 젊은 프로듀서나 작가들은 불황기의 고통을 겪고 있다. 시장 상황이 좋았을 때에는 시나리오가 어떤 종류였든 일단 우호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단히 비타협적이다. 창조력의 완성도보다는 영화가 완성될 수 있는가 아닌가의 조건이 더 중요하다. 예컨대 작가와 감독은 누구이며 프로듀서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패키지의 조건을 보면, 예전엔 분명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들이 지금은 영화화되기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 창조력 있는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는 과정에 있어 구조적 문제가 있음은 물론 동의하지만, 과연 이런 문제를 누가 만들었나 묻는다면 역시 선배들을 탓할 수밖에 없다. 프로듀서가 어떤 사람인가. 감독이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고 영화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투자자가 투자한 돈을 지켜주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과연 선배 프로듀서들이 그 돈을 지켜주었는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본다. 투자된 돈이 회수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자본들이 못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고 이것이 위기상황 아닌가. 상대적으로 젊은 프로듀서들이 위기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가 돌파지점으로 생각한 대안은 크게 세 가지다. 중 첫 번째는 슬림화다. 독립 프로듀서들이 제작사를 갖고있는 경우도 있지만, 원천 콘텐츠든 오리지널 콘텐츠든 처음 시작은 2, 3명의 창작자로 구성된 팀이기 마련이다. 이 팀을 최소한으로 해서 시나리오가 완성되거나 감독-작가-프로듀서의 패키징이 거의 완성됐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독립 프로듀서들은 대체로 지금 제협 선배들의 직원으로 시작하여 10여 년의 시간 동안 프로듀서로 훈련되고 진출한 사람들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해낸 첫 대안이 슬림화다. 두 번째는 창작주체들 간 문제 중 아이템 공개를 꺼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용 문제 때문에 이를 꺼리는 분위기가 기존의 분위기였다면, 새로운 젊은 프로듀서들은 업계 내에서 경쟁자이기도 한 동료 프로듀서들과 서로 아이템을 공개하고 이것이 과연 영화화될 수 있는지, 과연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자 간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 첫 시발점으로 프로듀서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고민했고, 작가들과의 연합조합도 고민하고 있다. 믈론 제협에서 만든 아시아 프로듀서 네트워크(APN)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APN의 경우 랩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 생각한다. 프로듀서 랩은 공격적으로 자국의 프로젝트를 팔기 위한 비즈니스 기능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APN의 경우 친목관계가 더 우선인 것 같다. 새롭게 프로듀서 랩을 만들려 하는 것도 본격적인 비즈니스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세 번째 돌파구는, 기왕 시장이 어렵다면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프로젝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KPIF라는 공개피칭 행사를 준비하고 있고, 내년에도 지속적으로 행사를 이어가려고 한다. 사실 이 행사에서 프로젝트를 공개하는 건 프로듀서만이 아니다. 이번 KPIF 행사에서도 감독과 프로듀서가 함께 패키징 돼 있는 작품들이 많다. 개인, 독립 프로듀서들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이런 노력들을 하고 있다. . 자본이 영화의 질마저 좌우하고 있다
이준동 프로듀서
이준동 : 지금의 상황에 대해 당연히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하고 있다. 그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자의 노력만으로도 안 되는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음을 변명하고 싶다. 한국영화의 위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산업적 위기, 즉 돈이 안 된다는 것과 서사적 위기. 후자가 바로 창조성과 연결될 것이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명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국영화뿐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건 영화의 승률, 즉 BEP(손익분기점)를 넘기는 영화의 비율은 거의 야구와 비슷하다. 10편 중 2, 3편이 흑자가 나서 나머지 7, 8편의 적자를 만회하는 형태다. 작년 한국영화의 타율은 1할이 채 안 됐고 재작년은 2할이 안 됐다. 그 전엔 2, 3할 그 이상도 유지해왔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 전에는 프로듀서의 전문성이 인정됐었다. 영화계에 처음 들어온 자본가들이 프로듀서에게 믿고 맡기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서 자본가들의 자신감이 축적되면서 결정권에 대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됐다. 믿을 만한 프로듀서에게 몇 편을 통으로 투자해주는 패키지 딜을 없애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투자하게 된 것이다. 이것과 타율수는 분명 연관이 있다. 영화 현장에서 오랫동안 영화를 해온 사람들의 판단력을 믿어주지 않는 한, 내적으로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해도 성공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세대의 프로듀서들은 영화를 산업적 관점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수익율을 떨어뜨렸을 수는 있다. 우리 세대들은 예술, 문화적 관점과 산업적 관점 모두를 고려했다. 대표적인 이가 강우석 감독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은 철저하게 대중적인 상업영화를 만들면서도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안 되더라도 '이런 영화가 있어야 한다' 싶은 영화들에도 과감하게 투자했다. 이것이 한국영화의 다양성의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지금 자본은 그렇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수익구조를 못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은 한편으론 타당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다. 정리하면, 영화는 현실을 위로하는 위안거리이기도 하지만 삶을 성찰하는 예술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적 측면으로만 보면 이런 면 때문에 일정한 산업적 성과를 못 낸 부분도 있긴 하지만. . 영화산업, 본질적으로 위험산업이다
김경형 감독
김경형 감독 : 이준동 프로듀서의 말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나는 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철저하게 산업의 측면에서 영화를 고민하는 편인데,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해 보겠다. 첫째, 영화란 대표적인 리스크 산업이다. 그러나 경험상, 우리나라의 영화산업 투자자들은 영화가 리스크 산업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리스크를 '관리'하는 게 아니라 '피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짧아야 2, 3년 후의 시장을 보고 가는 것이고 숙명적으로 리스크 산업일 수밖에 없다면, 어차피 리스크를 안고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리스크를 어떻게 잘 관리해 줄여나갈 것인가가 관건이 된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간 리스크 관리의 노하우를 전혀 쌓아놓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단적으로, 지금도 흥행배우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티켓파워가 명확하게 입증된 배우가 얼마나 있는가?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는 복합적일 텐데, 과연 흥행의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어떻게 분석하고 어떤 교훈을 얻고 있는가? 창작 주체들이 투자자의 손해를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픈 것만 하려는 제멋대로의 사람들은 아니다. 나 역시 시장에서 성공한 감독이길 바란다. 그러나 시장상황에 대해 나보다 더 고수여야 할 사람들이 별로 그렇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한국영화의 수준은 시스템의 수준이다. 투자자의 창조적 역량이란 결국 리스크에 대한 인식과 관리 방법이다. 이것이 좀더 선진화되어야 한다. 둘째, 투자자들은 요즘 시나리오 상태에서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그 이전에는 기획개발비 항목이 있었다. 그런데 돈이 안 벌리는 지금 상황에서 기획개발에 대한 투자 없이 "니들이 시나리오 만들어 와라"라는 식인데, 이건 너무 난폭하다.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창조성이 어떻게 발휘되겠는가. 시나리오는 촬영을 위한 일정한 포메이션이다. 영화계에 돈이 흘러들어올 때는 상장이다 뭐다 자금의 유통이 이상한 모양새를 보이더니 이제는 등을 돌린 채 시나리오를 만들어 와야 투자를 하겠다고 한다. 영화계도 돈이 주인이 돼버렸다. 현장에서 소외감이 극심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일용직 노동자보다도 못한 신세로 여겨질 정도다. 창작주체들이 영화제작의 중심이 되는 구조가 가능하도록 가야 한다. 한국 영화산업이 양적인 성장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혔다면, 이제는 질적 도약을 요구하는 상황인 것이다. 영화란 사실 단순한 공정이다. 워낙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복잡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열심히 찍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 주체 중심, 특히 프로듀서 중심으로 돌려놔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연관해 한국영화에서 프로듀서란 존재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이준동 프로듀서는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제작사 대표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프로듀서와 제작자는 개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제작자는 경영자적 책임이 따르지 않는가. 이건 제작자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프로듀서와 제작사의 역할의 차이와 수준의 차이 등에 대해서도 고민 필요하다. 한국영화의 기본 토대는 굉장히 좋다는 얘기가 많은데 이게 왜 이 모양이 됐는가. 그것은 시스템의 문제다. 지난 10년간 한국영화를 이만큼 키워온 게 우리들인 만큼 우리들 스스로의 개인적인 창조적 역량은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달라진 만큼 후배들은 우리보다 더 뛰어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다시 자극하고 키워낼 것인가. 한국영화에 있어 앞으로 필요한 창조적 역량을 키우는 역할은 결국 돈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다고 본다. . 김희재 :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창조성이 고 백남준 선생식의 창조성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산업 안에서 책임을 지는 창조성이라 할 수 있다. 창조성을 책임지거나 요구하는 사람들 양쪽 다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양측 다 일관된 패러다임을 갖지 못한 상태라 창조성이 정립되지 못하거나 중간에 사장되는 게 아닐까. 작가 입장에서, 혹은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중인 작가를 만나며 느낀 것을 보면, 모듈레이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양측의 언어가 다르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하나의 시나리오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플롯의 문제일 수도, 대사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장점은 시장으로 최대한 소통시키고 단점은 보완하는 게 작가의 창조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투자자들은 "약해" "2% 부족하다" 식으로 말한다. 어떤 점이 약하고 부족한지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작가가 가진 빛나는 창의력이 사장돼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매체 환경이 굉장히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단말기 중심이냐 망 소유자 중심이냐에 따라 그 안에 소통되는 콘텐츠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에 담아내는 호흡의 길이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매체에 대해, 매체의 컨텐츠의 방향에 대해 디렉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가 이것을 모두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매체를 연구하는 사람과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사이에 소통이 원활해지기 위해서는 각각의 파트의 언어를 익히고 중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한국은 보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이 태어날 수 있는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갖고 있다. 이 보석을 잘 발굴해 갈고닦아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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