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정치는 어디로 진화할 것인가

[기고] 촛불의 아름다움과 대안의 삶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에 반대해 시작된 촛불집회가 한달을 넘겼다. 10대 소녀와 젊은 어머니들이 불을 붙였으며, 20대들이 동참했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386들이 뒤따라 운동화 끈을 묶고 거리로 나서면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촛불집회는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며 '신보수의 시대'를 예단했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항해 등장한 2008년 '거리의 정치'는 제도정치로 흡수되고 해소될 여지가 현재까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다른 고민을 우리사회에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촛불집회의 끝은 어디인가. 어떤 결말이 내려져야 하는가.

대안지식연구회 하승우 연구위원(한양대 제3섹터 연구교수)는 "거리로 '뛰쳐나온' 정치적 잠재력은 이런 일상의 장을 변화시켜야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며 "지금 촛불행진이라는 그릇이 담아야 할 내용은 일상의 장과 욕망구조를 변화시킬 전략"이라고 문제제기했다. 그는 "'촛불의 정치'가 지배권력의 '분할의 통치'에 맞서는 '공생의 정치'로 발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대안지식연구회에서 주 1회 내는 정치사회비평이다. 대안지식연구회는 이 글을 포함해 촛불집회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3편의 칼럼을 발표했다. 편집자

촛불문화제, 촛불집회, 촛불시위, 촛불행진, 이제 촛불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띠고 있다. 으스름한 저녁시간을 지나 깊은 밤, 해 뜨는 새벽으로 이어지는 촛불의 시간은 한국의 정치미래를 살아있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정당이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아무런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시민들의 행진은 그 답이 드러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능한 제도정치의 종언을 선언하는 삶정치의 출현을 선언하는 주장(이명원)은 현실의 맥을 정확히 짚었다.
▲ ⓒ프레시안

이번 촛불행진은 제도정치의 무능함만이 아니라 권력의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고, 그와 함께 시민저항의 '아름다움' 역시 증명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비폭력'이라는 말로 한정될 수 없다. 이번 촛불의 비폭력은 단순히 공격적인 말이나 행동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음만을 뜻하지 않았다. 비폭력을 외치는 목소리는 버스와 물대포, 소화기라는 물리적인 폭력에 맞서 저지되었지만 그 마음의 힘은 그런 장애를 넘어 넓게 퍼지고 있다. 그래서 경찰의 폭력이 거세질수록 촛불행진에 동참하려는 시민들의 마음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이런 아름다움 속에서 정부권력의 추함이 분명해지고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의 발언은 그 추한 악취를 멀리 퍼뜨리고 있다. 애초에 정부라는 것이 소수의 이득을 위해 다수를 억압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폭력적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의 폭력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철저히 짓밟고 묵살하겠다는 자세이기 때문에 '노골적인 폭력'이라 얘기할 수 있다. 누가 추한 것들과 손을 맞잡거나 그것을 비호하려 할까?

이제 시민들의 저항은 그 권력의 추함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확산되고 있다. 행진을 가로막는 그 지긋지긋한 경찰버스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의거해 전 민중의 힘으로 '견인'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라는 불법주차 딱지가 붙는다. 폭력을 행사하는 무시무시한 경찰이 마이크를 잡거나 버스에 오르면 "개인기", "노래해", "춤춰라"며 그들을 머쓱하게 만든다. 이런 촛불의 '유머'는 저항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이젠 정부가 사안을 조작하기도 어렵다. 사실 걱정을 많이 했다. 80년 광주가 87년 6월 항쟁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 승리는 91년의 정원식 총리 폭행(?)사건, 유서 대필 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작사건을 불러왔다(비록 무능한 권력이지만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다시 그런 조작이 시도되지 않을까? 실제로 배후세력을 운운하며 그런 시도가 있었지만 시민들의 손에 들린 핸드폰과 디카, 캠코더는 그런 걱정을 깔끔히 씻어 줬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시위현장의 속보는 조작은커녕 행진에 더 많은 시민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그 누구도 쉽게 장담하지 못했던 조.중.동의 변화까지 이뤄내고 있다. 촛불의 '속도'는 조작의 속도를 능가했다.

두 가지 과정만 남았다

이제 시민의 아름다운 저항은 두 가지 과정만 남겨놓고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승리의 경험'이다. 지금 정부가 여러 가지 화해와 타협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 경험을 빼앗기 위해서이다. 한번 싸워서 이겨본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 않고 다음의 승리를 가져올 자신감을 가진다. 이 경험만 가질 수 있다면 촛불행진은 쇠고기를 넘어 FTA, 대운하, 민영화, 비정규직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승리의 쾌감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덮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김원 연구위원(촛불은 계속 타오를 것인가?)은 대중의 역동성 속에 감춰진 민족주의와 힘의 논리를 지적하며, 과연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는 경쟁, 신분상승의 가치를 반성할 수 있을지를 지적했다. 나는 이 지적에 공감한다. 무엇이 우리를 지금과 같은 끔찍한 상황으로 몰고 왔는지를 곰곰이 돌이켜보아야 한다.

공생의 정치와 대안의 삶

거리는 뜨겁게 달궈져 있지만 일상의 장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다. 학교는 아이들을 가두며 '선생님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끔찍한 멘트로 아이들을 길들이려 하고 있다. 기륭전자는 1000일, KTX여승무원은 800일, 이랜드 노동자들은 300일을 넘기며 싸우고 있지만, 자본은 일터를 꽁꽁 닫고 있다. 경쟁과 사교육시장을 부흥시키는 가족주의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거리로 '뛰쳐나온' 정치적 잠재력은 이런 일상의 장을 변화시켜야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촛불 속에서 사람들의 욕망이 자연스레 진화할 수 있을까? 나는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표현에 섣불리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욕망구조가 깨지지 않는 건 사람들 개인의 탓이기도 하지만 그 욕망구조 외에 아무런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체제의 공고화라는 얘기는 공허할 뿐이다. 정당체제의 공고화가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이런 일상의 장이나 욕망구조를 변화시키리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런 정당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정당을 만드는 과정과 촛불행진은 구분되어야 한다. 지금 촛불행진이라는 그릇이 담아야 할 내용은 일상의 장과 욕망구조를 변화시킬 전략이다. 그리고 그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은 각자가 자신의 얘기를 건네며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 마당'이다.

다행히 촛불행진에서 그런 이야기 마당이 이미 조금씩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 '공생의 정치'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사실 쇠고기, 한미FTA, 대운하, 민영화 등은 각기 다른 내용처럼 보이지만 분리되지 않았다. 그것은 '경제적 이윤'이라는 틀로 묶여 있다. 그런 경제적 이윤의 논리가 쇠고기를 수입하고 FTA를 맺으며 대운하를 파고 민영화와 무한경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공생의 정치는 그 근본에 놓인 이윤의 논리를 공격하는 유효한 전략이다. 그리고 언제나 권력은 사람들을 서로 찢어 놓으며 지배하려 드는데, 공생의 정치는 '분할통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전술이다.

이미 촛불집회 내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런 잠재력이 잘 자라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한다. 지금 당장 촛불행진에 관해 걱정하거나 무조건 낙관할 필요가 없다. 그 행진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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