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투표제 - 지역정당 깨는 계기 돼야

크로스보팅의 조건과 각국 사례

국회의원이 원내에서 하는 표결은 정당투표와 자유투표(또는 교차투표)로 구분될 수 있다. 정당투표(party voting)란 소속정당의 당론에 따라 투표하는 것이며, 자유투표(free voting)란 소속정당의 당론에 구속되지 않고 개인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하는 것이다. 자유투표의 결과 표결은 정당의 균열을 교차하면서 이루어지게 되며, 이 점에서 자유투표를 교차투표(크로스보팅, cross-voting)라고 한다.

이 두 가지 표결 행태 중 우리 국회에서는 정당투표가 지배적이며, 그 결과 각 정당은 국회에서 높은 정당단합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당의 이러한 높은 단합도는, 서구 선진 민주주의 국가처럼 당의 정책이나 이념에 대한 의원들의 자발적 동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종종 외적 강제에 기초한 정당기율의 결과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심지어 당론에 반해 소신에 따라 투표한 의원이 제명당한 사례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정당체제가 지역주의 정당체제이어서, 한 정당 내에도 이념적, 정책적으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당의 이념적, 정책적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원내에서 당의 단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동의만으로 부족하여 외적 제재가 동원되고, 그것이 의원들의 자율성이나 의회의 자율성을 심하게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 국회에서는 정당기율에 대항하는 자유투표가 의회정치의 선진화나 정상화를 위한 개혁방안의 하나로서, 또한 1인지배적 정당구조에 대항하여 당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 현실을 살펴볼 때, 자유투표(크로스보팅)의 이러한 의미는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크로스보팅 무조건 선호는 위험**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즉 정당투표의 원래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 크로스보팅의 정착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자유투표는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의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정당투표를 보완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크로스보팅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정당정치’와 ‘책임정치’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도 정당정치는 책임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이다. 선거에서 정당이 정강정책을 제시하고 유권자로부터 선택을 받으며, 집권 이후 이를 집행하고 그 결과에 대해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연속적 과정을 통해서, 국민에 대한 권력의 책임성은 보장된다.

이 경우 정당이 원내에서 자신의 정책을 입법화하기 위해 단결하는 것은 책임정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또한 원내 정당의 결속력은 생산적이고 책임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만일 정당의 결속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내에서 정당은 개별적 의원들로 분산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의회정치과정에서 일관성 있고 책임 있는 정책의 입안과 산출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흔히 크로스보팅이 일상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미국의 경우도, 정당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원내 균열라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국회의 개혁과 관련한 보다 중요한 과제는, 정당투표의 원래 의미를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크로스보팅 활성화, 정당체제 개편 계기되어야**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념과 정책에 기반한 정당체제의 확립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정당들은 이념문제, 안보문제를 비롯하여 복지, 환경, 노동 등 여러 영역에서 상당한 당내 이견을 노출하고 있다. 지역정당체제가 초래한 이러한 문제점을 방치한 채 자유투표만을 주창하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우를 범할 위험이 있다.

우리 국회에서 크로스보팅이 보다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슈 영역에 따라 정당을 뛰어넘는 표결연합이 형성되고 그것이 현재의 지역정당체제를 이념과 정책에 기반한 정당체제로 개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즉 자유투표는, 이를 통한 원내 표결연합의 변화가 정당체제의 변화, 나아가 유권자-정당 결속체제의 변화까지를 유발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개편을 통해 정당의 이념적, 정책적 동질성과 정체성이 확립될 때 정당투표는 그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될 것이고, 비로소 책임정당정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당투표의 의미 회복을 전제로 하여, 자유투표의 부분적 정착이 고려되어야 한다. 정당의 구속력이 지나칠 경우 의회정치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보듯이, 의원은 당 지도부가 결정한 방향대로 정책을 합법화하기에 급급하게 되고, 그 결과 의회의 자율성이 마비되어 의회와 행정부간의 견제와 균형은 달성되기 어렵게 된다. 또한 원외에서 발생한 정당간의 대결이 그대로 원내로 반영됨으로써 국회 기능의 마비가 초래될 수 있다. 자유투표는 이러한 문제점을 치유하는 방안이 된다. 즉 그것은 원내에서 여야간의 극한대립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또한 당 지도부의 노선에 대한 평의원들의 비판을 가능하게 하여 당내 민주화를 가져오는 수단이 되며, 지나치게 여야대립 위주로 전개되는 의회정치를 보다 다원화시킴으로써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크로스보팅은 대통령제의 원활한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될 수도 있다. 여대야소 상황에서는 의회의 대행정부 견제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며,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의회와 행정부간 갈등을 완화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크로스보팅은 미국 대통령제의 성공적 운영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고 있다.

***정당민주화, 의회정치 활성화와 함께 발전**

그런데 흔히 오해하듯이 크로스보팅은 의회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원들의 표결행태에 관한 문제로서, 정당이 민주화되고 원내권력이 민주화될 때 그 결과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회에서 크로스보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천과정의 민주화, 선거운동 자원 및 재정의 분권화 등을 통해 당 지도부의 권력독점이 지양되어야 한다. 또한 의회 내 주요 직위 및 위원회 배정권을 당 지도부가 장악하고 있는 현재의 중앙집권적 권력구조 역시 보다 분권화, 민주화되어야 한다.

의회 내에서는 상임위원회의 자율성을 높이는 한편, 정당의 경계를 뛰어 넘어 공통의 이해와 관심사를 기반으로 하는 원내정책연구모임 등이 보다 활성화되어야 한다.

정당제도적 차원의 방안도 중요하다. 정당으로서는 사안에 따라 자유투표를 활용하는 한편, 정당투표를 요구하는 경우에도 사안에 따라 당론 구속의 정도를 달리 함으로써 부분적인 자율성의 여지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 당론을 정하는 경우에는 철저한 민주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며, 당론 위반에 대한 제재 역시 영국, 독일의 예와 같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주요국 의회의 크로스보팅 실태 및 촉진요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의 사례**

미국의 경우 소속 정당 외에도 개인적 정책 선호, 지역구의 이해관계, 이념적 차이 등 다양한 요인이 의원의 표결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결과 안건에 따라 정당투표와 크로스보팅이 혼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 의회에서 크로스보팅을 촉진시킨 제도적 요인으로는 정당의 민주화 및 의회의 분권화를 들 수 있다.

먼저 정당의 공천과정을 민주화하기 위해 예비선거제도(primaries)를 도입한 결과 정당의 민주화가 촉진되었고, 이에 따라 원내 표결에서 당론구속의 약화 및 크로스보팅 등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도 20세기 초까지 의회 지도부(의장)의 권한이 막강하여 평의원은 지도부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정당투표 비율이 거의 90%에 육박하였었다.

그러나 2차전 이후 그리고 19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거듭된 의회개혁 결과 원내 권력이 위원회, 소위원회로 분산되었고, 의회 내에 초당적인 정책집단이 형성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그 결과 크로스보팅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되어 정당투표 비율은 40% 대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원내 정당의 응집력이 약하기 때문에 책임정당정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2. 영국의 사례**

영국은 내각책임제 권력구조, 이념에 따라 양분된 정당체제 등의 요인이 작용한 결과 서구의회 중에서 정당의 단합도와 기율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당내에서 지도부 노선에 반대하는 평의원의 이탈표가 증가하고 있으며, 크로스보팅도 그 빈도와 영향력 면에서 증대하고 있다.

영국에서 정당기율은 여전히 강력한 편이지만, 당론에 대한 구속에는 몇 가지 제약이 존재한다.

첫째 모든 의안에 대해 당론 구속이 같은 비중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원내 총무단에서는 매주 소속의원들에게 당 노선에 대한 고지문(written whip)을 회람시키는데, 안건마다 밑줄을 그은 횟수를 달리하여(1-3번) 당 노선에 대한 구속력의 정도를 달리 표시한다.

둘째, 당론을 어겼을 경우의 제재에 한계가 존재한다. 보수당의 경우 당론 위반자에 대한 처벌규정은 없지만, 당내 질서유지의 관행과 강력한 지도력에 의해 해결하고 있다. 노동당의 경우, 의회 노동당규약에서 당원들에게 당 대회 결정 수락의무를 부여하고 있으며, 당 규율에 대한 중대한 위반 사례는 의회 노동당대회의 결정에 따라 처분한다.

셋째,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당론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 예외가 인정된다.

넷째, 일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당론을 해제하여 자유투표를 허용하고 있다. 양심, 종교, 의원입법안(사법안), 의원의 진퇴에 관한 사항, 의회개혁 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자유투표를 허용하고 있다.

***3. 독일의 사례**

내각책임제 국가로서 영국보다는 덜 강력하지만 역시 높은 수준의 정당 단합도가 유지되고 있다.

한편 독일의 경우 전후 민주개혁과정에서 기본법과 정당법 등을 통해 정당의 민주적 운영을 실정법의 차원에서 강하게 규정한 바 있다. 독일 기본법은 “의원은 국민 전체의 대표자이고 위임과 지시에 구속되지 않으며 그 양심에 따를 뿐이다”(제38조)라고 하여 의원의 자유위임관계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당론을 통한 의원통제 금지 및 양심에 따른 표결’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당법에서도 공천을 비롯한 당 운영이 민주적이어야 함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

당 차원에서도 지나친 당론 구속을 금하고 있다. 예컨대, 기독교민주동맹은 1971년도 원내교섭단체 규칙 개정을 통해 “의회에 있어서 표결은 자유로 한다. 원내교섭단체에 의한 강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여 표결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당론 위반에 대한 정당 지도부의 자의적 제재를 방지하고 있다. 독일정당은 정당법 제14조의 규정에 근거하여 당내에 중재재판소를 설치하여 당론 위반에 대한 제재를 그 결정에 일임하고 있으며, 당의 중재재판소는 3심제를 택하여 부당한 제재를 방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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