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셸던 월린
소크라테스적 지식인, 셸던 월린
마침내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좋을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강정인·공진성·김용찬·박동천·이지윤·장동진·홍태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증보판이 우리말로 완역되었다. 1960년 <정치와 비전>이 세상에 처음 나온 이후 44년이 지난 2004년, 월린은 달라진 시대를 반영해 제2부를 추가하며 증보판을 냈다. 이 증보판은 40여 년 전 월린이 지나왔던 1960년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으로, 소위 "탈근대"라는 시각으로 우리 시대의 정치변화를 정치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 <정치와 비전 3>(셸던 월린 지음, 강정인·김용찬·박동천·이지윤·장동진·홍태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월린은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이론가이자 민주주의자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민주주의를 투표가 아닌 "참여"로 이해하는 월린은 수족관에나 틀어 박혀 있어야 할 정치이론으로 민주주의를 분석하고 설명하고 실천하는 대표적인 사상가다. 그의 삶의 맥락에서 분석해 본다면, 월린은 정치실천으로 유명한 오벌린 대학 학부를 거쳤고, 미국 시민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1950~70년대를 서부 학생운동의 중심이던 버클리 대학교에서 보냈다. 그가 버클리를 떠난 이유도 학내분규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프린스턴 시절에도 월린은 정치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월린이야말로 앎이 실천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지이고 실천으로 옮겨질 때야 앎이 완성된다는 소크라테스적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탈근대적 권력(힘)으로의 전환이라고?
이런 월린이 쓴 <정치와 비전>은 특이한 구조를 지닌 저서다. 대부분의 사상사는 인물 중심으로 전개되거나 시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데 반해 <정치와 비전>은 "인물, 시대, 개념"을 넘나드는, 예를 들어 탈근대를 설명하기 위해 "맑스와 니체,"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힘(권력)과 형식"을 넘나드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를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내는 힘을 보면 월린이 얼마나 탁월한 학자인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월린은 "인물, 시대, 개념"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그가 부제에 붙인 대로 "서구정치사상에서 지속과 혁신"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분석하고 설명한다.
특히 원문의 제2부(Part Two), 다시 말해 우리말 번역본의 제3부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서 월린은 "근대적 힘에서 탈근대적 힘"으로의 전환을 다루고 있다(역자들은 power를 "권력"이란 말 대신 "힘"으로 옮겨놓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론 이 말이 다소 모호하게 들린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권력"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post-modern"이 시간적으로는 근대 '이후'에 오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근대의 '밖'으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modern"한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겐 이런 '이후'와 '밖'에서 일어나는 '힘의 전환'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 얼핏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서구적인 "근대성"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고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 사고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도 (근대의 탄생이 그곳이기에) 필연적으로 서구적인 근대의 이해에서 출발하는 월린의 탈근대로의 전환에 분석은 별달리 흥미로울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지구화'라는 네트워크의 팽창 속에 얽혀 들고 있다. 그 네트워크의 확장을 서구중심주의로 이해하는 일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필자는 솔직하게 유효하지 않다고 믿는다), 월린의 근대로부터 탈근대로의 전환에 대한 분석과 이야기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과 고민거리를 찾을 수 있다.
전도된 전체주의 - 민주주의의 상실
| ▲ <정치와 비전 2>(셸던 월린 지음, 강정인·이지윤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근대국가는 관료제를 통한 권력의 집중을 통해 성립됐다. 근대국가의 성장은 비대해진 관료주의를 뜻했고, 더 많은 민주주의는 더 많은 관료주의를 요구한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기도 했다. 이런 딜레마는 관료화를 통한 통치로서의 통제 강화와 더불어 이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저항들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자유주의적 저항은 인종, 여성, 환경 등의 다원적 영역에서 차별적인 관행을 폐지하려는 시민적 노력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런 근대국가의 권력 집중화에 대한 다원적 저항을 통한 권력 분산화는 역설적으로 효과적인 다수를 형성할 수 없게 만들어 결과적으로는 정부의 통치가 용이하게 되어 버린 상황을 만들어냈다. 다원적 저항이 다수의 저항이 불가능한 새로운, 아니 전도된 전체주의를 만들어내 버린 것이다.
탈근대 권력의 표상, 초강대국
더욱이 네트워크의 팽창과 더불어 탈근대 권력은 기존의 "거추장스러운 관료제를 '더욱 날렵한' 구조로 대체하려는 협력적 시도"를 감행했고, 월린은 초강대국이야말로 이런 탈근대권력을 구현하고자 출현한 표상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월린은 '제국'과 '정복'을 벗어나 권력의 '압도'와 '우위'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논리를 자원배분의 합리적 구조로 이해하는 행위자로서, 탈근대적 초강대국을 바라본다. 날렵한 초강대국은 권력이 지닌 기존의 체계를 활용하고 단지 필요할 때만 새로운 체계를 도입하며 지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다. 더불어 월린은, 지구화라는 네트워크의 팽창 속에 탈근대 권력이 기업과 공공연하게 제휴하게 됨으로써 주어진 영토 내에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이라는 국가의 전통적인 중앙집중화의 특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한편으로 그 대립물인 테러리즘에 반복적으로 시험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탈근대권력의 기업과의 제휴는 탈근대국가들에서 소수 계급과 다수 계급(예를 들어, 부자와 빈자)의 사이에 존재하는 부와 권력의 격차를 넓혀놓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전통적인 국민국가에서 나타나던 "다원성으로부터 통일성으로"의 현상은 "통일성으로부터 다원성"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마르크스, 상실한 데모스를 부활시키려 하다
월린은 이런 탈근대 권력으로의 전환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경제적 권력과 문화적 권력 두 측면으로 나누어 조명한다. 그리고 각 측면을 조명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니체라는 두 탈근대적 인물을 끌어들인다.
월린은 마르크스를, 자본주의의 (파괴자가 아닌) 계승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론적으로 구성하여 근대가 상실한 민주주의의 주체인 '데모스'를 부활시킨 이로 그려낸다. 월린은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적 측면의 간과에 대한 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르크스가 어떻게 노동자를 정치적 행위자로 그려냈는지 <1844년 경제철학수고>로부터 시작해 끄집어낸다. 월린의 주장을 아주 간략히 요약해 본다면, 마르크스는 기존의 권력을 국가집중화에서 탈피해 노동자들에게 옮겨놓으려 했다.
월린은 이런 자신의 해석 혹은 주장이 마르크스가 내세운 역사법칙의 결정론과 충돌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월린은 이를 마르크스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려낸다). 월린은, 역사법칙의 결정론의 강조와 (구조적으로 이루어질 혁명의 달성에서)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을 강조한 이율배반의 긴장을 마르크스가 "인간이야말로 변화의 과정을 이끄는 결정적인 행위자라고,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고,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인간 자신이 선택하는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고 말함으로써 화해할 수 없는 두 주장을 간명하고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정치화'의 표현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들어간 데모스들이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내부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대립하며 권력이 또 다시 교육받은 특권 소수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바쿠닌의 비판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박을 조금은 힘없이 그려내고 있는 부분에선, 월린이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의 한계를 긋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마르크스가 상부구조(이데올로기)를 움직이는 자본가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짤막하게 지적하며 오히려 그 자본가들이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실상 제거하여 자본주의를 실현시켰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니체 - 약자가 아닌 강자에게 권력을
| ▲ <정치와 비전 1>(셸던 월린 지음, 강정인·이지윤·공진성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니체는 자유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개인들의 자율성, 그 (실질적이 아닌) 잠재적 능력의 동일성을 단칼에 거부한 사상가다. 더불어 전통적인 선과 악, 강자와 약자의 도덕적 구분을 근대라는 쓰레기통 속에 넣어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과학기술과 생산력 같은 근대의 산물 또한 폐기장에 묻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인종의 순수성을 찬양했다. 이런 니체에게 정의가 존재할 리 없고 역사의 종착지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월린이 탈근대적인 인물로 내세운 마르크스조차 존재할 이유가 없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사는 인간을 니체는 그려낸다.
월린은 혐오스런 차별주의자로서의 니체가 아니라, 생각의 반란자로서 니체를 읽기를 당부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야말로 도덕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구절에서 유대인에 집중하는 대신, "도덕에서 일어난 반란"에 집중해 보자는 식의 말로 선택적인 기억을 완곡하게 당부한다. 이를 통해, 영원한 혼돈을 세계의 총체적 성격에 불어 넣어 파괴의 동학을 그려낸 이로 니체를 보는 것이다.
파괴의 동학 속에서 주인공은 그런 파괴를 주저하지 않을 잔인한 강건함을 지닌 이들이다. 이런 소수의 인물들이야말로 "한 사회가 그 존재를 보전하기 위해 제도화하고 강요하는 도덕적 정치적 가치와 진리 개념을 지칭"하는 문화를 이끌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힘을 향한 의지"다. 이를 위해 필요한 존재는 그 힘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지 계몽된 인간이 아니다. 모든 고귀한 문화가 야만에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니체가 찬양하는 것은 권력과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실행하는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을 향한 공격인 "혁명적 동학"이 아니다. 오히려 니체의 공격 대상은 유약하고 취약한 자들이다. 노동자, 병약한 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주주의자, 여성, 기독교인들과 같이 고통과 연민으로 대변되는 자들이다. 이들은 남에게 동정 따위를 구걸하여 강자들을 유약하게 만드는 암적 요소일 뿐이다. 니체는 "전체주의의 동학"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 동학은 단순히 억압이 아니다. 니체는 새롭게 자신을 생성하라고, 끊임없이 변화하라고 외친다. 그러기 위해서 '파괴'는 불가피한 첫걸음이다. 그 파괴는 잔인한 강건함을 지닌 이들이 시작하는 문화전쟁의 시작이다.
니체가 보기에 진정한 잔인한 강건함을 지닌 이들이 정치가들이 아닌 철학자들, 사유하는 인간인 것은 의외다. 그러나 니체의 변명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행위는 구체적 육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할 뿐이지만, 사유는 인간에게 의미를 지니는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결별하다
월린은 이런 [아렌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철학자들의 19세기의 전통적 사유를 향한 반란을 거쳐 20세기 주인공의 역할을 맡은 자유주의와 논쟁한다. 특히 1930년대 '전체주의와의 투쟁'과 '자본주의 길들이기'란 임무를 부여받고 자본주의의 양심의 역할을 했던 자유주의가, 어떻게 학문적 중도주의에 빠져들며 그 능력을 상실해 갔는지를 주목하는 부분은 눈여겨 볼만한다.
월린은 포퍼와 롤스가 "권력의 공유와 적극적인 시민이라는 민주적 이상을 상대적으로 무시"한 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분열이 조성"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기술문명의 이점을 알면서도 나치정권이 이를 활용한데 좌절한 포퍼가 그 현실화를 망설였고, 롤스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에 도덕원리로 대응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화에 성공했지만 근대권력의 동학을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다수가 공유한 권력이 열린사회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포퍼의 두려움을 고려해보고, 정치를 안타고니즘(적과 동지의 구분) 혹은 애고니즘(우리와 타자의 구분)으로 보지 않았던 롤스를 생각해본다면, 월린의 비판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월린이 이 양자보다 더 나은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상가가 듀이라는 것은 뜻밖으로 보인다. 그러나 듀이가 전체주의를 향한 투쟁, 자본주의 길들이기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에 대한 활성화로 무장시키려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쉽사리 이해가 가는 "민주주의가 있는 자유주의로의 귀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토대는 다수의 필요와 열망이다
<정치와 비전> 증보판은 탈근대적 권력의 등장과 함께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사실 궁지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이론만이 아니다. 월린이 탈근대적 권력의 표상이라 부르는 초강대국들은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잃어버린 데모스의 부활이라는 마르크스의 꿈을 정치에서 지워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니체가 내세운 강자들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합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등 돌린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월린은 이런 상황을 극복할 대안을 내놓고 있을까? 진단만 있고 대안이 없다는 문제는 <정치와 비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월린은, 우리가 구성해야 할 대안의 방향이 "민주주의를 다수의 필요와 열망에 관한 기초적인 정치로 재개념화하는 것"이라는 점만은 명백히 밝히고 있다. 탈근대적 전환 과정에서 더욱 그 흔적이 사라져버린 데모스를 찾고 재구성하는 일이 정치의 임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제임스 밀러 지음, 김만권 옮김,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
논문 주제를 정하던 무렵, 나의 스승은 미국의 정치 따위, 미국의 정치사상 따위, 서양의 정치사상 따위 상관하지 말고 내가 발붙이고 살아갈 곳, 한반도에서 학자로서 지식인으로 마주할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 주제를 학위논문으로 쓰라 권했다. 내게 한반도의 두 정치적 적들, 남과 북의 화해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하게 만들었던 스승은, 내게 학위를 주던 날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쥐며 말했다.
"이제 나의 동료가 된 걸 환영하네. 근데 이제 우리는 곧 모든 것을 물려주고 다 죽어야 할 세대네. 이제 우리가 쥔 것에 대한 욕심은 없네. 앞으로는 자네들 세대의 시대일세. 돌아가서 할 일을 하게. 두려운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게."
그 말을 듣고 스승의 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나는, 귀국한지 세 달 만에 무엇이 두려워서인지 스스로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살아가고 있다. 시인 김광규는 "혁명이 두려워져…살기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세대를 향해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두 차례 물었다. 혁명을 바라지도 꿈꾸지도 않는 나는, 뭐가 두려워서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가?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 당당함의 차이가 누군가는 <정치와 비전>을 쓸 수 있고, 누군가는 <정치와 비전>을 읽고 "민주정치의 재활성화"라는 바람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마는 차이인 것일까?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번역서를 대할 때마다 느끼는 역자들의 노고에 대한 무관심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번역을 하느니 책을 두 권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사실상 원문의 의미를 지키며 새롭게 책을 쓰는 일이다. 그게 <정치와 비전>과 같은 책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힘들고 어려운 책을 우리말로 아주 즐겁게 읽었다. 그 어떤 번역서에라도 남는 소소한 아쉬움을 뒤로 한다면 참가한 역자분들의 역량과 경력에 맞는 훌륭한 번역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이 어려운 책을 우리말로 옮겨 새롭게 읽는 기쁨을 주신 역자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독자 여러분도 즐겨보길 권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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