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미술의 동생? 식민지?!

[프레시안 books] 알렉스 콜스가 엮은 <디자인과 미술>

편집자가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는 투명하다. 2005년 단행본 <디자인아트 DesignArt>(한국어판 김상규 옮김, 열화당 펴냄, 2006)를 낸 후 전작이 내놓은 다소 엉성한 개념과 예시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는 의지 위에 이 책은 올라서 있다. 이는 워크룸 프레스에서 한국어판을 출간하며 진행해 책에 수록한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큰형에게 욕을 먹어 움찔거리는 둘째처럼, 알렉스 콜스(Alex Coles)는 디자인과 미술에 관한 두 번째 책 <디자인과 미술>(2007, 한국어판 장문정·박활성 옮김, 워크룸 프레스 펴냄, 2013)에서 기존 텍스트들을 수집한다.

▲ <디자인과 미술 : 1945년 이후의 관계와 실천>(알렉스 콜스 엮음, 장문정·박활성 옮김, 워크룸 프레스 펴냄). ⓒ워크룸 프레스
수록된 텍스트들을 책의 제목인 '디자인과 미술'에 관한 글들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앤디 워홀이 1967년 그레첸 버그와 진행한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를 보면 "나는 세상에 매료되어 있다. 무엇이든지 너무 좋다"고 말하는 냉담한 인터뷰가 있다. 워홀의 육성 안에 디자인과 미술의 분절이나 경계는 없다. 그러나 "팝아트는 평범한 대상들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면서 외부를 취해서 내부에 그것을 두거나 내부를 취해서 외부에 두는 것이다"라는 워홀의 말을 인용하자면, 디자인과 미술은 서로의 내부 또는 외부가 된다고 말해볼 수 있다.

한 저자의 충분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적지만 여러 목소리가 교차한다는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목소리들은 디자인과 미술 사이에 놓인 'and'를 해석하지 않고 경험하는 제작자의 입장에 가깝다. 디자이너 조지 넬슨, 폴 랜드, 디터 람스와 미술의 자장 안에서 활동한 도널드 저드, 호르헤 파르도, 슈퍼 플렉스, 리르크리트 티라바지나의 에세이와 인터뷰는 디자인과 미술에 관한 한 잠언이 되기에는 길고, 통용 가능한 해설서가 되기에는 주관적이다. 제3자의 글이 아닌 제작자의 글은 실행 앞뒤에 놓인 아이디어의 원재료라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반면 이 원석 사이에서 디자인과 미술 곳곳에 병치된 해석들을 발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어떤 페이지를 첫 장과 마지막 장으로 읽어야 할까? 어디로 들어가서 어떤 외부로 나와야 하느냐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처리해야 하는 게임과 같다.

원서에 수록된 마지막 장은 프랑스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이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데이비드 블래미와 벌인 토론이었다. "우리의 전시를 상업적 미술 세계가 돈을 벌기 위한 명목으로 디자인을 식민화하는 과정의 연장선에서 협소하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정말 애석한 일이며 일종의 실패였다"고 답하는 M/M은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결코 실패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어판에는 알렉스 콜스와 워크룸 프레스가 진행한 인터뷰가 추가되어 있다. 2013년 한국의 미술계와 디자인이 펼쳐놓은 몇 단서들을 배경으로 책을 시의적절하게 읽으려는 시도는 콜스의 문제의식을 뛰어넘는 별개의 장을 이룬다.

콜스가 답변할 재간이 없어 보이는, 그러나 유효한 의문을 던진 질문자의 말과 같이 "한국도 2000년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디자인 혹은 미술'을 필두로 디자인과 미술의 접점을 다루는 전시, 혹은 움직임은 활발"해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쓰여야 할 다른 책의 첫 장을 보는 기분으로 나는 <디자인과 미술>의 한국어판을 읽는다.

<디자인과 미술>은 전작 <디자인아트>를 향해 알렉스 콜스가 받은 질문 자체를 거울처럼 반사한다. 릭 포이너는 2005년 <디자인아트>가 출간된 직후 (NO.23, May 2005) 지에 꽤 신랄한 비평을 실었는데 핵심은 "콜스가 취한 방식은 미술과 디자인 둘의 관계에 있어 미술의 우위를 확고하게 해주는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이 담긴 릭 포이너의 글 '미술의 동생'이 비단 디자인 비평가의 앙탈처럼 들리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기능과 비전이라는 본질적인 분리로 돌아가 1960년대 이래 미술이 미술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품었던 의심과 여기서 파생된 "디자인과 장식은 얄팍하고 얼빠진 것"이라는 생각을 직시한다는 점이 그렇다. 둘째로는 다소 단순하지만 명쾌한 입장에서 기인한다. "디자인은 미술보다 현 시대의 시각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다는 전제 아래 '비평적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던 앤드 라비 등을 사례로 들며 예술적 판타지에 국한하지 않는 "디자인 사고와 연구를 포용할 수 있는 확장된 디자인 활동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초학제 스튜디오(The Transdisciplinary Studio)>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출판하는 현대미술 선집의 일부인 <디자인과 미술>은 단언컨대 알렉스 콜스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알렉스 콜스는 편집인인 것이지 저자는 아니다. 하지만 <디자인아트>라는 전작에 관한 일종의 추후 프로젝트이자 답변으로서, 영국의 미술평론가 콜스가 이 책을 냈다는 사실은 꽤 중요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더 동시대적인 논의들을 한 곳에 모아 그들의 폭넓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간명한 기획 의도는 어느 정도 달성된 듯 보인다. 이후 콜스는 2012년 <초학제 스튜디오>(The Transdisciplinary Studio)라는 보다 자신의 관심에 주목한 저작을 내놓았다.

<디자인과 미술>의 구조는 이렇다. 디자인과 미술의 패러다임을 압축해 보여주는 1장 '패러다임'과 각기 다른 자신의 방법론을 가지고 짧은 인터뷰와 케이스 스터디를 나열하는 3장 '조정자들' 사이에 2장 '유토피아와 협업'이 있다. 각 챕터의 세부는 모두 글이 쓰인 연도에 따라 정렬되어 있는데 이 글 옆에 쓰인 연도는 장식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여러 시간대를 불연속적으로 점프한다. 선후 관계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흩어진 점들처럼 각각의 말과 해석들을 시간대 밖으로 튕겨 나오곤 한다. 책의 구조를 통해 책 전체가 말하려는 것은 어쩌면 미술과 디자인의 해부도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이 말하기 힘든 방법론 틈 사이에서 실행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의 육성을 통해 빈틈을 메꿔보려는 가능성 자체로 보인다. 미술사가와 디자인 비평가 사이의 글들에 실행자들의 인터뷰가 따옴표처럼 병치되는 것이 편집 방향을 잡는 줄기였다고 말하는 편집자의 전략은 한데 모이기 힘든 글을 집약한 성찬을 마련하긴 하나 기준은 그리 정밀한 것이 못 된다.

책은 1945년을 원년으로 세운다. '1945년 이후의 관계와 실천'이라는 부제와 달리 책에 담긴 가장 오래된 글은 1957년 조지 넬슨이 쓴 글 '좋은 디자인: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 가장 멀게는 1957년, 가장 가깝게는 2006년의 토론까지를 담아내는데 흥미롭게도 기시감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상황을 전달하는 글은 내부의 가장 오래된 글이다. 1957년 산 조지 넬슨의 글이 그렇다.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과 시카고 머천다이즈 마트가 후원하는 '굿 디자인' 전시에서 심사에서 위원단이 고른 사물들이 '대중화한 좋은 디자인'으로 언급되는 시대 분위기를 말하며 디자인이란 "개개인의 다양성이 가미된 표준형태의 모방"이라고 적는다. "디자인이 짙은 갈색을 띤 하찮은 삶을 더 밝은 색으로 바꿔줄 수는 없다. 삶은 오직 자신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디자인은 비타민이나 항균제가 아니다." 지금 들어도 시대와 너무 짝 달라붙어서 이상할 정도다.

한 흐름을 꿰는 실타래는 이 책에선 어쩌면 제목이 전부다. 그러니까 디자인과 미술인 것이다. 이 앤솔로지에서 분명한 것은 뿌연 질문들 사이를 헤쳐 나가려고 하는 명쾌하고 적확한 글들이 기둥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세 편의 글을 꼽아보자면 노먼 포터, 권미원, 작가 안드레아 지텔의 답변이다. 디자인 비평가 릭 포이너의 글 '미술의 동생'(2005)과 미술사가 할 포스터의 '디자인과 범죄'(2002)의 극단적으로 다른 주장을 병치해 읽는 것도 동생과 범죄라는 은유만큼이나 클래식하고도 흥미롭다. 할 포스터는 이렇게 쓴다. "동시대 디자인은 예술과 분과의 경계를 다시 허물고, 관습에 대한 도전을 관례화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자본주의의 위대한 복수의 일환이다", "디자인은 동시대 소비 지상주의의 토털 시스템 속에서 우리를 처넣으려는 주요 에이전트"이다. 반면 앞서 살펴보았듯 릭 포이너에게 디자인은 "예술의 범위를 초월하는 잠재력을 가진"것으로 격상한다.

노먼 포터가 1969년도에 쓴 '디자이너는 예술가인가?'는 수사 없이 담담하게 디자인에 다룬다. 글은 힘 있고 묵직하다. 그는 디자이너란 예술가에 비해 수많은 타인들(의뢰인, 도급업자, 최종 산물을 사용할 일반인)과 관계하며 기능을 바라보는 특수한 시각 아래 적정기술과 관련한 법적 제약을 받기도 한다는 점을 밝힌다. 제약은 문제 해결과 기능의 발굴로 축약되는 디자인과 연결된다. "간단히 말해 (디자이너는)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유리하게 활용할 만한 제약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38쪽)라는 노먼 포터의 판단력은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꿰내어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닿아가려는 빌렘 플루서의 글과도 연결된다. "플라톤은 예술가와 기술자를 이데아에 대한 배반자이며 사기꾼으로 여겼다. 교활하게 사람들을 꾀며, 왜곡된 이데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75쪽)

플라톤의 이데아나 디자인의 어원은 너무 멀다면 잠시나마 이 책의 핵심을 1990년대 말 등장한 동시대적 논쟁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첫째 <디자인과 미술>은 90년대 말 등장한 용어 '디자인미술'을 느슨하게 정의내린 후, '디자인미술'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나 이 틀에 갖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본인이 쓴 책의 제목이 '디자인미술'이었다는 점은 그에게 업보와 같은 것일 테다. 둘째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 논의와 '포스트 프로덕션'의 직접적 사례가 되는 티라바니자를 비롯한 작가와 디자이너의 '실행'을 비추어보며 이들의 "맥락을 갖고 놀며 상호접속하고 침투"(320쪽)하는 장면들을 배치한다. 셋째 특정 개념으로 국한되지는 않지만 다소 원초적으로 디자인과 미술 각각의 입장에서 서로를 취하는 개별적 사례들을 예시한다. 마리아 린드가 기획한 전시 'What If'(2000)를 비롯해 쿠퍼 휴잇 국립 디자인박물관에서의 전시 '디자인≠미술'(2004) 등이 예로 등장한다. 개별적 사례를 접하는 가운데 미술은 정말 "배타적인 미술제도 공간과 대중매체의 진입로를 민주화하는 도구로서 디자인에 투신(127쪽, 권미원의 글)" 했을까 라는 질문이 찾아든다. 네덜란드 디자이너이자 비평가인 시크 도르스트가 보기엔 "작가가 한번 목표하는 바를 설정하면 그들의 창의적인 과정은 디자인 과정과 상당히 비슷해진다. 작가는 사실상 스스로 설정한 도전을 어느 정도 확정된 디자인 문제로 변환"(12쪽)시킨 것이지만 미술가 콜렉티브 N55가 쓴 글 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미술과 현실'에서 "타인과 아무 상관 없는 미술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며 구체적인 상황과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은 없다"고 적었다.(186쪽)

이 책의 또 다른 힘은 다른 읽기를 자극한다는 점이다. 그리 길지 않은 텍스트들의 조각난 묶음들을 읽고 나면 '큰 그림'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읽기'의 유용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국의 상황에서 디자인과 미술의 관계도를 그리고자 했던 일련의 축적된 경험은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출간된 <디자인 문화비평>이나 '디자인 텍스트' 의 출판물, 도시를 중심으로 한 디자인리서치 작업들과 2000년대 이후 미술관에서 열린 디자인을 다각도로 활용한 전시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손에 기쁘게 집어들을 수 있었던 것은 표지 디자인 덕분이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무엇인가의 '표면' '표지'야말로 디자인과 미술, 미술과 디자인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확인케 하는 것 아니겠는가. 노란색으로 된 원서보다 워크룸이 디자인한 '디자인과 미술'의 표지는 상쾌하다. 도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잠시 허용된다면 빨간색과 파란색, 기능을 수행하는 그리드와 이유 없이 던져졌으나 왠지 몰입해보고 싶은 푸른색 덩어리로 대비된다. 하얀 바탕의 화이트 큐브(표지 배경)에 미술과 디자인을 어떻게 접어 집어넣어야 하는가 은유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목차를 다시 읽어보면 이런 목소리들이 된다. '아니, 그게 미술인가요?'(키스 도르스트) '자, 명품을 드세요(조 스캔런)' '좋은 램프를 찾는 건 어려워(도널드 저드)', '미술의 동생'(릭 포이너), '토털 디자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나?', '어떻게 될까'(마리아 린드) 어쩌면 이 질문들의 핵심은 내용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호들갑과 침착함의 강도, 즉 '뉘앙스'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과자 맛이 중요하지 않고 과자 포장지의 부스럭거림과 날 것의 감각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부인하기 힘든 것은 이 책을 읽는 장소가 2013년 한국의 어떤 방이라면 책이 놓인 시공간은 상당히 적절한 선택이라는 데 있다. 서울역에서 열리는 '타이포잔치 2013' 전시와 웹페이지(☞바로 가기)를 보고 또 읽는 진귀한 경험을 한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제 막 문을 연 디자인 상설 전시실의 '디자인; 또 다른 언어' 에서 각기 다른 디자이너/예술가들의 서로 다른 기대치와 달리 적용하고 창안한 방법들을 본다면, 2013년 지금 이곳이 디자인과 미술에 관한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기에 늦지 않은 시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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