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환경 걱정'이 핵지옥을 낳은 역설

[프레시안 books] 가라타니 고진의 <자연과 인간>

1.
읽고 나면 그 책을 읽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책들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는 그런 책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이 책이 '교환양식을 통해 본 세계사'라는 새로운 시점(視點)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교환양식의 시점을 이해하고 나면 익히 알던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올 뿐 아니라 이런저런 세계의 역사를 교환양식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진다.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시점이 역사를 이리저리 조립하고 해체하고 재구축할 수 있게 하는 매혹적인 시점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어디에선가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의 사상적 작업이 일종의 문학적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좁은 의미의 문학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적으로 문학적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도록 특정한 시점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세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미세하게 조정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하여,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의 후속작이라 할 <자연과 인간>(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새로운 시점을 보여주고 있는가? 대체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은 '<세계사의 구조>의 보유(보충)'이기 때문이다. 시점 자체가 새로워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점이 달라지지는 않았어도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달라졌다. 비유컨대 그는 같은 기법으로, 그러나 다른 소재를 취하여, 전작과는 다른 '소설'을 쓰고 있다.

<세계사의 구조>가 전 세계의 역사를 아우르는 보편사적 기획이었던 데 반해, <자연과 인간>은 특정한 사건(후쿠시마 원전재해)과 특정한 국가(일본)와 특정한 지역(동아시아)의 처지에서 발언하고 개입하는 책이다. 전작이 이론편이었다면, 이번 책은 실전편에 가깝다. 또한 전작이 제시한 새로운 세계시스템이 유엔과 세계공화국이었다면, 이번 책에서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의 모델은 '데모를 하는 사회'이다.

그래서일까. <자연과 인간>에는 한 권의 책으로 묶기 곤란해 보일 정도로 다양한 주제들이 한데 담겨 있다. 재해와 유토피아, 지구 온난화설과 신자유주의, 정주혁명과 유목민, 중국과 세계제국, 동아시아와 역사의 반복, 일본과 데모를 하는 사회 등등. 그러므로 이 책을 단순히 제목 '자연과 인간'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가라타니의 고진의 '생태론'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해버릴 수는 없다. 그 속에는 사유의 프런티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놀라운 통찰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2.
▲ <자연과 인간>(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잠시 시간을 되돌려보자.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가 현재 세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전쟁,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 그리고 그는 이것들이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집약하는 사항들이라고 덧붙였다. 이전의 문학은 상상력으로 이런 과제를 떠맡았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그렇지 못하다고, 그러나 가라타니 자신은 그것을 문학적 방식으로든 비문학적 방식으로든 떠맡고 싶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 출간한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세계사의 구조> <자연과 인간>은 크게 보아 이 세 가지 과제라는 공통된 맥락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것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아쉬워해서가 아니다. 그는 근대문학의 종언이 등장하게 된 배경, 즉 '근대세계의 종언'이라는 사태에 주목하고 있다.

환경문제와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가 극심해질 때 우리는 또 다른 세계전쟁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전쟁은 근대가 만든 세계와 문명, 어쩌면 인류 자신조차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생각 아래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전쟁이라는 파국에 대한 대안으로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다시 사유해왔고 그 결실이 <세계공화국으로>와 <세계사의 구조>였다.

<자연과 인간>에서도 그는 전쟁의 가능성, 특히 동아시아에서 전쟁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21세기에 일어날지도 모를 새로운 청일전쟁이다. '<세계사의 구조> 안의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반복'이라는 장들에서 가라타니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가 극심해질수록 각 지역들에서 '세계제국'(유럽연합, 중국 등)들이 다시 부상하고 그로 인해 세계전쟁의 가능성이 고조된다고 보고 있다.

그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신제국주의 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또한 그가 군사적 주권의 증여에 기반을 둔 세계공화국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앞으로 발생할지 모를 세계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이미 <세계사의 구조>에서 제시되었지만 <자연과 인간>에서는 그것이 한층 구체화되고 있다.

3.
<자연과 인간>의 다른 장들에서는 전쟁의 가능성보다 환경문제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우리가 후쿠시마 원전 재해의 피해 상황을 보며 인류의 문제를 체감하고 있는 것처럼, 가라타니 고진 역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겪은 이후 <세계사의 구조>를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시점에서 다시 읽었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책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추측컨대 <자연과 인간>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환경문제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적 물음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볼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보여주듯이 핵 발전은 한 국가를, 나아가 인류를 파괴적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핵의 위험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게다가 오히려 우리는 지구 온난화라는 환경문제를 막기 위해 핵 발전을 전 세계적으로 장려해오지 않았던가?

다시 시간을 되돌려보자. 1960년대 신좌익운동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을 때, 선진자본주의국가(제1세계)에서는 근대적 발전이라는 사고에 고착되어 있었던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하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같은 생태적 사회주의가 힘을 얻었다. 핵 발전 역시 심각하게 의문시되었고 반핵운동은 무척 활발했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세계자본주의가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고 1980년대에 그 타개책으로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면서 반원전운동과 지역적 생태계의 보호를 주장하는 생태운동은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가라타니는 특히 일본에서 그러한 사태가 진행되었다고 보는데, 참고로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의 경우는 애초에 근대적 발전 자체가 의문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핵 발전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는 1980년대 이후 부상한 지구 온난화론(인류의 활동이 지구 온난화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학설)은 기존의 지역적 생태운동과 반원전운동을 부정하는 환경론의 글로벌리제이션으로서 신자유주의의 글로벌리제이션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1960년대에 반자본, 반국가를 지향하면서 대항운동을 전개했던 환경운동이 자본=국가에 총체적으로 패배한 결과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산화탄소 배출량으로 생각을 하는 환경론은 각국, 각 지역의 다양한 조건이나 상태를 무시하는 신자유주의와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농산물의 자유화 등에 의해 농업을 베이스로 한 각지의 에코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자 그에 근거한 환경운동을 파괴하는 것입니다."(72쪽)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환경문제에 관한 우리의 관점은 '세계화'되었다. 우리는 지역적 폐기물이나 핵의 문제를 고민하기보다는 이산화탄소 배출에 의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지구온난화가 정말로 인류의 활동에 의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 하는 데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지구온난화를 막는다는 빌미로 핵 문제에 대한 경시, 심지어는 핵 발전에 대한 긍정이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온난화설 이후 환경론자는 이산화탄소 배출 삭감을 인류 공통의 과제라고 생각하면서 이른바 '생태주의적 주장', 즉 인간의 탐욕을 비판하는 낭만주의적 문명 비판에 몰두했다. 그러나 가라타니는 이러한 견해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제거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만을 보는 천박하고 값싸고 기만적인 주장이라고 본다. 그것은 자연환경의 문제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자본, 국가, 민족의 관계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되는 것임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원전을 만드는 자본=국가의 체제를 탈구축하지 않는 환경운동이란 결국 공허한 낭만주의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자본=국가=민족의 복합체인 근대 자본주의 세계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환경운동은 체제에 포섭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장려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4.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체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가? 가라타니가 주목하는 것은 '데모를 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일본의 원전 재해가 가져온 탈원전 투쟁이라는 특수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어떤 보편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로서는 2008년의 촛불집회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원전문제는 '울타리' 너머에 있는 것으로 정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본인에게 있어 집 안으로 침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데모가 일어날 기미도 없었던 일본에 거대한 데모를 가져왔다고 해도 좋습니다."(213쪽)

가라타니 고진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적절하게 인용하며 데모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가늠한다. "인민은 어셈블리에서만 주권자로서 행동할 수 있다." 여기서 어셈블리(assembly)란 집회의 원어를 말한다. 이 말이 함의하는 바는 인민주권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주어진 추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집회나 데모와 같은 모임(어셈블리)에서만 실제로 발휘될 수 있는 역동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데모는 대표제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개시하는 것이다.

<세계공화국으로>이든 <세계사의 구조>이든 그 대안에 있어서 다소 추상적인 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책들은 새로운 세계시스템이라는 대안은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간 침묵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스스로 탈원전 데모에 참가하게 되면서 그 이행 과정에 대해 사유의 힌트를 얻었던 것 같다. 데모를 하는 사회에서 점점 데모를 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유용한 힌트라고 생각한다.

"데모에 나가게 된 뒤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데모로 무엇이 가능한가, 데모로 사회가 바뀌는가?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데모로 사회는 바뀐다, 왜냐하면 데모를 함으로써 '데모를 하는 사회'로 바뀌기 때문이다."(199쪽)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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