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맞는 아이는 왜 친구의 일기장을 훔쳤을까

[프레시안 books]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

이 소설의 제목은 이야기를 여닫는 하나의 의문이다. 왜 "불가능한 동화"인가. 이 의문에는 여러 의심이 겹쳐 있다. 모든 동화(童話)는 불가능하다는 암시, 동화를 쓰는 데 필요한 갖가지 조건들이 있고 그중 일부나 전부를 결여하고 있다는 고백, 동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삶의 비의를 역추적 해보려는 비(非)동화적인 시도 등에 대한 의심이 저 의문에 깃들면서 또한 끝없이 의문의 파장들을 만들어 낸다.

단순하게는 이렇게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소설을 읽는 자라면 누구나 지나왔지만 누구나 잃(잊)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그 '아이'라는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시간을 통해서 매일을 살며 무수히 기억하지만 그보다 더 무수히 망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말이다. 귀납적으로 그것이 설령 아이였던 자신의 한 시절을 반영하는 이야기로만 펼쳐지더라도, 혹은 연역적으로 '모든 아이는 사랑받아야 한다'는 전언을 위한 이야기로 접혀지더라도 작가로서는 한 번쯤 감행해보고 싶었던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거칠고 섣부른 짐작은 <불가능한 동화>(한유주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가 '일기'라는 특수한 글의 형식을 사건이자 배경으로 취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인물들은 일기를 쓰고, 일기를 훔쳐 읽고, 일기장을 훔쳐 달아난다. 이 소설에서라면 마치 모든 일들이 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만 같다.

▲ <불가능한 동화>(한유주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일기를 쓰는 일에 깃든 수많은 목적들을 열거하기는 불필요할뿐더러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기야말로 최대한 개별적이고 내밀하며 자발적인 글쓰기이다. 일기는 훗날 자신이 과거의 어느 한 때에 무슨 경험을 했고 그로써 어떤 느낌을 가졌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즉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증언하고 증거로 삼기 위해서도 쓰인다.

하지만 그보다 대부분의 일기는 이후의 시간을 대비하는 데 무심한 채로, 그것을 쓰는 바로 그 때를 순수하게 누리기 위해서 쓰인다. 다시 말해 일기는 쓰인 다음에 있을 '읽기'를 염두 하지 않고 오로지 '쓰기'로 열리고 닫히는 그 순간들을 위해서 쓰인다. 대개 우리는 일생을 통틀어 손꼽힐 만큼 인상적이라고 할 만한 일을 겪었을 때 일기를 쓴다. 그 기록에의 욕망은 현재의 상념과 정감들을 가능한 한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온전히 자신의 세계로 편입시켜 오직 자신의 것으로 누리고자 하는 욕망처럼 보인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오르는 그 상념과 정감들은 분명 현재의 것이지만 전 생애에서 유일한 순간으로서 그것을 기록하여 기억하고자 하는 욕구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일기는 과거와 미래로 구분된 개인의 전 시간을 추체험하는 한때의 흔적이기도 하다.

더불어 일기를 쓰는 자신의 내밀하고도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일기 바깥의 타자에게 이해 가능한 서사로 재구성하는 일에는 응당 비유와 같은 수사가 작동하기도 할 것이다. 그 때문에 한편으로 일기는 대문자 역사에 기대 있는 소문자 역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일기와 <불가능한 동화>는 어떻게 만나는가. 작가의 여느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이 소설 역시 메타소설처럼 읽힐 여지가 있다. 소설쓰기에 관한 소설로서 이 장편은 작가 자신의 심연으로 조금 더 다가가 잃어버렸다가도 은연중에 되찾게 되는 자기 안의 아이를 구상하고, 그 아이와 만나게 되는 매개로서 한 권의 일기장이 된다. (일기이자 소설인) 지면에서 작가의 초상으로 보이는 초점화자("나")는 자기 소설 속의 "아이"를 추적하고 감시하는 듯하지만, 결국 그 자리는 '나'의 문장으로만 만들어지는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도리어 '너'에게 '나'의 행적을 노출하고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형국에 놓인다.

이 역설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자신의 처지나 입장을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고백하고 자신이 거듭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인, 달리 말해 자기 내면의 풍경을 스스로 구상하고 바라보고 읽어보기 위해 쓰인 서사란 무엇보다도 일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에게 일기는 그 생을 스스로 증언한다. 누군가는 죽을 듯한 고통 속에서도 죽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다고 일기를 쓴다. 누구에게나 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털어놓고도 남은 이야기, 다른 모든 이야기를 하도록 추동하는 이야기 이전의 이야기이자 이야기 이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표제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일종의 동화를 기대하고 접근하게도 하는 이 소설에서 역시 일기장은 특별해 보인다. 소설의 주된 갈등처럼 보이는 일기장 도난 사건 이후에도, 책임자인 선생은 사라진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일기라는 점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거나 상심하지 않는다. 일기장을 귀하게 다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훔친 '아이'뿐이다. 아이는 왜 거듭 일기장을 노렸을까. 위험천만한 시간을 감내하면서까지 아이는 다른 이들의 일기장을 펼쳐서 낯선 문장들 아래 더 낯선 문장들을 적어 넣어야만 했을까. 그 '아이'는 반 아이들의 누구에게도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들은 아이의 이름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아이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다."(52쪽)

심지어 '아이'는 자신을 알아 본 유일한 아이인 "미아"를 죽인다. '아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박적으로 제 자취를 지우고 감추려 한다. 그런 '아이'가 다른 아이들의 일기를, 그들의 사소한 문장들을 훔친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나 사소해서 잊히기 일쑤인 아이들의 일상에 '아이'는 사소하지만은 않은 몇 줄의 문장으로 끼어든다. 이는 어디에도 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던 '아이' 본연의 태도와 이는 정반대되는 행위로 보인다. 그 일이 매우 비밀스럽고도 순식간에 일어났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아이'의 그 치밀한 의도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이쯤에서 이 소설이 또 하나의 일기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크게 두 부로 나뉘는 이 소설에서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되는 26장부터는 마치 초점화자("나")의 꿈을 기록한 것과 같은 기묘한 서술이 이어진다. 모든 꿈속에서 '나'는 황폐하고 불가해한 상황에 갇혀 끝이 없을 듯한 고난을 겪는다. 설원 위를 맹목적으로 걸어가거나, 쏟아지는 벽돌의 더미를 속수무책으로 감당하는 '나'는 마치 그 꿈속에 매몰되어 꿈의 일부가 되어버릴 듯하다. 이 꿈들은 무엇보다도 의미화 할 수 없는 파편적인 이미지들과 그 가운데 심신을 각성하게 하는 위기감 같은 것이 일기라는 명목 아래 기록됨으로써 '나'의 악몽이라는 하나의 계열을 갖춘 대상이 된다. 단순하게는 '나'의 일과가 어떤 불안으로부터 침해받고 있다는 반증인 그것은 '나'의 자의적인 해석과 서술을 통해 소설이라는 큰 서사의 흐름 위로 떠오른다. 독자는 그 꿈의 장면들, 그것을 기록한 '나'의 일기 속으로 초대되고, 그 일기 속 인물들의 일기와 그 일기의 일기 속으로 거듭 빠져든다.

이처럼 비슷하게 반복되는 서사구조를 통과할 때마다 독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이 누구의 것인지, 일기의 내부인지 외부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마치 시작도 끝도 모를 꿈을 꾸는 자의 처지와 흡사하다. 이 소설은 결국에는 독자 역시 기묘한 꿈의 한 장면 속으로, 혹은 다른 이의 일기의 한 페이지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기를 기획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나'의 일기장에 적힌 메모들은 이 소설 1부의 주된 장면들을 구상한다. 2부의 '나'가 쓴 소설(혹은 일기)이 1부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1부의 아이("너")는 2부의 '나'를 방문한다. '너'는 '나'의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나'의 일기를 소리 내어 읽는다. 낭독되는 문장은 '나'의 것이지만 '나의 소설' 속 인물인 '너'로부터 발각되고 읽힘으로써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도 아닌 채, 이제 우리에게 읽히고 있을 뿐이다.

너는 다시 읽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일기를 다시 쓰는 날이면 대개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할 말이, 혹은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해온 말들이 너무나 많아서, 결국에는 거의 쓸모없는 단편적인 문장들만 몇 줄 쓰다가 그만둔다는 것. 어쨌거나 나는 천천히, 가능한 천천히 쓰고 싶다. 「불가능한 동화」에 대해 몇 줄을 더 적어두기로 한다: 아이가 미아를 죽였다. 미아의 죽음은 처음부터―그러니까 구상 단계에서부터―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러한 내용에 따라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미아를 살해했다. 그러니 아이는 미아를 죽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그리고 아이는―나를 찾아오게 될―이 일기를 읽게 될 것이다.) 미아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쓰는 동안, 나는 모종의 죄책감에 시달렸다. 살인에 인과적 논리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지금 이 일기를 쓰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가 다른 일기장에 몇 줄의 문장을 부가했다는 (허구적) 사실을 떠올린다. 아이는 이 일기장에도 나의 필적을 흉내 내어 어떤, 치명적인 문장들을, 적어야 할지도 모른다." (258쪽)


우리는 결코 꿈의 처음과 마지막을 기억할 수 없다. 가장자리는 망각의 영역으로 매몰되고 가라앉고 무너지지 않은 부분만이 남아 꿈이라 기억된다. 그러한 꿈의 존재 방식을 거꾸로 닮아 있는 것이 일기이다. 일기는 기억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여 기록되지만 때로는 자의나 타의에 의해 모든 문장을 분실하고 압인이라는 투명한 글자만이 남아 그 글을 쓴 자가 미처 쓰지 못한 망각에의 욕망을 증언하기도 한다. 모든 꿈이 그렇지는 않지만 꿈이 일종의 현실의 소원을 대신 성취하는 장이라면, 일기는 현실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숨기는 장이다.

다시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의 일기장을 펼쳐 마지막 문장 다음에 자신의 필적을 남기며 새로운 문장을 적어 넣는 이유는 아마도 소설을 구상하는 '나'의(혹은 작가의) 문제의식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시작된 모든 이야기는 더 이상 '나'의 의도나 의지로만 매듭지을 수 없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다른 세계가 된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마지막 문장을 적으려는 욕망으로 계속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로 다른 필체와 서로 다른 이야기로 채워진 아이들의 일기장을 펼쳐 문장을 덧붙이는 '아이'와 새끼 고양이를 죽이고 미아를 죽이는 '아이'의 모습은 일견 상통하는 데가 있다. 마지막 문장을 기입하는 것 또한 일종의 죽음에 대한 선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가 이야기에 매장당하지 않도록"(261쪽)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의식은 그대로 '아이'에게 투영된다. 그렇게 '아이'는 살아가는 일이든 그것을 기록하는 글쓰기이든 중지 아니면 완결을 택해야 할 뿐이어서, 마치 완벽을 구상하며 단 하나의 마지막 문장을 쓰듯이 죽음의 유혹에 쉽게 굴복한다.

그런 '나'와 '아이'를 담은 주머니로서 작가는 물리적으로 문장을 분절하고, 단어를 나누고, 끝없이 쪼개어 보듯이('아이'가 단어를 구성하는 자음과 모음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행동으로 보여주듯) 심리적으로도 그렇게 한다. 작가가 쓴 하나의 문장은 무수한 문장들의 심증이 된다. 작가에 의해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불가능한 동화>의 한 문장은 허구적으로 실재하는 '나'를 증명하는 퇴행의 기미를 갖는다. 한 문장에서 독자가 감상하는 것은 필자의 필체뿐만 아니라 그 문장에 깃든 무수한 흔적들이다. 그 흔적은 필자의 독서와 일기를 아우르는 경험과 그 경험들의 총체로서의 기억을 초과하는 망각의 지속을 담보로 한다.

이 소설을 통해 소설이, 이야기가 지닌 꽤 복잡다단한 서사물의 구조와 그보다 더한 개인 내면의 지층과 같은 역사를 확인하게 된다. 하나의 서사로 엮이는 것은 글 쓰는 자의 경험이나 상상에서 뽑아낸 순수한 허구의 조직이 아니다. 순수의 허울을 덮어 쓴 낡은 기억들이, 망각되었을 뿐인 낯선 꿈의 조각들이 한 편의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겨우 소설의 표지를 갖거나 언제든 잃어버리게 될 한 권의 일기장으로 마감될 것이다.

너는 읽기를 멈추고 나는 올려다본다. 나는 너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비치지 않는다.
다 알고 있었네.
네가 말한다.
다 알고 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258쪽)


앞선 인용에 이어지는 부분을 더 읽어보자. '나'의 이야기(혹은 일기) 속 '너'는 그 이야기 밖에서 '나'에게 그 이야기를 읽어준다. '나'는 그런 '너'를 제지하지 못한다. 현실의 '나'는 허구의 '너'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이 소설이 "불가능한 동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나'로부터 "너는 왼손에 연필을, 오른손에 만년필을 받아 쥐"고 무엇을 쓸 거냐고 묻지도 않은 '나'에게 "당신이 쓸 수 없는 것을 쓰지"(249쪽)라고 대답한다. 아이들의 일기 위에 아이들이 쓰지 못한 것을 쓰고, '나'의 이야기 속에 '나'가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너'는 허구로서의 모든 이야기에 깃든 진실의 실재일 것이다. 그러니 소설의 본연을 고민하고 그것을 문장으로써 완벽하게 옮기려 하면 할수록 '나'는 '너'와 불화하게 될 것이며, '나'의 꿈 장면에서 단어와 단어 사이에 빼곡히 들어찬 벽돌이 암시하듯, 자연스러운 서술에 장애를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와 '너'는 동화(同和)할 수 없는 운명으로 하나의 이야기에 놓여 있다.

작가 한유주는 단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는 자신의 내부와 사정이 말이다. 가만히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 안의 또 다른 목소리에게 말을 걸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자기가 미약하지만 단호하게 대답을 해줬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쓰라고, 마지막 문장을 향해 계속해서 써달라고, 읽고 싶은 이야기는 '나'를 쓰게 하고 '나'를 만나게 하는 그 이야기라고.

그리하여 작가 한유주는 쓰고, 계속 쓸 것이다. 이 이야기가 동화(童話)인 것은 이야기 속에 아이가 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아이가 그 이야기를 읽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 이야기의 무너짐을, 무너지고 있는 이야기를 증거하며 결코 무엇과도 동화(同化)할 수 없는 이야기로 지속되는 삶이 있다. 이미 항상 당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비단 한 작가의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일상의 지침 가운데, 별 것 없는 일기 속으로 문득 당신을 찾아오는 '아이'가 있지 않았나. 어쩌면 견고해 보이는 삶의 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오는, 호명할 수 없는 그 존재로부터 당신은 안전했고 안녕할 것이다. 당신은 그와 동화할 수는 없지만 내내 동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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