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피카르트라는 이름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과 말>(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이라는 너무나 자명한, 진부하기까지 한 제목 아래 무심히 등록되는 저자가 아니다. 그는 관조자, 어둠 속을 주시하는 한 마리 부엉이다. 피카르트의 글에서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모태 속에서 들었을 법한 어머니의 고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다'로 연신 조용히 착륙하는 기이한 서술형 종결어미. 우리말의 '-다'가 이토록 내 두개골 아래서 잔잔히 울려 퍼진 적이 없다. 역자 배수아의 말처럼 번역이 "이종간의 사랑"이라면, 독일어와 우리말은 부드러운 안개처럼 잘 뒤섞였다.
사유 충만하면서도 행간마다 내적 공명 가득한 이 장편의 산문시는 다시 내 말로 잘 옮겨지지 않는다. 독서가 텅 빈 허공에 자기만의 정신의 계단을 만들어 오르고 내리며 아찔한 황홀경을 느끼는 일이라면, 그의 글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느리고 차분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분명 무언가를 불쑥, 통째로 보게 만든다. 온전히 옆도, 온전히 뒤도 볼 수 없었던 내 시각의 맹점(盲點)이 일거에 확대되는 느낌이 든다.
"죽음은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함께 그에게 앞서 주어진 죽음을 죽는 것이다. 죽음이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은 인간을 기습하는, 훨씬 더 격렬한 사건일 것이다."(36쪽)
| ▲ <인간과 말>(막스 피카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 ⓒ봄날의책 |
'이곳', '지금', 이 대기권 생물계의 우리는 애초부터 원초가 아니라 파생이었다. 탄생이 아니라 이동이다. 우리는 양각이며, 돌출이다. 모든 '현존'하는 것의 시작점을 '나', '지금', '여기'가 아닌, 그보다 앞선 지점, 혹은 더 아득히 앞선 지점으로 설정함으로써 피카르트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왼쪽으로, 그러니까 이미 지나온 것 쪽으로 조금 앞당긴다. 그러고 나면,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얼굴, 우리의 자아, 우리의 실존,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식 따위는 상대적으로 '튀어나온 것', 쓸데없이 '과잉'된 것이다. "얼굴은 우리의 종착역"이라는 피카르트의 말은 '얼굴'이 타자를 위한 현존으로서 내 실존의 당당한 시작이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실존, 이미 끝나버린 사랑 행위라는 말로 읽힌다. 그의 세계에서 보자면, 사르트르식 '실존주의'는 일종의 '오버'다. 우리는 좀 더 안으로, 뒤로 물러나야 한다. 내재적 하강으로, 내 내면의 우물을 깊이 파야 한다. 샘물은 저 깊은 심연에서 발생하지, 흘러넘친 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이미 주어진 것"이 실은 우리가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발생한 지점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상류에서 한없이 멀어진 하류의 쓰레기 잔해물처럼 우리는 둥둥 떠다닌다. 숱한 대상을 만나도, 만남은 있으나 떨림이 없다. 토막 난 부도체마냥 자성(磁性) 잃은 나는, 아니 '나'라는 개체는 습성화된 몸짓으로 다른 개체와 붙는 척 할 뿐이다.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웬만한 것에는 전율하지 않는다. 언어의 과잉, 소리의 과잉, 이미지의 과잉, 빛의 과잉. 손바닥 안에 든, 21세기의 작은 괴물을 하루 종일 바라보며, 그것이 우리를 집어삼키는 줄은 새까맣게 모른 채, 의미조차 생성되지 않는 희한한 기표들을, 날파리 같은 하루살이 검색어들을, 소리만 무성한 잡음어들을 매일같이 집어삼키며 우리는 나날이 '없어지고' 있다. 끊임없이 외연만 연장하는 스토리에 포식되어 우리는 정작 내 내면의 스토리는 잃어버렸다. 과잉의 과잉 시대가 공포스러운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나머지,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최초의 '과잉'은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야생적이고 야한, 근원적인 생명점이었다. 창조적인 것은 포만의 정점에서 터진다. 말(末)은 나무 끝에서 막 솟아나온 또 하나의 작은 가지다. 끝이 곧 시작임을 알리는 이 짜릿한 연속성을 찰나에, 단 한 번에 알리는 상형 문자, 그 문자의 힘. 이것은 다른 언어에도 있다. 프랑스어로 '끝'(bout)은 눈, 싹, 꽃망울, 여드름, 단추를 뜻하는 'bouton'으로 이어진다. 과잉은 더는 못 참고 터지는 것, 최초의 순수 배설물이다. 우리는 이 최초의 과잉 지점에서 놀았어야 했다. 그곳에서만 황홀하게 자지러지기 때문이다.
땅속을 뚫고 나온 것이 싹만은 아니다. 인간의 혀, '랑그'(langue), 언어 또한 검은 입 속에서 삐져나온 잎이다. 인간은 말로써 존재하는 것 같지만, 대개는 말로써 자기 존재를 잃는다. 언어는 필수품이자 사치품, 잉여다. 파스칼 키냐르 식으로 말하면, "언어는 공기 중의 혐오스러운 파장"이며, "수상쩍은, 쓸데없는" "삶의 열정"이다. 말들이 얼굴을 만들지는 않으며, 말들 없이도 우리는 산다. 문제는 진짜 언어는 발설된 언어 이전에, 언어의 근원에 있는데, 이 근원은 얼굴이,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체는 있으나 형체는 없는 기이하고 신선한, 신비한 영액 같은 물속에서 언어가 탄생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이 특히 빛을 발하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그가 '말'을 수가지 자연물(바람, 공기, 돌, 용암, 새, 벌레)로 활물화 하거나, 조형화된 온갖 형상으로 환유하면서다. 그의 메타포들은 범람한다. 자연계와 상상계를, 개념계를 전광석화처럼 이리저리 이동한다. 피카르트는 텅 빈 허공에, 어둡고 푸른 창공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형상들을 조각한다. 말이 보인다. 침묵이 보인다.
"순수하게 언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은 침묵으로부터 튀어나와서, 불현듯 어느 한순간 거기 현존한다. 발생과 현존은 하나다."(49쪽)
피카르트는 언어 역시나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본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선험적 언어는 "말과 사물이 낙원의 합일" 속에 머물렀던 때의 언어, 인간의 언어가 아닌 신의 언어, 인간이 잃어버린 언어다. 분리 이전의 세상, 인식의 나무인 선악과 이전의 세상, 실낙원 이전의 세상에서는 언어가 침묵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장막을 찢고 무대 위로 튀어나오니, 저 아래 아기 천사들이 심란한 표정을 짓는다. 라파엘로가 넌지시 암시한 것이 그것이다. 탄생이 곧 죽음이라는. 피카르트는 그리스도가 장막을 뚫고 나온 것처럼, 인간의 언어도 미세하고 신선한 얇은 장막을 뚫고 나왔다고 본다. 꽃봉오리는 터졌으므로 시들 일만 남았다.
"언어는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며"(86쪽) "오직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것 이외의 다른 방향을 알지 못하는 언어는 폭력적이다."(30쪽). 피카르트는 침묵을 언어의 반대어가 아닌―이처럼 일차원적인, 저차원적인 상상력이 있을까?―, 언어의 동의어, 아니 언어라는 부분 집합을 포함하는 전체 집합으로 설정한다. 달리 말해, 침묵을 내포한 언어만이 진정한 언어다. 침묵을 내포하지 않은 언어는 잡음어에 불과하다. "공기 중의 파장"이라는 언어가 우리의 가슴 조각 하나 떨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들 언어가 심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내적인 연속성 없이 외적인 연속성만 계속해서 늘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피카르트는 이미 <침묵의 세계>(최승자 옮김, 까치글방 펴냄)에서 언어와 침묵의 관계를 이렇게 뚜렷하게 형상화 한 바 있다.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태고의 짐승처럼 침묵은 거기 누워 있다. 그 침묵의 넓은 등이 아직 보이기는 하지만, 그 태고의 짐승의 몸 전체가 오늘날의 전반적인 소음의 덤불 속에서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 있다. 그 태고의 짐승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침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오늘날의 모든 소음은 다만 그 태고의 짐승, 즉 침묵의 드넓은 등에 붙은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 같다."
| ▲ <침묵의 세계>(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까치글방 펴냄). ⓒ까치글방 |
우리가 "이미 주어진 것"으로, '과거'로, '태고'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발원점과 통하는 방법이 그나마 있다. 발원점에서 너무 멀리 온 우리 부도체가 애써 전도체가 되는 것이다. 자성이 흐르면 발원점과 종착점이라는 양극은 어떻게든 통한다. 부도체에 자성이 흐르게 하려면 뒤를, 지나온 것을 더욱 파야 하는데, 우리는 더욱 앞으로만 질주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우리는 이제 '과잉'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과잉의 행위'에 놀란다며 절망한다.
"파괴된 말, 말기호 그리고 무제한의 기술은 서로 상응하는 성질이 있다. 단선적인 말기호는 곧장 단선적인 행위와 단선적인 기술로 이어진다."(176쪽)
"과잉의 충만이 원인이 아니라, 무제한의 실험으로 놀라움을 양산해보려고 하는 빈곤함이 원인이다."(177쪽)
우리의 잡음어는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겠다는, 잡음어의 마지막까지 가보겠다는, 그래서 기필코 진짜 말이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겠다는 인간의 절망적 시도"(146쪽)다. 우리는 언어에 지치면 입을 다물 것이다. 그러나 이 '입 다뭄'은 생태적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침묵이다. 피카르트는 이제 우리 언어는 '구조'를 갖지 못한 채, '행위'만을 계속해서 유발한다고 폭로한다. 과잉 행위의 반복이란, 정신은 결여된 채, 광인의 행보처럼, 자기 안에 온전히 파고들기보다 자기 밖으로 계속해서, 계속해서 낳아가는 형국이다. 우리는 미친 듯 최대치를 열망하며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러한 진보는 충만이 아니라, 결핍 자체를 초래한다.
'선험성'이 '먼저 있는 것', 그러나 상실한 것, 선행하였으나 이미 멀어진 것으로만 환기된다면, 우리는 그의 책 말미에 이르러 절망감에 빠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을 기적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온전히 깃든 것으로서의 '전체성'이다. '선험성' 개념과 함께 피카르트의 두 번째 '복음어'가 그것이다. '선험성'이 직선적 상상력으로 파악된다면, '전체성'은 심연 바닥까지 둥글게 파서 다시 휘감으며 올리는 것으로, 천체의 궁륭처럼 연상된다. 과잉되고, 돌출되고, 양각되거나, 도망치고, 물러나고, 음각되고, 이 모든 상대적 뒤죽박죽들을, 언어의 다양성을, 진리의 다양성을 자비로운 풍족함으로 껴안는 전체성. 이것이 내적 발열성, "진실한 엔트로피"다.
진리는 향하지 않고, 깃든다. 우리가 아는 서양적 진리, '베리타스'(veritas)는 하이데거가 복원한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즉 "은폐되지 않은 것" "폭로되고 계시된 것"으로 복기되어 있다. 그런데 막스 피카르트는 '진실된'(verus)이란 어휘는 어원상 고대 북유럽어인 '바라르'(varar), 혹은 고대 고지 독일어인 '바라'(vara)에서 왔음을 명시한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안에 온전히 깃들어 있는 '충실', '신의'다. 돌출되고 과잉된 언어 속에서도, 우리가 언어 때문에 전율하기 위해서는, 언어 안으로 온전히 깃들도록 극도로 애쓸 수밖에 없다. 곤궁한 나도, 허무한 나도 가만히 내 안에 침잠할 때 그나마 힘이 다시 솟아나는 것처럼.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