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자리에 곧바로 한국의 새누리당, 민주당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죠. 이 책에서 오히려 경청해야할 대목은 평소 무관해 보였던 정치와 건강의 긴밀한 관계입니다. 사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압니다. '좋은 삶'이 '건강한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 <건강할 권리>(김창엽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이 책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가끔 의사, 약사, 간호사 등의 보건의료 전문가를 만날 때마다 종종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서리풀 논평'의 진짜 필자는 누구예요?" '시민건강증진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매주 월요일 아침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행되는 연재 '서리풀 논평'의 진짜 필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서리풀 논평의 진짜 필자는 김창엽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입니다. 그는 2012년 봄부터 1년이 넘게 한국에서 건강한 삶의 기반이 되는 좋은 삶의 조건을 탐색해 왔습니다. <건강할 권리>는 그 첫 1년 치 원고를 갈무리해서 다시 쓴 것입니다. 1년간의 탐색 끝에 그가 발견한 좋은 삶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지난 6월 20일 목요일,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에 새롭게 터를 잡은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집들이 때, 김창엽 소장을 만났습니다. <편집자>
건강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고소득층 초등학생들은 약 80퍼센트가 행복하거나 매우 행복하다고 했지만, 저소득층은 50퍼센트가 행복하지 않거나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어린이에게는 극단적인 건강 결과인 죽음이나 손상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의 사회경제적 위치(부모의 학력이나 직업, 거주지의 수준 등)가 낮을수록 더 많이 죽고 다친다." (83~84쪽)
프레시안 : <건강할 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르는 중요한 열쇳말은 '건강'이죠.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건강과 이 책에서 쓰이는 건강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흔히 건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건강 자체를 일종의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죠.
▲ 김창엽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두 번째는 한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똑같은 고통에도 굉장히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덜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나가는 이들 중에는 아픈 것을 신이 주는 시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건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죠.
마지막이 바로 이 책에서 주목하는 '사회적인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 예를 들어서 불평등과 같은 요인이 인간관계와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건강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주목해야 한다는 발상이지요.
그 동안 '생물학적인 것'은 자연과학이, '개인적인 것'은 인문학이, 그리고 '사회적인 것'은 사회과학이 주로 관심을 기울였죠. 저나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중에서 그간 '사회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부분에 좀 더 관심을 가졌죠.
하지만 이 세 가지 측면이 긴장 관계를 가지면서 현실의 건강을 구성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건강의 '사회적인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생물학적인 것'이나 '개인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는 게 아니죠. 오히려 앞으로 필요한 일은 긴장 관계를 의식하면서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아우르는 관점을 가지는 일이죠.
예를 들어, 우리는 무상 의료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하곤 합니다. 하지만 무상 의료를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빠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우선 생물학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죠. 실제로 노인 질환이 많아지는 일은 무상 의료 체계를 마련할 때 꼭 고려해야 할 일이죠.
개인의 반응을 이해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90대 노인이 자기 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젊은 사람의 그것과 전혀 다르죠. 그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 마련한 무상 의료 체계는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죠. 아무튼 일단 이 책에서는 사회적인 관점을 강조하긴 했습니다만, 저 스스로는 다른 측면과의 긴장 관계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 <평등해야 건강하다>(리처드 월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불가리아의 장수 마을(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광고에 나온 그 마을)엔 더 이상 장수 노인들이 없다. 마을 묘지엔 1990년 즈음 세 해 동안 죽은 사람들의 묘로 그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소박하나마 집과 자동차도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이 칼럼을 윌킨슨의 <평등해야 건강하다>와 같이 소개했더니 반발이 심하더군요. 건강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보장해준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정면으로 부딪치기 때문이죠. 이 책 역시 똑같은 반발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통념에 균열이 생기지 않으면 이 책의 메시지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김창엽 : 우리 사회가 현대 의학의 압도적인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건 사실이죠. 객관적인 데이터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현대 의학에 기반을 둔 의료 서비스가 평균적으로 생명 연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아요. 이런 결론을 지지하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엄청나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현대 의학의 패러다임이 압도적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정설이 개인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죠. 개인은 나와 내 가족이 죽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데, 그들에게 아무리 통계를 들이대도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병원 자본이 마련한 고가의 현대 의학 서비스에 쉽게 몸을 맡기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간 건강 또 의료 문제를 다루는 연구자들이 너무 안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네팔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네팔은 국민소득이 400~500달러 정도 되는 가난한 나라죠. 그 나라에서 건강한 삶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MRI 같은 고가의 의료 기기가 아니라 깨끗한 물과 세 끼 제대로 먹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의 주민들이 국립암센터를 지어달라고 합니다. 또 염소 팔고 논 팔아서 인도 상업 자본이 운영하는 근처 병원에서 MRI를 찍어요. MRI를 찍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게 아니라고, 돈만 버리는 거라고 충고를 해도, 굳이 병든 노부모에게 MRI 검사를 받게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회적 관점에서 건강을 얘기하는 사람은 '현대 의학의 패러다임에 지배당했다' '자본주의에 경도되었다' 이렇게 비판을 하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타박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도대체 보통 사람들이 그토록 절실히 열망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야죠.
그러니까 현대 의학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건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작업 없이 무작정 현대 의학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통념에 균열을 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프레시안 : 최근에 의철학을 공부하는 강신익 선생님 같은 분은 "건강은 없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이라는 관점 자체가 변하지 않고서는 현재 우리 몸을 둘러싼 여러 가지 권력 관계가 재편될 수 없으리라는 고민에서 나온 주장인데요.
김창엽 : 앞의 답변과 이어집니다만, (비판적 실재론 식으로 말하면) 건강의 '심층적 실재'는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건강의 개념이나 의미를 급진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워낙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기존의 관념을 깬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생각이나 '뒤집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
어떤 '공공성'인가?
"건강에는 사회적 요인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이때 사회적 요인의 근본 원인, 즉 '원인의 원인'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 그 자체다. 따라서 건강 정의의 실현과 불평등 완화는 시장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극단적으로 상품화된 인간 활동과 사회적 관계가 다시 본래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사고팔아서는 안 되는 것들을 공공화(또는 재공공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101쪽, 141쪽)
프레시안 : 이 책을 꿰뚫는 또 다른 열쇳말은 '공공성'입니다. 그런데 '건강'과 마찬가지로 '공공성' 역시 일반적인 쓰임새와는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통념의 공공성은 곧바로 국가권력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공공성을 국가와 연결시키는 그런 통념 자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김창엽 : 진주의료원을 놓고서도 공공 의료 얘기가 많이 나왔습니다만, 대체로 공공 의료 강화는 곧바로 국·공립 병원을 늘리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고민은 사람들이 결코 국·공립 병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게으르고 비효율적이고 낭비하는 관료 조직이라고 생각하죠.
몇 번을 고쳐 생각해봐도 지금 보통 사람이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은 건강과 관계된 것들이 지나치게 시장화, 상품화된 탓입니다. 그런데 시장화, 상품화에 대항해서 공공성을 떠올리는 건 쉬운데, 정작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가 소유는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소유한다고 해서 꼭 시장화, 상품화의 문제를 비켜가는 것도 아니고요. 즉, 국가가 소유한다고 공공성이 자동으로 보장되지도 않아요.
이 책에서는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대안적인 공공성의 모습의 생각해보자고 제안해 본 거죠. 지금 우리 사회는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장, 국가 그리고 시민 사회 혹은 제3섹터 등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죠. 이 세 영역이 때로는 상호 의존하고 때로는 긴장 관계를 가지면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공공성은 바로 이런 세 영역이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좋은 삶을 가능케 하는 어떤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시장에서 공공성을 얘기하려면 그 자체로는 안 되고 반드시 국가나 시민 사회의 통제 혹은 침투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 소유 역시 시민 사회의 적절한 견제가 있어야 애초의 공공성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장의 견제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공공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의 문제는 곧바로 한국 사회 보건의료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이런 질문과 직결됩니다.
ⓒ뉴시스 |
프레시안 : 이 얘기를 더 하기 전에 먼저 다른 질문을 해보죠. 책에서 '1989년 체제'라고 언급했던 한국의 건강 체제는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이런 논의 속에서 그간의 공공성 강화는 대개는 국가 역할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과 동일시되어 왔습니다. 국민건강보험의 사각 지대를 줄이고, 보장성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공공 병원을 늘리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런 접근성을 중심에 놓는 1989년 체제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왜 그런가요?
김창엽 : 한 쪽으로는 접근성의 과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대중의 인식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접근성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이는 계층 간에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불평등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보장성이나 접근성이 일정 부분 진전되었지만 많은 건강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더구나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국의 공영 의료 체계 30년을 반성해 보니 이른바 무상 의료는 이루어졌지만 건강 불평등이 여전하더라는 <블랙 보고서>(1980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의료를 넘어서 건강으로, 그리고 건강 보험 제도를 넘어서 전체 건강 레짐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보장성이나 접근성을 말하는 것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지향이나 보편적 복지의 찬반을 떠나 접근성과 보장성을 강화한다는 방향만큼은 반대가 별로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의견이 비슷하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재원이나 우선순위처럼 기술적인 논의로 일관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근본적 지향의 동력이나 상상력은 아무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걱정이 1989년 체제의 극복을 말하는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에필로그에서 이 책에서도 지적을 했습니다만, 국가의 역할에 한정해 공공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더라도, 공공 보건의료는 계속 후퇴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후퇴할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의 진주의료원 사태는 그 증거죠. 그렇다면, 이럴 때일수록 국가의 이름으로 속박되어 있는 공공성이라도 제대로 지키는 게 필요한 일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공공성을 다시 고민하는 일이 공공 보건의료가 후퇴하는 현실에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다면, 그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일까요?
김창엽 : 우선 시민 사회가 국가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는 정책의 민주화나 정치의 민주화가 있어야겠죠. 이런 게 가능하려면 국가 제도 전체를 포괄하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정당 또 관료 조직에 시민 권력이 강하게 침투되어야죠. 하지만 당장 이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낮은 수준도 있어요. 지역에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정책을 시민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민이 서울의료원이나 보라매병원 운영에 어떤 식으로 개입할 것이냐, 또 지역의 보건소의 운영에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진전시킬 수 있죠. 이런 고민이 제도화로 이어지면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시민 사회가 시장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이 질문은 더 어렵죠.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저는 협동조합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의료생협도 한 예입니다. 앞으로 생활협동조합이 의원 급을 넘어서 병원 급을 소유할 수 있다면, 시장 중심의 보건의료를 견제하는 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참여가 건강이다
"어떤 사회적 환경, 정책, 제도인가에 따라 그리고 정치에 따라 건강이 달라진다면 참여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참여는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참여가 건강을 좋게 하는 데에 별 소용이 없다 하더라도 참여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삶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219~220쪽)
프레시안 : 방금도 시민 참여를 강조했습니다만, 이 책에서 강조되는 또 다른 열쇳말은 '참여'입니다. 당연히 '전문가' 혹은 '전문성'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죠. 여기서 말하는 전문가에는 의사, 한의사, 약사와 같은 의료 서비스 공급자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관료, 공무원 등도 포함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안적인 공공성을 구축하는 데도 시민의 참여는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환자와 의사가 공동으로 치료 결정을 함께 해야 한다는 '공동 의사 결정' 같은 영국의 예나 오리건 주의 건강 정책에 시민이 참여하는 예처럼 여러 가지 모습도 소개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참여입니까? (웃음)
시민의 참여가 꼭 최선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의료에서 환자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즉 선택권에 대한 요구가 커질수록 오히려 공공 의료가 축소되고 시장 중심의 의료가 확대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이 자본에 포섭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실제로 진주 시민들의 진주의료원에 대한 입장은 무관심을 넘어서 차가웠습니다. 또 병원에서 환자들이 오히려 고가의 치료법 혹은 고가의 약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
시민들 스스로 더 많은 경험과 학습이 필요하죠. 지금 얘기하는 참여는 이런 과정이 전제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사이에 많이 안 했던 얘기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참여를 일종의 도구로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참여를 하면 의사 결정의 질이 좋아져서 더 좋은 결정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거죠.
그런데 설사 참여를 통해서 결과가 더 좋아지지 않더라도, 혹은 참여로 당장 나의 건강이 좋아지는 게 아니더라도 참여 자체에 의미를 두는 접근이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이죠. 즉 참여야말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는 시각입니다.
참여에 대한 이런 시각을 염두에 두면, 참여의 의미를 훨씬 더 깊고 넓은 맥락에서 사고할 수 있겠죠.
프레시안 : 현실에서 전문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또 전문가와 시민 사이의 권력 관계가 한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현실에서, 오히려 시급히 필요한 질문은 바로 이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아닐까요? 한국 보건의료가 이만큼이라도 나아진 것 역시 보건의료 전문가 운동의 성과가 중요했죠. 그런데 이 책은 기존의 전문가들이 재구성될 가능성은 낮게 보는 것 같습니다.
김창엽 : 가능성을 기준으로 보자면 어느 것도 다 비슷하지 않을까요. 전문가들의 변화를 더 낮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토대'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 결의나 도덕성 같은 것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역시 전문가에 한정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토대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전문가들이 사회적으로 일하고 활동하는 방식이나 조건, 삶의 근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조건이나 근거가 있어야 자연스럽게 또는 조그마한 노력만으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아직은 상상이 더 많지만, 민간 병원보다는 공공 병원에서, 또는 지역의 주민이 상당한 권한을 가진 기관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전문가와 환자 사이의 권력 관계가 바뀔 필요성이 있고, 또 한국의 환자 혹은 의료 소비자 혹은 의료 시민운동이 더욱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해서도 이런 운동은 이제 막 태동기입니다. 이런 운동이 한국에서 더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김창엽 : 우선 보통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국 환자 운동의 역사가 짧거나 경험이 적다는 거죠. 의사가 의사 노릇을 제대로 해본 시간도 짧지만 환자가 환자 노릇을 제대로 해본 것도 짧다는 거죠. (웃음) 그런데 저는 환자 운동이 잘 되는 일이 애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를 대리하는 운동이 훨씬 쉽지, 환자 스스로의 운동은 어렵죠.
왜냐하면, 환자로 있는 기간이 짧습니다. 환자로 있을 때는 굉장히 급한데, 병이 나으면 다 잊어버려요. 노동자는 계속 노동자고, 학생은 그래도 상당 기간 학생인데, 환자는 아니죠. 기본적으로 자기 이해관계가 밑에 깔리지 않는 운동이 잘 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물론 그런 운동이 잘 되면 좋겠지만요.
다만 앞으로 만성 질환이 많아지면서 환자의 종류가 바뀔 겁니다. 지금도 만성 질환을 안고 사는 장기 요양 대상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환자 운동의 양상도 좀 바뀌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잘 안 되었다고 앞으로도 환자 운동이 잘 안 될 거라고 포기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현실에 뿌리를 내린 변화
"전망과 비전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다. 작든 크든 변화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변화는 단절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일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베르토 웅거의 표현으로는 '맥락 보존적 변화'의 비중이 더 크다. 구조를 바꾸려는 싸움은 구조 안에서 진행되는 실천의 연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변혁은 일상적인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대안은 부분적으로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343쪽)
프레시안 : 이 책에서는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리얼 유토피아>(권화현 옮김, 동녘 펴냄)) 또 로베르토 웅거의 '맥락 보존적 변화'(<주체의 각성>(이재승 옮김, 앨피 펴냄)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 지음, 책세상 펴냄) 등의 개념이 중요한 아이디어로 제시됩니다.
우리가 대안을 고민할 때, 이런 아이디어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이 무엇인가요?
김창엽 : 별로 심오한 얘기는 아닙니다. (웃음) 이런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문제의식을 먼저 말씀을 드리면, 지금 건강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너무 기술적인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면 초음파 검사부터 할 거냐, 의치부터 할 거냐 혹은 보험료를 3퍼센트 올리는 게 맞느냐 5퍼센트가 맞느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런 기술적인 문제에 성실히 답을 하면 좋은 삶을 영위하는 좀 더 바람직한 상태가 되느냐 혹은 도대체 좋은 삶이나 바람직한 상태는 무엇이냐, 이런 질문은 던져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더 큰 맥락에서 보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점진적으로 바꾸더라도, 도대체 어떤 목표를 위해서 차근차근 나아가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죠.
특히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가 용기를 자극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라이트가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 결과물인 이 책을 읽고 나서, '아, 우리가 미래 사회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일을 이 정도에서 시작하는 게 불가피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즉, 현대 자본주의의 결과인 지나친 상품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그 대안으로 어떤 '공공성'을 성취할 것인가? 그 과정에서 시민 참여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내놓으면서 보건의료 또 사회의 대안을 찾으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는 거죠.
프레시안 : 이런 아이디어에 비춰 봤을 때, 지금 건강 정의와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과제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김창엽 : 솔직히 말하자면, 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하는 것 아니냐 혹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 혹은 근본 모순에 천착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질문을 던질 여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의 기반이 다 취약하니까요.
그러니까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가 중요하다, 의료생협과 같은 대안 조직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혹은 제대로 된 이론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이 모든 주장이 다 맞는 일이라는 겁니다. 뭐가 필요하냐? 이런 질문에 어리석은 답일지 모르지만, 저의 대답은 다 필요하다는 거예요.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입니다. 매주 간단치 않은 문제의식을 담은 에세이를 한 편씩 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책의 밑그림이 된 '서리풀 논평'은 언제까지 연재할 예정입니까?
김창엽 : 일주일에 한 번씩 에세이를 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서 저 역시 출구 전략을 고민했어요. (웃음) 그런데 폴 크루그먼이 <뉴욕타임스>에 매주 칼럼을 쓴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쓸 거리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쓸 능력이 없다고 하면 몰라도요. 당장 3개월 후에 중단할지 모르지만 일단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프레시안 :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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