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금기를 넘어선 이가 도착한 곳은!

[프레시안 books] 데이빗 아불라피아의 <위대한 바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데이빗 아불라피아(David Abulafia) 교수가 2011년 출간한 <위대한 바다: 지중해 2만년의 문명사(The Great Sea: A Human History of the Mediterranean)>(이순호 옮김, 책과함께 펴냄)의 한국어 번역판을 손에 들었을 때 지중해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른 오디세우스의 항해가 우선 떠올랐다. 단테의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변형시켜 시종일관 하느님의 빛이 사라지는 서쪽,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한 욕망을 추동시키면서 하느님이 금기로 설정한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을 넘어선다. 그런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하느님을 넘어서는 것이면서 또한 인간의 문명의 가능성을 확장한 것이기도 했다. 아불라피아는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지중해를 '위대한 바다'라고 부르면서 "지중해의 인간사(A Human History of the Mediterranean)"를 쓰지 않았을까.

역사적으로 지중해의 오디세우스는 상인이었다. 상인은 지중해의 특성인 교류와 다양성을 가능케 한 대표적인 사회 계층이자 부류였다. 오디세우스의 욕망과 (심지어) 사기 행각은 상인의 그것들을 닮았다. 아웃사이더로서, 국외자로서, 망명자로서, 상인-오디세우스는 지중해를 방랑했고,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 <위대한 바다>(데이비드 아불라피아 지음, 이순호 옮김, 책과함께 펴냄). ⓒ책과함께

과연 지중해는 무수한 국외자를 생산하는 지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지중해와 국외자는 서로를 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국외자들의 유동성. 그것이 만들어내는 엄청나게 복잡한 항로들. 그 자체가 지중해라는 거점 위에서 이루어지고 지중해라는 공간을 구성한다. 그 공간은 민족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지중해의 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말살된 시대를 살아가는, 특정 민족과 국경, 신앙, 언어, 정체에 속한 우리로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물질적 공간이자 역사적 시간으로 구성된 지중해가 생산한 것은 단연 '인간의 문명'이었다. 근대 이후에 지중해가 축소되고 와해된 것은 문명의 축소이자 와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중해는 문명을 키우는 공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문명화의 기획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대서양 시대가 열리면서 역사의 전면으로 나선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은 사실상 문명화의 오만과 다르지 않다. 문명과 문명화는 서로 거의 반대되는 개념들이다. 문명은 자체 안에 이미 교류, 즉 수평적 대화의 관계와 그 작동을 담고 있는 반면, 문명화는 계몽, 즉 야만의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 수직적인 중심주의와 우월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중해 문명의 축소 그 자체를 주목하기보다 그것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위대한 바다>를 비롯해 이 책의 말미에 소개하는, 주로 1990년대 이후에 쏟아져 나온 지중해 관련 서적들은 문명화의 사업을 넘어서서 문명의 맨 얼굴을 기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과연 최근 20년은 지중해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하는 시기라고 할 만하다. '우리의 바다(mare nostrum)'가 재연되고 있다. '우리의 바다'란 로마 제국이 지중해를 둘러싼 육지를 모두 통치하면서 지중해가 온전히 제 영토 안에 들어온 상황을 일컫는 말이었다. 물론 '우리'도 다르고 '바다'도 다르지만, 그 교환의 현장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더욱이 문명이 충돌로 오인되고 문명들이 통폐합으로만 치닫는 현실에서, 교환의 장소와 과정이 아직 살아있고 또 그것에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문명적 대안을 희망차게 바라본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이 지중해라는 문명 교류의 모델을 지속시키는 주체를 말한다면, 그런 우리에게 지중해는 무엇인가? 먼 세상 얘기인가, 신화와 전설의 공간인가, 아니면 지금 이후로 격변하는 세계에서 다변화시켜야 할 우리의 시야가 머물러야 할 곳인가.

지중해를 참조하려 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지중해 문명이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과거로 진지하게 향해야 할 것이다. 지중해의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아는가. 유럽(서구) 중심의 빈약하고 구차하고 허위로 가득 찬 역사에 사로잡힌 우리 시각은 과거의 지중해가 제공하는 균형 잡힌 통찰과 세계관을 과연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지중해이며, 지중해는 모든 이들의 문화적 소유물이라는 아불라피아의 일성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 중앙 제단 뒤쪽에 설치된 패널. ⓒ책과함께 제공

2000년 여름 옥스퍼드의 한 서점에서 호든과 퍼셀이 함께 쓴 <오염되어가는 바다(Corrupting Sea)>를 대했을 때 나는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것은 지중해를 바다, 특히 생태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학적 관점에서만 그치지 않고 여러 측면들로 확장하고 연결해나가는 구성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위대한 바다>와 더불어 과거의 그 호기심이 조절되는 것을 느낀다. 바다를 생태의 기반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위대한 바다>는 바로 그 점을 인식했고(그래서 원서의 부제는 "지중해의 인간사(A Human History of the Mediterranean)"다), 그를 근거로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브로델이 지중해의 자연 조건을 지중해 정체성의 근간으로 보면서 지중해를 둘러싼 육지들의 지형, 항로를 결정하는 바람과 해류 등 지중해 자체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에 따라 거대한 변천의 거대한 역사 서술을 목표로 했던 것에 비해, 아불라피아는 자연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지중해를 넘나든 인간들의 경험과 삶에 더 눈을 돌렸고 그들이 내린 정치적 결정이 지중해를 형성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아불라피아는 지중해라는 바다에서 문명들이 통합되고 분열되는 양상들을 조명했다. 그 통합과 분열의 이유는 정치나 종교, 경제, 전쟁, 환경, 질병 등 다양했다. 문명을 이루어내는 것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의 요소들이라는 어쩌면 평범한 진리를 적용한 것이다.

지중해를 자연으로 보느냐 인간 활동의 터전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이 책을 브로델의 기념비적 저서로부터 구별하는 지표다. 권위를 자랑하는 브로델의 방대한 연구는 모든 변화는 느리게 진행되며 인간은 운명에 속박되어있다는 사상 위에 서 있다. 아불라피아는 이런 생각에 회의적이다. 브로델이 특정 시대를 중심으로 한 수평적인 고찰을 통해 지중해를 담아냈다면, 아불라피아는 전 역사에 걸친 시대적 변화에 대한 수직적인 통찰을 통해 지중해를 펼쳐낸다.

아불라피아는 지중해의 통합성과 함께 다양성에 더욱 주목하는 입장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사실 과거의 역사에서 부단한 변화를 이루어온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인 차원들을 들여다보면, 지중해는 통합된 이미지를 계속해서 무너뜨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날실, 공간-씨실의 상호 교직. 그 무수한 가능성들의 조합. 그것은 지나온 과거의 지중해가 우리에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또 우리가 지중해를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직의 결과 무수한 무늬의 옷감들이 만들어지더라도 그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정할 텐데, 바로 그것이 '지중해'라고 불리는 것의 본질이다. 그 일정한 분위기야말로 지중해가 지닌 다양성을 지중해의 특징적인(아마 여기에 '통합된'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겠다) 얼굴을 통해, 또는 그것을 넘어서서 볼 수 있는 근거이자 방법이다. 자체로는 하나인데 무수한 모습들로 나타나는 이러한 미묘한 존재 방식은 지중해의 인간들이 자연 환경부터 종교와 언어, 정치, 경제 따위의 '관계'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요컨대 지중해는 다양한 흐름들을 만들어낼 환경을 지닌 하나의 독립된 모태다. 그 모태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 다양한 문명들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문명들은 다시 그 모태를 만들었다. 순환하면서도 결코 갇히지 않는 그런 열린 운동과 함께 지중해는 자기 변신의 정체성, 무소속의 정체성을 견지해왔다.

▲ 베네치아 선단이 투르크족 대선단을 무찌르는 모습. ⓒ책과함께 제공

이 책은 상상도 하기 힘든 오랜 시간 전에 존재했던 지중해부터 바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유구하게 흘러온 장구한 세월을 우리에게 펼쳐낸다. 그 속에서는 얼마나 많고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얼마나 기구한 운명들이 반복되었던가. 그 속에서는 얼마나 웅장한 문명들이 일어났다 스러지고 얼마나 원대한 구원의 약속들이 세상을 이끌었던가. 그 속에서는 얼마나 뜨거운 도전과 탐험, 얼마나 깊은 사고와 지식이 물결을 가르며 왕복했던가.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사이로 세차게 흐르는 물길만이 지중해를 바깥세상과 연결시켜주었지만, 지중해는 결코 고인 물이 아니었다.

지중해는 오디세우스를 회상하게 만드는, 영원하게 되풀이될 인간의 도전에 알맞은 크기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다. 가다가다 보면 끝이 나오고 또 돌아갈 길이 나오는 꼴이다. 그에 비해 대서양은 너무 크다. 대서양이 건너야 할 '대상'일 뿐이라면 지중해는 나가고 다시 돌아와야 할 '집'이다. 그래서 지중해는 언제나 '우리의 바다'인 것이다.

대서양 시대가 개막하면서 지중해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은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인 흐름이었지만, 분명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참으로 안타까운 반문명적 진행의 서막이었다. '우리의 바다' 지중해를 문명의 재건설을 향한 우리 인간의 도전의 터전으로 돌이켜야 할 이유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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