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번에 나온 두 권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하나는 전기물(<클린트 이스트우드 - 목표 없는 청년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마크 엘리엇 지음, 윤철희 옮김, 민음인 펴냄)), 또 하나는 그의 생각과 육성을 담은 인터뷰 모음집(<클린트 이스트우드 - 거장의 숨결>(클린트 이스트우드 지음, 로버트 E. 카프시스‧캐시 코블렌츠 엮음, 김현우 옮김, 마음산책 펴냄)이라는 것은, 현재 이스트우드에 대한 관심이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그'라는 인물 자체에 집중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각각의 책에 붙여진 부제들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이스트우드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편집된 책에는 '거장의 숨결'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으며, 전기물의 부제는 '목표 없는 청년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이다. 아직 생존해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현직 배우-감독에게 '거장의 숨결'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도 눈에 띄지만, 특히나 요즘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 유의 어조를 띠고 있는 후자의 부제는 흥미롭다.
| ▲ <클린트 이스트우드>(마크 엘리엇 지음, 윤철희 옮김, 민음인 펴냄). ⓒ민음인 |
과연, 어떤 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에서 '성공 신화'를 일군 대표적 인물로서 간주될 만하다. 그러나 진정 그의 행보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처럼 꿈을 성취해나가는 화려한 성공가도 이면에 숨겨진 어두움의 측면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에 대한 책이 두 권이나 나올 법한 타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앞서 꿈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꿈은 그의 영화에서 중요하다. 꿈, 정확히는 악몽은 그가 즐겨 다루는 도덕적 문제를 표출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가령 초창기 영화 <평원의 무법자>에서 개인과 집단의 악몽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보라.) 그는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감독이며 특히나 미국적 가치관에 대해 전면적으로 발언하고 있는 드문 감독이지만, 그의 도덕론은 선악이 모호하다 못해 뭉개져버린 폐허 위에 기반하고 있으며, 어쩌면 이러한 폐허 위에서(만이) 미국의 역사는 흘러올 수 있었노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이스트우드는 예컨대 미국적 주제라는 측면에서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를 스필버그와는 달리, 미국 내에서 거장 감독으로 자리 잡기까지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미국에서 쉽게 인정받기 힘들었던 데는 스타 배우로서의 그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에야 적지 않은 배우들이 감독으로서도 역량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가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내놓았던 1971년 당시만 해도, 이것은 파격적이며 건방지기까지 한 시도였다. 이스트우드가 도처에서 강조하듯 그 몇 년 전 돈 시겔 감독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그보다 앞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름 없는' 3류 배우였던 그가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레오네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속 '이름 없는 자'의 역할이었다는 것은 이스트우드의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는 낯설고 심지어 외국인에 가까운 자였으며, 그가 감독 일을 시작한 후로도 이 이국적 존재에 대한 속된 호기심과 근본적 불신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인물을 둘러싼 공간과 환경 묘사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그려내는 그의 탁월한 연출 재능을 먼저 발견하고 높이 평가한 것은 유럽의 평론가들이었으며, 해외 영화제의 기회들을 통해서였다. 말하자면, 이 철저하게 미국적인 감독은 놀랍게도 미국의 외부인으로서, 이방인으로서, 미국 공동체의 어떤 균열이자 불온한 침입자로서 스며들었던 것이다.
| ▲ <클린트 이스트우드>(클린트 이스트우드 지음, 로버트 E. 카프시스‧캐시 코블렌츠 엮음, 김현우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
그런 점에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서부극 장르가 아닐 경우에도 한결같이 일종의 서부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카우보이'들의 행보가 정의이며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미국의 역사라는 것. 비극적 진실은 저 속을 헤아릴 수 없는 검고 신비로운 강물 속에 깊숙이 묻어버린 채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양 시치미 떼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미국의 현재라는 것이다.
미국적 가치와 강력한 남성 영웅에 대한 그의 집요한 추구는 그에게 또 다른 편견의 굴레를 씌워 왔다. 초창기 더티 해리 시절부터 이스트우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인물로 비판받아왔으며, 이러한 비판적 시선은 지금까지도 일정 부분 평단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러나 어떤 작품의 가치를 그것을 만든 이의 정치적 입장 혹은 대외적 제스처로 환원시켜 평가하려는 시선의 위험성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작품과 행보는 그처럼 간단히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트우드는 감독으로서의 직무에 있어 그토록 효율적이고 명료하기로 이름난 것과 달리 그 밖의 사생활면에서는 (자신의 영화 속 캐릭터처럼) '이름 없는 자' 혹은 '침묵하는 자'로 남기를 고집한다.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어쩌면 그저 '이름 없는 자'의 행보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가 만든 제작사 말파소(Malpaso)는 '험한 산길', '곤경' 같은 뜻을 가진 스페인어이다. 클린트가 소유한 토지에 흐르는 강 이름에서 따왔다는 이 이국적인 이름은 적은 예산과 최소한의 인력으로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겠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겠지만, 동시에 그가 생각하는 정의와 정체성의 문제란 (국경과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곳이 어디든 그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인터뷰 곳곳에서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레오네와 자신의 서부극 스타일에 대하여 분명한 차이를 강조한다. 요컨대 레오네가 스타일에 치중한다면, 자신은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땅과 그 땅에 거주하는 자들의 이야기. 무엇보다 그 땅에 새롭게 들어오게 된 자들과의 이야기. 이스트우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며, 이것이 그가 안정된 거장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는 불온한 자들의 악몽의 서사시를 계속하여 길어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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