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우울증 아냐. 사소한 고통이야!" 불편한 이유?

[프레시안 books] 에릭 메이젤의 <가짜 우울>

속았다. 인터넷으로 쉽고 빠르게 구매하는 습관 탓이다. 대체로 제목에 의지하는 편이다 보니, 종종 이런다. 생각해보면, 만족감을 주었던 책은 손가락에 꼽는다. 후회하면서도 되풀이한다. 이번에는 다르길 기대했으나, '역시나'였다. 덮어버릴까 고민했다. 숙제하듯 읽었다. 그러니까 에릭 메이젤의 <가짜 우울>(강순이 옮김, 마음산책 펴냄)은 '제목만으로 고른 책은 실망감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해준 셈이다.

기대했다. 위로와 치유를 목적으로 한 각종 프로그램과 책이, 되레 불안을 부추기는 게 아닐까 싶은 요즈음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조차도 우울증이라고 자가 진단하며 병원을 찾는다. 병원 밖에도 우울을 호소하는 이가 적지 않다. 직업 때문이겠지만, 힘겹다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가끔 두렵다. 하여, 틈나면 '우울'을 읽고, '우울'을 공부한다. 이런 내게 <가짜 우울>은 유혹이었다. 귀가 쫑긋해졌다.

▲ <가짜 우울>(에릭 메이젤 지음, 강순이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저자는 '우울증이란 정신 장애가 아닌, 인간의 슬픔일 뿐이며, 정신장애라는 용어는 전문가들을 위해 쓰는 말일 뿐, 진정한 의학적 질병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건강 산업의 거짓 선전에 속고 있다'라는 명제를 검증하는데 상당 분량을 할애했다. '삶의 원치 않는 측면을 모두 정신장애 증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실로 엄청난 실수'라고 덧붙인다. 슬픔을 느끼면서도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전문가를 찾아가 프로작과 같은 알약에, 치료사에게, 사회복지사와 목회자에게 의지하는 일을 비판한다.

'인간이라면 겪기 마련인 고통을 겪고 느끼면서, 그 불행을 우울증이라고 부르도록 길들여진 보통 사람'이 '정신건강 산업'의 '교묘한 조종'을 간파하기란 무척 어렵다고 말한다. 일정 부분 수긍한다.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애인과 헤어져서, 사업이 잘되지 않아서, 원하던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원을 찾고도, 대부분 우울증이라고 말하니까 말이다. 더러는, 사별 후에 겪는 당연한 고통과 슬픔도 우울증으로 인식하는 때도 있다. 일상어가 된 듯도 하다. 오죽하면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겠는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들 모두 우울증 진단을 받는 건 아니다.

'삶은 고(苦)'라 하지 않던가. '행복'을 부르짖지만, 늘 유쾌하고 행복할 거라고 믿는 건 환상이요, 지나치면 망상임을 안다. 좋은 일 한 번에 나쁜 일 한 번이면 상당히 운 좋은 거라 믿는다. 대부분 서너 번의 불행 뒤에 찰나의 행복이 찾아오기 일쑤니까 말이다. 고난과 시련은 옵션처럼 삶의 곳곳에 따라붙는다. 그러니 에릭 메이젤의 말처럼 인간 고뇌, 삶의 고단함을 모두 우울증으로 진단해선 곤란하다.

저자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과 부적 행동의 원인을 정신장애로 진단하고, 병리적 문제로 접근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되풀이한다. 심리적 불편감, 불쾌한 감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므로, '실존 지능'을 활용하여 처리하라고 재촉한다. 스스로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의미화 전략'을 소개했다. 사례를 들어가며, 효과도 내세운다. 제법 솔깃하다. 저자의 말대로 매뉴얼을 익혀서 반복한다면, 우울증 따위는 거뜬하게 털어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호기심 생겼다. 내심 기대도 했다.

구성은 이렇다. 첫째,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 둘째, 의미란 무엇인지 파악한다. 셋째, 중요한 존재가 되기로 한다. 넷째, 의미 창조자로 자신을 임명한다. 다섯째부터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심호흡 크게 한다. 속는 셈 치고 계속 읽어 보기로 했다. 자긍심의 원칙에 따라 의미를 만든다. 욕구와 필요, 가치를 고려한다. 삶의 목적이 담긴 문장을 만들거나, 실존 지능을 활용하거나, 기분보다는 의미에 집중하고, 개인적, 문화적 최면을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그 외에도 자신의 현실을 고려하고 의도를 지지하는 문장을 되뇐다든가, 아침마다 그날의 의미 계획을 세우고 실존적 자기 돌보기에 힘쓰라는 말도 전한다. 지겹다. 이런 종류의 안내서. 우울증 치료에 효과 좋다던 인지행동 치료법에서, 힐링을 주제로 한 책에서도 질리도록 사용한 방법이 아니던가.

우울증이란,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닷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슬픔의 근원에 대한 탐색 없이 무분별하게 낙인을 찍지 않는다.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 슬픔과 불행을 병리적으로만 해석하는 정신건강 전문가가 얼마나 될까 싶다. 누구에게나 삶의 순간엔 막막함도 온다. 버겁기도 하다. 그때마다 우울증이라 진단한다면, 여기서 자유로울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누군가의 우울은 방문을 나설 힘조차 없는 상태로, 더러는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자해, 폭식이나, 거식처럼 상징적인 자기 파괴의 방식으로도 등장한다. 원인 또한 저자의 말처럼 단순하고 사소한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아침마다 자신에게 힘주는 문장을 되뇌고, 자기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의학적으로 진단하는 우울증으로 볼 수 있을까 싶다. 건강한 사람도 꾸준히 적용하기 어려운 기법을 소개한 저자가 야속하다. 또한, 삶의 고뇌와 병리적 우울을 구분하지 않은 면에서는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맞다. 누구도 '정신건강 산업의 희생양', '먹잇감'이 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은 스스로 움켜쥐고 살아야 한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결정하고, 저항하고, 협상하면서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다만, 현재의 고통과 슬픔을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면, 의학적 요법이건, 전문가의 도움이건 찾아 나설 수 있는 일 역시 건강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가짜 우울>의 치우친 관점이 자칫 우울증을 정신력의 문제라거나, 개인 의지 탓으로 돌림으로써 실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중 고통을 주게 될까 봐 염려된다.

그렇다. 저자가 우려했듯 정신건강 전문가의 관점에서 볼 때, <가짜 우울>은 불편하다. 억지스럽고, 염려되는 면이 많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우울증과 인간 삶의 슬픔은 구별되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말미암은 슬픔을 손쉽게 '우울증'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우울증이 과잉 진단되는 측면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 것만큼은 중요하리라 본다. 이 때문에 <가짜 우울>을 제목만 매혹적인 그저 그런 책쯤으로 폄훼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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