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말아먹은 '아첨의 달인', 여기 다 모였네!

[김성희의 '뒤적뒤적'] 김영수의 <간신론>

"정치를 경멸하는 국민은 경멸받을 수준의 정치밖에는 소유하지 못한답니다. (…) 명말 청초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고증학에 일가를 이룬 고염무(顧炎武)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그 백성들 책임'이라고 일갈했습니다. (…)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누가 나라를 살리고 누가 나라를 망칠지 그 구별법을 찾아본 책입니다. 구별만 한 것이 아니고 나라를 망칠 '놈'들은 찾아서 응징하자는 뜻입니다. '될 놈'을 밀어줄 것이 아니라 '쓸 놈'을 찾아냅시다."

약간 길긴 하지만 이건 김영수의 <간신론>(아이필드 펴냄) 뒷날개에 실린 '편집자가 드리는 글'의 일부다. 사실 이런 유의 글은 여느 책에선 보기 힘들다. 한 권의 책이 나오는 데 편집자의 구실은 막대하지만 '보조' 취급을 받는 통에 자신을 드러낼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필자가 쓰는 '감사의 글'에 그 이름이 의례적으로 언급되는 정도에 그칠 따름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명멸하는 군상들을 보면서 이 책을 다시 뒤적이다 수줍게 숨어있는 이 글이 눈에 들어왔다. 2002년 나왔을 때는 왜 못 봤는지 의아하면서도,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라 글을 쓴 이가 궁금했다. 한데 판권 란엔 '펴낸이'만 실렸을 뿐 요즘과 달리 편집자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을 만든 이, 어디에 있든 부디 좋은 책을 만들고 있기를.

정말 사설이 길었다. 책은 국내에서 <사기(史記)> 전문가로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가 1991년 중국에서 나온 '변간신론(辨奸新論)'을 편역한 것이다. 목차를 비롯해 체제 전반을 손보고, 번역도 철저하게 했기에 편역자의 이름으로 선보였다. (2011년 출간된 <간신론, 인간의 부조리를 묻다>(왕의서재 펴냄)에선 원저자(징즈웬·황징린)의 이름을 표지에서 밝혔다.) 그래서인지 중국사에서 주제별로 일화를 골라 모은 것이 아니라 '론'이란 제목에 걸맞게 간신을 구별하고, 제압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다뤘다.

▲ <간신론>(김영수 편역, 아이필드 펴냄). ⓒ아이필드

사실 간신은 정의하기도 쉽지 않고, 구별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송나라 신종 때 재상 왕안석이 좋은 예다. 그는 균수법, 보갑제 등 나라를 구할 실용주의적인 '신법(新法)'을 추진하다 좌절한 명신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309명의 간신배 이름을 새긴 비석 '원우당적비'에 올랐다. 중국사의 간신 중 간신으로 불리는 채경이 주도해 비를 세운 탓이라지만 왕안석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는 시각도 있다. 반대파에 엄정하면서 하는 일 없이 일을 그르치는 등관이나 훗날 그가 실각하자 즉각 낯을 바꾼 여혜경 등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권세를 좇고 권세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무리들이 '새로운 정치'란 허울을 쓰고 '변법'의 주도 집단에 마구 섞여 들어갔다"고 지적한다.

고대 중국의 위정자들은 간신 문제로 꽤나 고심했던 모양이다. 고대 변간 이론을 정리한 제2장에서 강태공이 지었다는 병법서 <육도(六韜)> 등 다양한 고전에 실린 인재 가리는 법을 소개한다.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극이 위(魏) 문후(文候)에게 "평소에는 그와 가까운 사람을 살피고, 부귀할 때는 그와 왕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한 상황에서는 그가 하지 않은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라고 사람을 고르는 다섯 가지 표준을 열거한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순자> 신도(臣道) 편에 있다. "명령을 따르고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명령은 따르는데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하면 첨(諂)이다. 명령을 거스르고 군주를 이롭게 하면 충(忠)이라 한다. 명령을 거스르고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하면 찬(纂)이다. 군주의 명예나 치욕, 그리고 나라의 흥망을 돌보지 않고 구차하게 영합해서 녹봉만 받으며 사교에만 힘쓰는 것을 국적(國賊)이라 한다"고 했다. 군주를 국민으로 바꾸면 21세기에도 통용되는 구분 아닐까.

간신들의 행태를 분류한 제5장 간(奸)의 성격 분석에는 요즘에도 볼 수 있는 행태들이 나온다. "공을 탐내고 잘못은 숨기며 죄와 책임을 남에게 미룬다. 세상을 속여 이름을 훔치며 공로는 자기 것으로 만든다" "자신과 뜻이 다르면 배척하고, 어질고 뛰어난 인물을 조정에서 내쫓는다. 사사로이 자기 측근을 기용하고 범과 이리를 아무데나 끌어 들인다" 같은 구절이 그렇다.

책에는 북제의 대간 화사개란 인물이 나오는데 자기를 떠받드는 자라면 "자질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발탁했다." 유덕선이란 별다른 재주가 없는 관상쟁이는 화사개의 관상을 볼 때 꼬리를 쳐서 일약 부참군(府參軍)에 임명되기도 했다. 표심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지난 행적이나 정치적 소신에 상관없이 합종연횡하는 우리 선거 풍토에선 이런 일이 없을까.

간신의 행동 원칙, 수단, 술수를 정리한 제6장 간(奸)에도 도(道)가 있다에선 떠받들기, 권세 과시하기, 부러 일 만들기 등 이들의 수법이 나오는데 원나라 때 국자제주에 올랐던 허형(許衡)의 지적이 명쾌하다.

"삐딱한데도 곧은 것 같고, 속이는 데도 믿음직한 것 같다. 아첨하는데도 친근한 것 같다. 군주의 희로애락을 잘 살펴 기분을 맞추고, 군주의 위엄을 훔쳐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 하며, 군주의 욕망을 채워 군주의 귀여움을 차지하려 한다. 위로는 귀여움을 구걸하고 아래로는 위엄을 떨친다. 대신들이라도 감히 의논하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런 자들을 제거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니 우리의 관심은 이런 간신들을 가려내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일일 터이다. 이는 책의 제12장 역사로 하여금 미래를 말하게 하라에 실렸다. '재능만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 '잘 따른다고 기용해서는 안 된다' '지도급 간부의 모범적인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등 상식적인 처방이 담겼다.

<자치통감>을 쓴 송나라 명신 사마광 이야기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는 "대체로 덕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엄하고 재주 있는 자는 귀여움을 받는다. 귀여움을 받으면 금세 가까워지나 엄하면 쉬 멀어진다. 이 때문에 사람을 살필 때 재주에 덕이 가려지는 것"이라며 "재주는 덕의 자질이요, 덕은 재주를 이끄는 장수와 같다"고 했다.

어지간한 일은 이르고 늦고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21세기에도 권력자의 곁에서 총명을 흐리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은 여전히 존재한다.

"임금은 오로지 한 마음인데 그 마음을 공략하려는 자는 너무도 많다. 힘으로, 말재주로, 아첨으로, 간사함으로, 임금이 좋아하는 것으로 무차별 공략하여 서로 귀여움을 차지하려 든다. 임금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져 그 중 하나라도 받아들였다가는 당장 위기와 망조가 뒤따른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기도 한다. 백성은 물과 같고 군주는 배와 같으니라."

명군으로 꼽히는 당 태종의 명언이다. 국가 지도자뿐 아니라 크든 작든 조직의 리더라면 마음에 새겨야 할 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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