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정' 남발하는 그 대선 후보, 의심스럽다!

[김성희의 '뒤적뒤적'] 제이미 화이트의 <나쁜 생각>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제이미 화이트의 <나쁜 생각>(유자화 옮김, 오늘의책 펴냄)은 뒤늦게, 우연히 읽었다. 보도 자료에 요즘 정치판을 겨냥한 듯한 대목을 보고 손에 든 것이다. 문제의 대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영국의 보수당 정부 때 일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국가 발전을 위해 국민의 교육 수준을 높여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를 위해 더 많은 시민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 실현 방안이었다. 대학 졸업자를 크게 늘리려면 먼저 대학교를 더 많이 짓거나 적어도 기존 대학교의 학생을 증원해야 했는데 교수진을 확보하거나 시설을 증축하는 것 모두 막대한 비용이나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기술전문대학(technical college)을 '대학교'라고 부르자는 멋진 아이디어를 냈고 이것이 채택되었다. 그렇게 해서 거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1990년대에 영국의 대학교 수는 거의 두 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학 교육'을 받은 시민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얄팍한 수라면 우리 정치에도 많지 않을까 싶어 혹해 펼쳤는데-인정한다. 꼬인 성격이다-내용이 꼭 그렇지는 않다. 정치 행태도 꼬집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무리한 논리를 비판하는 데 비중이 실린 책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논리학 책인데 정치·경제·사회 등 실제 사례를 들었기에 그런 '기대'를 갖게 했을 따름이었다.

지은이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했던 인물인데 꽤나 성마른 인물로 보인다. 허튼 소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신문사로 항의 편지를 보냈다고 '감사의 글'에 쓴 걸 보면 말이다.

▲ <나쁜 생각>(제이미 화이트 지음, 유자화 옮김, 오늘의책 펴냄). ⓒ오늘의책
어쨌거나 제목의 '나쁜 생각'이란 우리를 오도하는 잘못된 논리로 이해되는데 지은이는 허튼 소리의 원인과 사례를 '애매어의 오류'에서 '도덕병'까지 열두 가지로 나눠 설명하는데 풍부한 사례가 뒷받침되면서 상당히 흥미롭다.

"동종 부문의 최강의 경쟁자와 비교해 벤치마킹한 결과 지적 자본 레버리지가 주목할 만한 미래 상향 잠재력을 나타냈다."

어렵고 공허한 말로 듣는 사람을 홀리는 '반계몽주의' 편에 실린 사례다. 아이비리그 경영 대학원을 나와 하루 5000달러를 청구하는 경영 컨설턴트들의 어법이다. 일상적이고 사소하며 이해하기 쉬운 말들을 이상하고, 대단하고, 모호한 말들로 바꾼다며 꼬집은 것이다.

지은이는 '비교해 벤치마킹했다'는 '비교했다'는 뜻이며, '지적 자본'이란 회계 회사의 경우 덧셈 능력과 세금에 관한 법률 지식이 지적 자본의 일부라고 꼬집으며 자본은 회사 자산에서 부채를 감한 것을 말하는 만큼 '지적 자산'이 정확한 표현이라 지적한다. 결정적인 것은 '레버리지'란 컨설팅 용어는 그저 '이용'이란 의미에 불과하므로 이 말은 결국 '당신의 회사는 다른 회사들처럼 직원의 아이디어 더 잘 이용해야 합니다'란 의미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경제 분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어떤가.

"주로 <겨울 이야기>를 분석하는 이 논문에서 해럴드 포크너는 정서성과 감정 사이의 인지 가능한 차이에 대해 현상학적 서술을 연구한다. 그는, 거대한 비극에서 소위 로맨스로 옮아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원인과 결과, 상징성, 결정적 맥락성으로 명백하게 조건적인 세속에서 정서가 유사 심미학적으로 단절되었다고 이해하는 데만 몰두했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이 글이 문법적으로 잘못 된 것은 없지만 독자와 소통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무의미한 말로 학자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거나 불가해한 장황함으로 생각의 진부함을 감추려는 것일 수 있다고 비판한다.

"시끄러워"-논박이란 장에서도 기막힌 사례가 보인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 미술 상인 터너 상의 후보작에 대해 문화부 장관이 "모두 상 받을 가치가 없다"고 혹평하자 수상자는 "장관이 더 나은 작품을 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장관의 평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닌 만큼 "당신이 더 잘할 수 있어?"란 반응은 반론이 아니라 폭력이고 협박이라 주장한다.

'권위의 오류'란 것도 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 해서 무관한 분야의 의견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유명 가수가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한다 해도 그 후보가 더 적절한 대통령감이란 근거는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 지은이는 흔히 인용되는 "우리는 두뇌의 10퍼센트밖에 쓰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논박한다. 아인슈타인이 천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두뇌 사용에 관해서는 그가 보통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말이라 해서 무조건 옳다고 따르는 것이 진실로 가는 길은 아니란 것이 지은이의 지적이다.

이 정도라면 책의 성격이 짐작될 것이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스티븐 로 지음, 윤경미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가짜 논리>(줄리언 바지니 지음, 강수정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처럼 생각의 오류를 가려내는 법을 다뤘다. 다른 점이라면 현실에 훨씬 밀착해 있다는 점인데 이 덕에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훨씬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국민' '여론'을 따져보자. 민주주의에서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정치적 권위이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지만 국민 대다수가 경제, 법, 국제 관계 등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라는 괴리가 있다. 결국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이나 '여론'을 들지만 실은 국민의 뜻이 문제를 '결정'하긴 하지만 누가 또는 무엇이 옳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란다.

정치인들이 환심을 사기 위해 구호성 말을 남발하는 것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정의' '공평' 같은 말들이다. 누구나 정의를 좋아한다. 단지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뿐이다. 국가 발전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더 부자가 된다는 말인가? 자유로운 시간이 더 많아진다는 뜻인가? 죽었을 때 천국에 갈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어떤 정책이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투표 전에,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기 전에 곰곰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아닌가. 다시 '대학'을 새롭게 정의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은이는 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는데 공공편의 시설이라고 이름을 바꾼다고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꼬집는다. 냄새를 없애려면 청소를 하거나 시설을 고쳐야 하는 게 마땅하다. 어떤 것을 다르게 묘사하거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지적에 이견을 달 이가 있을까.

책을 읽다 보면 정치 무관심 혹은 냉소주의가 당연해 보이지만 지은이는 '냉소'는 빈약한 방어라 충고한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믿는 만큼이나 어리석고 위험하다는 지은이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대선의 계절'에 적절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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