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짖어서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세요?

[김성희의 '뒤적뒤적'] 윌리엄 어빈의 <직언>

'철학'은 싫다. 들뢰즈니 라캉이니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솔직히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간단히 해도 될 말을, 공연히 어렵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호학이니 현상학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슨 세상의 비밀을 혼자만 아는 것처럼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것으로 들린다.

책으로 치자면 꾸역꾸역 읽기는 하되 소화 불량에 변비를 일으키는 그런 종류다. 이런 무지함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농간(?)을 파헤친 <지적 사기>(앨런 소칼·장 브리크몽 지음, 이희재 옮김, 민음사 펴냄)란 심리적 응원군에 힘이 붙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탓만이 아니다'란 믿음이 생긴 것이다.

해도 '철학'에 눈 돌리고 살 수는 없다. '철학'이란, 기업 문화에서 댓글 문화까지 온갖 것에 붙이는 '문화'처럼 어지간한 것에 더해져 일상에서 툭툭 부딪치기 때문이다. 경영 철학에 인생철학, 심지어 개똥철학이란 말도 오르내리지 않는가. 게다가 명색이 북 칼럼니스트-누가 이런 타이틀을 인정해준 것도 아니라 자처한 것이긴 하다-이니, 적어도 책이라면 분야를 가려 읽을 처지가 아니다. 그러니 철학책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 <직언>(윌리엄 어빈 지음, 박여진 옮김, 토네이돋 펴냄). ⓒ토네이도
이런 딜레마를 대체로 철학사나 어록을 읽는 것으로 헤쳐 나가곤 했다. 미국의 대학 철학과 교수가 쓴 <직언>(윌리엄 어빈 지음, 박여진 옮김, 토네이도 펴냄)도 그런 편법에 동원하기 위해 고른 책이다. 부제 "죽은 철학자들의 살아있는 쓴 소리"는 어째 수상한 냄새가 풍겼지만 삶의 고비 고비에 쓸 만한 이야기를 담았겠다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봤다"다. 적어도 내 수준에선 그렇다. 듣기 좋은 말만 담은 '위로'도 아니고, 문장이 화려하거나 깊은 뜻을 담은 명언이 많은 것도 아닌데 고개를 주억거리고 밑줄을 그을 대목이 너무 많았다. 생각해 보니 책이 온통 벌겋게 될 판이라 중간에 밑줄 긋기를 그만뒀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글방 펴냄) 이후 처음 만난 '진객'이었다.

아, 먼저 오해를 풀어야겠다. 이 책은 철학사나 특정 사상의 해설서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스토아 철학을 현대인에 맞게 풀이한, '행복 레시피'다.(원제도 "좋은 삶을 위한 안내(A Guide To The Good Life)"이다.)

흔히 금욕주의로 옮겨지는 스토아 철학의 네 현자, 세네카, 무소니우스 루푸스, 에픽토테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작과 행적을 인용해 가며 모욕과 슬픔, 노년과 소외 등에 관한 처방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새삼스럽게 케케묵은, '꼰대'-지은이의 표현이다. 원어는 모르지만-들의 철학인가. 2000년도 더 된 사상이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화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지은이는 스토아 철학의 배경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스토아 철학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혼란스럽고 미래가 불확실했던 시대에, 무기력하고 무능해진 보통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됐기에 물신주의, 외모지상주의, 쾌락주의가 판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묻는다. 자기 자신과 자기 인생에서 가능하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또 무엇에 만족하느냐고. 대부분 앞의 질문보다 뒤의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외모, 출신 배경, 나이, 몸무게 등 개인적인 것에서 배우자, 직업, 자동차, 은행 잔고까지 불만족스런 사항은 많지만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찾기란 힘든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대부분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 삶을 일관성 있게 이끌어갈 삶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사소한 쾌락과 욕망을 억제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행복을 손에 넣는 심리 기술로 부정적인 상황 설정, 통제의 3분법, 운명론적 태도, 자기 부인 네 가지를 제안한다.

'부정적인 상황 설정'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더 열악한 상태를 상상해 보고 위안을 얻는 방법이다. 자칫 비관주의와 혼동할 여지가 있지만 오히려 '완전한 낙천주의자'가 되는, 삶에 감사하고 그로 인해 기뻐할 줄 아는 능력을 되살리는 방법이란다. 현실에만 얽매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게 하고 소유한 것들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하라는 권유인데 이를테면 실직을 한 처지라도 중병이 들어 운신을 못하거나 가족을 잃는 아픔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지금이 최악은 아니다' 생각이 드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통제의 3분법은 우리가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부분적으로만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파악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내 일이 아닌 것은 걱정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분노나 근심만 키울 뿐 아무 소용이 없는 만큼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타당한 조언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이 나를 조롱하는 것을 멈추게 할 힘은 우리에게 없다. 따라서 그들의 조롱을 멈추게 하려고 기를 쓰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러니 우선은 조롱받을 만한 일을 하지 말고, 그러고는 모든 시간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에 투자하라는 아우렐리우스의 충고는 귀 기울일 만하다.

그러면서 개가 당신을 향해 짖을 때면 그 개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 종일 "어쩌면 좋아! 개가 나를 싫어해!"라고 언짢아하지는 않느냐고 조언한다.

"우리가 소유한 것은 운명의 여신이 잠시 맡겨둔 것일 뿐 참된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 가진 것을 잃을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말이다. 자기 통제에서 비롯된 진정한 자유 또는 철저한 무소유는 선불교나 노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명예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적 지위를 추구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지배하는 권한을 주는 셈이라고 한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노예가 될 것이란 이유에서다.

아, 이제 나는 이 책이 썩 마음에 들지만 모두의 맘에 드는 '만능 행복 처방전'이 아님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저마다 행복에 관한 정의가 다른 만큼 사실 그런 처방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이 책은 눈부시진 않아도 속이 꽉 찼다. 모든 이들이 이 책의 내용을 실천한다면-이건 도덕률의 평가 기준 중 하나다-"악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악한 사람일 뿐"이란 자조는 덜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끝으로 세네카의 질문을 전한다.

"왜 살아있는 동안 사랑받는 존재, 떠났을 때 그리운 존재가 되도록 자신을 만들지 않는가? 왜 즐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즐겁지 않은 삶을 사는가? 왜 그렇게 사는가?"

우리는 어떤 답을 준비해야 할까, 아니 어떤 답을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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