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족이 성기에 피어싱을 하는 진짜 이유는…

[김성희의 '뒤적뒤적']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의 <혁명을 팝니다>

먼저 쑥스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이 책은 묵혔다가 읽었다. 일간지에서 출판을 담당하고 있을 때 만났는데 '물건'인 줄은 알아보았다. 그래 문화 전문 기자에게 서평을 부탁해 싣긴 했는데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책을 재어 놓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서평만 읽고는 어디 가서 이 책을 읽은 척 하지는 않았다. 참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손에 든 것은 몇 년 뒤 나온 같은 저자(조지프 히스)의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을 인상 깊게 읽은 덕분이다. 좌도 우도 아닌, 순수한 학자의 입장에서 양 진영 경제 논리의 허점을 짚은 이 책이 그 해 '올해의 책'으로 뽑히는 데 한 표를 던졌을 정도였다.

그런데 털어놓을 일이 또 있다. '혁명의 상품화'를 비판한 내용으로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상업성과 획일성에 빠진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반(反)문화'의 한계 또는 허위의식을 지적한 책이었다. 문화 행위-라는 것이 있다면-라고는 기껏해야 책을 읽는 정도에 그치는 비문화인인 처지니, 문화도 아닌 반문화를 비판한 책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모한 일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삐딱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쳐든 비문화인의 눈으로 보자면, 썩 괜찮은 책이다. 정신적 뿌리에서 시작해 영적 신비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까지 반문화 양상을 조근조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워낙 정교해서, 귀가 얇은데다 이런 유의 문화 연구 책을 읽은 적이 없어서인지 뛰어난 책으로 읽혔다.

▲ <혁명을 팝니다>(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마티 펴냄). ⓒ마티
지은이들에 따르면 '반문화'는 18세기 낭만주의와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합작품이다.

"예술가라면 주류 사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게 낭만주의의 강력한 명제였다.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모든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거대한 사기 체제라며 '고귀한 야만인'을 상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특권 계급인 귀족이 사라지는 듯 했으나 자본가들로 대체됐을 뿐 착취는 여전했고 물신주의가 대두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카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 계급이 거짓 생각들의 결합체에 사로잡혀 혁명에 참여하려 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바탕 위에 1920년대 안토니오 그람시는 책, 음악, 그림 등 문화 전체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를 반영한다는 자본주의 헤게모니 이론을 주장하면서 노동 계급이 해방을 성취하려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를 폈다.

여기에 문명은 본질적으로 자유와 정반대의 것으로 문화는 인간 본능의 억압 위에 세워진다는, 즉 '문화 전체가 억압 체계'라는 프로이트의 심리 이론이 가세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의 역사는 사회 억압의 기제가 점진적으로 내면화해온 역사이다. 말하자면 공개 교수형이 식사 예절 같은 자기 통제와 구속으로 변형된 것이다.

이런 토양에서 자라난 반문화에 대한 지은이들의 비판은 통렬하다. 주류 사회에 대한 저항이 그 자체로 낭만화되어 사회 전반적인 환경 개선과 사회 정의의 추구라는 목표가 실종되었다고 지적한다. 모든 정치가 문화에 기초하고, 모든 사회 부정의는 (대중의) 억압적 순응에 기초한다고 단순화해 반문화 반란은 실질적으로 소중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 규범과 제도를 불신하게 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들은 '나쁜 규칙도 무규칙보다는 낫다'는 입장-이건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게다-을 취하며 사회적 규제가 항상 지배, 악을 통제하기 위한 필요 또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루소조차 '어떤 규칙'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며 단지 어떻게 이 규칙들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는데 반문화적 분석은 규칙이란 억압적 구조라며 그 존재 자체를 문제시한다.

무엇보다 반문화가 프레드 히르쉬가 말하는 '지위 재화(positional goods)'의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경쟁적 소비를 부추기고 새로운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는 모순이 문제다. 예를 들자면, 1989년 창간 이래 반문화 운동의 모체 구실을 해온 <애드버스터>는 2003년 고유 브랜드의 러닝슈즈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반문화 자체가 주류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라고 지은이들은 평가한다. 또한 이 같은 역설에 따라 반문화 운동에는 '자기 급진화 경향'이 작동한다. 반란의 새로운 상징이 체제에 의해 '포섭'될 때마다 대중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펑크족들이 귀에 다중 피어싱을 하다가 이게 너무 흔해지자 코, 눈썹, 혀, 유두에 피어싱을 하고, 이마저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따라할 정도가 되자 발리 인들의 귀 막기 또는 성기 피어싱 같은 원시적 스타일로 옮겨간 것이 그런 예라고 한다.

지은이들은 반문화 반란의 허구성을 비판하기 위해 영화, 소설, 그림 등 다양한 문화 상품들을 예로 드는데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던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컬럼바인>에 대한 비평은 신랄하다.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이 영화를 통해 무어는 단순한 범죄 행위가 아니라 미국 사회와 역사 전체에 대한 고발을 감행한다. 총기 규제의 부재가 원인이 아니라 미국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문화'가 이른바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는 시각이다. 그래서 노예제에서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까지 역사를 살피고,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 군산복합체와 핵 헤게모니에 대한 미국의 편집증적 추구와 우파의 TV 토크쇼까지 거론한 후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를 두고 지은이들은 무어가 '문화의 혁명적 변화'를 고집하면서 시민들의 삶을 눈에 띄게 개선해줄 해결책을 '충분히 심층적이지 않다'며 거부했다고 지적한다.

무어의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캐나다인들이 소지한 총기의 수가 수백만 정에 이르지만 총기 폭력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 따르면 이건 완전 허구다. 캐나다에서 총을 개인이 보관하지 못하도록 하고, 공격용 소총은 아예 금하는 등 엄격한 총기 규제법이 있기 때문이다.

반문화의 특징인 범죄·정신 질환·비서구 문화에 대한 낭만화 등을 조목조목 비판한 지은이들은 사회 문제의 제도적 해결을 거부하는 것이 반문화의 '가장 큰 죄'라며 폭정에 저항하고 부당한 지배에 대항해 싸울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 다 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앞세울 자유와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문명은 규칙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이해를 존중해서 개인의 이해 추구를 축소하기로 한 우리의 의지를 토대로 세워졌다. 정치 좌파들이 잘못된 반문화의 이상에 헌신함으로써 문명의 근본 원리에 대한 신념을, 역사의 어느 때보다도 그런 신념이 필요한 시기에,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결론짓는다.

읽기는 만만치 않지만 의미 있는 책이다. 불편한 이들도 더러 있겠지만 반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 도서로 보인다. 그런데 책은 출간 6년이 넘도록 1만 부도 채 팔리지 않았단다. 저항의 음악이라는 록이나 얼터너티브 음악 팬들만이라도 읽었다면 그보다는 훨씬 더 읽혔을 텐데. 아쉽다. 책은 역시 반문화의 도구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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