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만 사라지면 지상 천국'? 문명의 위험 신호!

[김성희의 '뒤적뒤적']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

대학교 다닐 때 일이다. 한때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쏠려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시바 료타로며 E. O. 라이샤워를 만난 것도 그때고, 드러커의 '한계농민'이라든가 전후 일본 경제의 부흥을 이끈 '경사생산 방식'을 들은 것도 그때다. 일본이 어째서 우리나라보다 먼저 근대화되었는지, 그래서 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올랐는지가 궁금해서였다. 도대체 국가경영에 참여할 의사도, 가능성도 없던 터에 왜 그런 주제에 그토록 흥미를 느꼈는지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궁금할 정도다.

생각해 보면 국가나 기업 혹은 개인이라도 흥망의 원인을 아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하다는 데 일찍 눈 떴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런 성향은 다른 이들도 비슷한 듯, 그런 유의 책은 쉼 없이 나왔다.

90년대 베스트셀러였던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이일수·전남석· 황건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펴냄), 뒤늦게 화제가 됐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나 <문명의 붕괴>(강주헌 옮김, 김영사 펴냄), 고대 제국의 쇠망 원인을 분석한 <임페리움>(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귄터 클라인 등 지음, 박종대 옮김, 말글빛냄 펴냄) 등 널리 알려진 책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고전이 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김지현 등 옮김, 민음사 펴냄)는 완역본, 축약본, 아동판 등 다양한 판본이 나왔으니 말할 것도 없다.

▲ <지금, 경계선에서>(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쌤앤파커스
원제를 '야경꾼의 딱따기(Watchman's Rattle)'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지금, 경계선>(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역시 그런 책들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색다르긴 하다. 우선 역사책이라기보다 현대문명 진단론에 가깝다. 마야문명이나 로마제국, 크메르의 쇠망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현대문명의 위기를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 원용되는 수준이다. 과거 제국이나 문명의 쇠망원인을 분석하는 게 주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회의 성향에서 원인을 찾았다는 점도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폴 케네디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은 권력이나 정책 혹은 개인의 잘못에서 쇠망 원인을 찾는데 이 책은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 전가 등을 문명 위기의 증후군으로 꼽는다.

전체적인 분석틀을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에 의존한다는 점도 역사가들의 문명사책과 구별되는 점이다. 다이아몬드 역시 자연환경 파괴 등을 문명의 쇠락 원인으로 들긴 했지만 이 책의 지은이는 사회의 복잡성을 인간 두뇌의 진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괴리를 여러 문명의 쇠퇴 원인이란 기본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고 지은이 레베카 코스타가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다. 그가 대학생 때 발간된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병훈·박시룡 옮김, 민음사 펴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에 감명을 받아 전공을 바꾸려 했으나 무산됐고, '사회과학과 결합한 과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지만 학문적 이력은 그걸로 끝이다.

그보다는 실리콘 밸리의 IT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광고회사 CEO를 지냈으니 기업가라 부르는 편이 맞겠다. 그렇지만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과 교류하고,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해 현대 문명은 진보와 몰락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있다고 지적하며 그 처방을 제시한다.

레베카 코스타는 문명의 성쇠는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구석기 시대의 감정에, 중세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을 지녔다"는 윌슨의 말을 인용하며 기술은 문명 생존의 부차적인 문제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본질적으로 예전과 같은 생물학적 한계에 갇혀 있으며, 원시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정보에 대응하거나 데이터를 처리한다는 지적이다. 진화는 계속되고 있지만 느린 반면,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복잡성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어 자연히 '인식의 한계점'에 달하고 이는 인류사에서 사라진 여러 문명이 반복했던 패턴이라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문화적 전달 혹은 모방단위"라는 도킨스의 '밈' 개념을 원용해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만연하여 합리적 사고를 급격히 멍들게 하는 모든 종류의 믿음, 생각, 행동을 '슈퍼 밈'이라 부르며 이것이 현대문명의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그가 말하는 슈퍼 밈은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화', '거짓 인과관계', '사일로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 다섯 가지다.

'불합리한 반대'는 무조건 싫다고만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지지하는 것보다 반대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가 훨씬 쉬워졌다는 얘기는 곧 '반대'가 밈에서 슈퍼 밈으로 발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지은이는 지적한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곡창지대인 센트럴 밸리에 교도소를 지으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을 예로 든다.

주 정부는 접근성, 보안성, 인건비, 사회 인프라 등을 고려해 건립 후보지를 결정했지만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쳐 무산됐다. 그런데 주민들은 범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점증하는 범죄자들을 수용할 신규 시설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오직' 여기에 교도소를 짓지 말라는 주장을 폈다. 지은이에 따르면 "그렇다면 주 정부가 어떻게 해야겠느냐"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못하면서.

'책임의 개인화'는 방대한 시스템적, 사회경제적 문제의 책임을 특정인물 탓으로 돌리는 태도를 뜻한다.

"연비 좋고 빠른 차를 만들어내지 못한 자동차업계가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례없는 세계적 불황이 시장에서 소비자들을 몰아내지 않았더라면 자동차 산업이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만 탓하는 이들에게는 수많은 원인을 고려하는 것보다 '책임의 개인화'가 훨씬 손쉬운 길이었다. 자동차 회사 경영자들을 향한 우리의 그릇된 징벌적 태도는 미국 경제의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 부분을 살리기 위한 긴급구제 대책을 거의 좌절시킬 뻔했다. 자칫하면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사태였다."

지은이가 든 예다. 그는 우리 뜻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부도덕한' '정신 나간'이란 꼬리표를 붙이며 시스템적, 사회경제적 문제의 책임을 특정인물 탓으로 돌리는 경향을 꼬집는다. 이를테면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면 알 카에다는 무장해제 되고 세상이 더 안전해질 거라든가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만 없다면 이란의 핵 개발을 중단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런 예란다.

'거짓 인과관계'는 방글라데시의 버터생산량과 월가의 주가 움직임이 비슷하다 해서 인과관계를 찾으려는 오류, '사일로식 사고'는 소통과 융통성을 방해하는 조직 중심의 칸막이 사고, '극단의 경제학'은 효율과 생산성만 따져 인문학의 쇠퇴를 부른 태도를 가리키는데 그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그렇다 해도 <지금, 경계선에서>는 케네디나 다이아몬드의 책처럼 객관적이고 정치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에 도움이 될 현대의 사례를 주로 들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델포이 신탁"이란 출판사 측의 홍보 문구가 과장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 사회를 비춰볼 거울로 읽어둘 가치가 차고 넘친다. 김정남이 사라지면 남북통일이 될 거라든지, MB 정권이 우리 사회 온갖 문제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더욱. 좌뇌의 분석력과 우뇌의 종합력을 뛰어넘는 '통찰'의 힘을 강조하는 지은이의 처방은 그 다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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