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잊어버려! 아직도 꿈꿔야 할 이유!

[프레시안 books] 실라 로보섬의 <아름다운 외출>

페미니즘포비아의 시대?

여성학 강의가 폐강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오래다. 그나마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인 리포트를 제출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왜 여성학 강의를 듣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여학생은 "우리 오빠(애인)가 여성주의를 싫어해서"라고 답하기도 한다. 청년실업이 심각한 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격증과 스펙이지 여성주의와 같은 비판의식이 아니라는 생각도 팽배하다. '취집'이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 취업에 자신이 없다면 시집이라도 잘 가야 한다. 취업이든, 취집이든, 여성주의자라는 딱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구도에서 살아남는 데 방해가 되는 듯하다.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은 소위 '진보진영'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연루되었던 진보진영의 정치인은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버젓이 다시 활동하고 있으며, 이를 문제 삼는 여성주의자들은 안 그래도 힘든 시기에 대사를 그르치는 트러블 메이커로 낙인찍히곤 한다. 비판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한 남자 교수가 술자리에서 벌이는 성희롱은 사적인 연애의 문제로 너그러이 얼버무려진다. 그가 만취해 잠든 여제자의 가슴을 만지든, 키스를 하든,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성적 행위로 취급된다. 누군가 이 사건을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비판한다면, 그는 악마나 마녀로 간주되기도 한다.

우리, 무엇을 꿈꾸었던가?

페미니즘 포비아의 경향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남성들에게뿐 아니라 오빠들의 인정에 목말라 있는 '명예 여성들'에게도 만연하다는 사실은 여성주의자들을 지치게 만든다. 분명 변화의 꿈을 꾸기엔 버거운 시대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외적인 탓으로만 돌리지는 말자. 이런 때일수록 우리의 꿈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차분히 진단할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꿈을 꾸었는가? 그것은 헛된 망상이었는가? 우리는 아직도 꿈꿀 수 있는가?

▲ <아름다운 외출>(실라 로보섬 지음, 최재인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이러한 때에 실라 로보섬의 <새 날을 꿈꾼 사람들(Dreamers of a New Day)>이 <아름다운 외출>(최재인 옮김, 삼천리 펴냄)이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되었다는 소식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로보섬은 여성주의의 싹을 틔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특정 이념을 이론적으로 상술하기보다 여성운동의 초기에 '일상'에서 전개되었던 다양한 여성운동의 실천들을 전반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어떤 꿈에서 시작했는지, 또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상에서 어떤 발칙한 실천을 했는지, 또 이런 실천을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했는지…. 앨범의 사진을 뒤적이며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듯이, 페미니즘의 역사를 뒤적여 보면서 발랄했던 당시의 꿈을 상기해 보는 일은 분명 지치고 고된 노정에 새로운 힘과 영감을 실어줄 것이다.

그녀들이 요구한 것은 참정권만이 아니었다.

1890년에서 192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주의가 싹을 틔웠던 이 시기를, 참정권을 둘러싼 투쟁의 시기로 단순화해서 보던 우리의 습관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이미 뒤집힌다.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다양한 위치에서 참정권이라는 정치적 이슈 이외의 다양한 요구를 함께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요구한 것은 노동, 정치, 소비에서 섹스, 사랑, 출산, 외모 등에 이르는 일상 전반에서의 젠더 관계 변화였다.

가령 공장 노동자 추(Ada Nield Chew)는 '고한(苦汗)' 노동으로 알려진 노동집약적 업종의 저임금에서 여성들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음을 항의하기 시작했으며, 세탁 노동자, 실밥 떼는 노동자, 의류업계 노동자까지를 포괄하는 여성노동조합연맹을 결성하고자 했다. 여성들은 노동뿐 아니라 소비와 관련된 관습 또한 변화시키고자 했다. 1900년대 초 런던의 중간계급은 일하는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사회적으로 분담하기 위해 설립한 '나누는 부엌'이나 '커피와 고기 요리 상점' 등을 후원하면서, 먹거리를 사적인 소비의 형태에서 사회적인 소비로 전환시키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였다. 한발 더 나아가 전국여성노동자연합은 지역자치정부가 공공부엌을 세우는 일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당시에 '신여성'들이 감행한 젠더 경계 허물기의 실천은 공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조직적인 방식뿐만이 아니라 개별적인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성적 변화뿐 아니라 감성적 변화까지도 추구하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가령 유대인 이민자 노동계급의 신여성들은 장식 없는 블라우스에 타이를 매고 카페에 앉아 담배를 피며 결혼, 가정, 노동조건 등에 대해 밤늦게까지 토론하곤 했으며,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이스트먼(Crystal Eastman)은 자전거를 타기 위해 치마 대신 반바지를 입고 도심과 호수 주변을 활보하고 다녔다고 한다. 여성들은 성과 사랑에 대한 금기를 깨는 과감한 시도도 멈추지 않았다. 하먼(Liliian Harman)은 자유연애를 주장하면서 동거를 하다가 투옥을 당하기도 했으며, 섹스와 출산조절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피임과 낙태에 대해 논쟁하였다.

물론 이 책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이론적 정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실라 로보섬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새날을 꿈꾼 이러한 운동들은 하나의 단일한 집단을 이루지도, 하나의 조류를 이끌어내지도 못할 정도로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젠더와 관련된 사회적 문화적 통념을 바꾸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스스로 제기한 요구들을 정치적인 것으로 이슈화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용감했다. "여성답지 않다"는 비난에 개의치 않을 정도로!

동일성과 차이의 사이에서

또한 실라 로보섬의 <화려한 외출>을 읽다보면, 여성주의 1세대들이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정체성에 기초하여 여성과 남성의 동일성이나 평등성만을 주장했다는 통념도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녀들은 동등한 법적 권리로서의 참정권, 동등한 교육,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 여성의 취업권 등의 평등권 요구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여성이라는 특수한 위치에서 제기되는 모성 및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구성했으며, 나아가 여성 특유의 삶의 방식을 남성적 삶에 대한 대안적인 이상으로 제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당시의 여성들이 동일성과 차이를 어떻게 협상시키고 조화시킬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모성과 관련하여 제기했던 이슈들을 살펴보자. 여성들은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 모성을 부정하기보다 이를 사회적인 가치를 갖는 것으로 재평가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들을 발굴해 나갔다. 가령 이들은 산모와 아이를 돌보기 위한 클리닉을 자발적으로 설립하거나 기본적인 음식을 제공하는 복지센터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방문 의료단을 비롯해 노인과 환자, 산모에게 무료 가사노동을 제공하는 '가정 도우미' 같은 복지 서비스를 갖춘 사회정책도 기획했다.

모성과 관련하여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들에게 연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여성의 독립성을 강화시켜줄지, 아니면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데 이용될 지는 물론 미지수였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러한 이슈들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개인으로서의 동등성과 여성으로서의 차이를 조화시키는 존재방식을 마련하고자 애썼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시 여성들이 여성적인 것을 일종의 대안적 정체성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까지 했었다는 점이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은 이상적 자녀 양육에 대한 유토피아적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경쟁적이고 남성 지배적인 자본주의에 반대되는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가령 길먼은 <그녀들의 땅>(1915)이라는 소설에서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모성적이고 협조적인 공동체의 이상향을 그리면서, 모성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과 관련된 가치들도 수반해야하며, 결국 보편적인 사회적 대안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시사했다.

남성 지배적인 자본주의와는 다른 여성들의 생활양식은 협동조합식 살림의 형태에서도 나타났다. 여성들은 협동조합방식을 통해 가사노동을 사회화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과는 다른 형식의 경제활동을 수행했다. 가령 여성들은 회원들이 기증한 물건을 판매하는 '여성물품 교환소'를 세웠는데, 자선과 상호부조를 한 데 합친 이러한 교환활동은 비자본주의적 물자의 재분배와 재활용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몇몇의 아나키스트들은 가정에서의 소박한 생활방식을 근대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골드만(Emma Goldman)은 인간을 두뇌 없는 자동기계들로 격하시키는 근대생산양식을 최악의 것이라 비판하였으며, 윌킨슨(Lily Gair Wilkinson)은 공장뿐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정확하게 시간에 맞추어 일하도록 만든 제도가 불러일으킨 억압적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따라서 윌킨슨은 가정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공예로 물건을 만드는 소박한 생활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였고,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집에서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것을 꿈꾸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높은 생산성이 아니라 노동을 놀이로, 창조활동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일이었다.

우리, 아직도 꿈꿀 수 있는가?

초창기에 꾸었던 이러한 꿈들이 모두 현실화된 것도 주류화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꿈을 꾸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다.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서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여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은 지금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페미니즘은 오늘날 외면당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거대한 이론적 담론에 갇혀, 일상의 요구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거의 주장만을 답습하면서 변화된 시대의 새로운 요구들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