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학부에 인지 과학 과목이 개설되었다. 심리학의 정찬섭, 철학의 소흥렬, 언어학의 이익환, 전산학의 이일병이 팀 티칭을 했다. 학생들의 구성도 다양했다. 나를 포함한 심리학과 학생들, 그리고 포털사이트 '다음'을 만든 이재웅도 전산학과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 당시 강의를 들었던 구체적 내용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뭔가 새로운 시도, 출발을 공유한다는 가슴 설렘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벌써 20년도 전의 일이다.
이남석의 <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마음의 과학>(지호 펴냄)을 읽으면서 20년 전의 가슴 설렘이 다시 생각났다. 그 사이 몇 개 대학에서 인지 과학 협동 과정이 생기고, 학회와 학술지가 생겨나고, 인지 과학의 주제를 다루는 여러 전문 서적과 교양 서적이 소개되고…. 분명 변화는 있었다. 연구자도 늘어나고, 사회적 관심도 늘어나고….
그러나 아직은 뭔가 부족한 것이 국내의 현실이다. 인지 과학이 무엇이고, 다른 분야와 어떻게 연계될 수 있고, 왜 이런 연구가 필요한지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아직은 부족하다. 요즘 나노 기술(NT), 정보 기술(IT), 생명공학(BT)의 융합 연구가 대세인 것으로 언급될 때도 인지 기술(Cognitive Technology, CogT)은 흔히 빠진다.
| ▲ <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마음의 과학>(이남석 지음, 지호 펴냄). ⓒ지호 |
책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2033년 미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재판으로 연결된다. 이 두 재판은 기존에 사람들이 믿어 왔던 신념 체계를 크게 뒤흔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2033년의 피고는 기계도 인간도 아닌 새로운 종이라고 스스로를 밝히는 젊은이다.
그는 사람은 아니지만 발전된 인지 과학의 기술로 사람처럼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기계이다. 인간만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종래의 믿음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포스트휴먼으로 지칭되는 이 젊은이는 자신의 뇌에 심어진 칩을 통해 여러 학자의 뇌에 접속하면서 최첨단의 전문 지식을 다운로드 받아 변호사의 도움 없이 능수능란하게 자신을 변호한다.
이러한 미래의 가상 상황을 필두로 저자는 '마음'을 재정의하고, 현재 실현 가능하고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 될 수 있는 인지 과학 기술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들이 가져올 생활의 긍정적 변화와 어두운 측면을 철학적 이슈와 함께 소개한다. 정말 이런 일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다가도 작금의 기술 발전을 떠올리면 어느새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다소는 낯설지만 경이로운 기술의 발전에 놀라워하는 사이 책은 어느새 우리가 익숙한 정치, 경제, 예술의 장으로 인지 과학을 끌어들인다. 먼저, 왜 정치에서 기존 프레임(체제)을 바꾸는 것이 어려운지, 다수의 의견에 편승하려는 사람들과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인지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어떻게 정의를 실현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가 왜 경제학적 합리성이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은지, 그렇다면 왜 인간은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경제학적 합리성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인지 최근의 행동 경제학적 연구 결과들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행동 경제학이야말로 인지 과학의 연구 결과가 경제학에 영향을 미쳐 태동한 분야이다.
예술과 관련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스토예프스키와 고흐의 작품 세계와 스타일을 언급하면서 인지 신경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러면서 마음이 곧 뇌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뇌의 생화학적 또는 구조적 문제가 어떻게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예술은 "현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뇌 속에 기쁨을 주는 효과를 창조하기 위한 자의적인 과장과 왜곡"일 수 있다는 인지 과학적 정의를 소개한다.
그리고 사회의 영역으로 나아가 법정, 개인의 정보 처리, 의학, 교육, 로봇 분야에서 인지 과학이 어떤 기여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나와 다름에 관용을 가지는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왜 개개인이 인지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지 제시한다. '편향 맹점', 즉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여러 사고의 편향이 남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갈등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또 다시 우리를 2033년으로 인도한다. 이번엔 피소를 당한 어느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해피넷'이라는 긍정적인 경험과 기억을 만들어주는 새로운 정보 서비스를 고안한 사람이다. 칩을 이식하고 본인이 원할 때마다 접속해서 행복한 경험을 제공받을 수 있는 서비스이다.
그러나 이 박사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서비스 개시 1년 후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는 첨단 기술의 구현에 정신이 팔려 마음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첨단 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한 이유로 기소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렇듯 숨차게 여러 영역을 둘러 나오면 저자는 그제야 인지 과학을 정의한다. 대개 책의 맨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맨 마지막에 나와 있다. 추상적인 내용이지만 우리 생활에 녹아 있는 인지 과학의 여러 면면들, 미래 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사고 실험 덕분으로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여정으로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해준다.
인지 과학, 첫사랑의 상대처럼 알듯 모를 듯, 쉽지 않은 대상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심리학에서는 대개의 학생들이 인지심리학이 딱딱하고 어렵다고 느낀다. 그런 인지 과학에 대한 글쓰기를 짝사랑에 대한 고백이라고 얘기하는 저자, 그 고백의 내용이 무엇인지, 저자가 생각하는 인지 과학은 무엇인지, 더디기만 한 이 봄에 다른 사람의 사랑을 엿보는 것은 충분한 지적 유희가 될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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