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럼비 폭파한 해군,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

[대한민국을 묻는다] 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미리 밝히자면 이 서평은 평자를 조금 잘못 택한 듯하다. 저자와 평자가 대립각을 세워야 독자들이 읽는 맛을 느낄 텐데, 나는 국가를 비판하는 박노자의 관점에 거의 대부분 공감한다. 그건 내 사유의 기본 틀이 아나키즘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국가의 성격이 진보적일 수 없다는 점이 적어도 내게는 하나의 상식이다.

그래서 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한겨레출판 펴냄)를 쭉 정리하는 건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 같다. 하여 책 자체보다는 그의 책을 통해 제주도 강정 마을 해군 기지 사건을 얘기하고 싶다. 강정 마을 해군 기지 얘기를 하면 내가 박노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 조금 달리 생각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노르웨이, 이라크, 미국의 사례를 들지 않아도 한국의 국가는 언제나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역사를 들춰보지 않아도 지금의 현실에서도 국가의 폭력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쟁 상황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국책 사업을 한다는 빌미로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입을 틀어막고 경찰의 힘으로 짓밟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해군의 발파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강정 마을도 마찬가지이다.

▲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비단 강정 마을만이 아니다. 지금 밀양에서도 핵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수도권으로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송전탑 때문에 주민들이 7년째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리산권 함양에서는 지리산댐을 막으려는 싸움이, 4대강 사업 때문에 시작된 팔당 농민들의 싸움도 계속되고 있다. 도시에서는 재개발이, 지방에서는 수도권을 위한 지역 개발이 명분이라는 점은 다르지만 방방곡곡이 전쟁터이다. 이런 전쟁을 겪는 주민들은 국가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국가의 폭력성이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가? 박노자가 얘기하듯이 모든 이들이 동일하게 폭력을 경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국살(國殺)"을 당하는 사람들은 "주류의 재산권에 도전하거나 도전할 확률이 높은 '반항자', 주류 사회 바깥에 있거나 주류 사회 안에서 '내부 식민지'로 전락해 있는 각종 '열등한 타자'들"이다. 쉽게 얘기하면 "대한민국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비국민'인 것이다." 그리고 이 비국민들에게 경찰 조직은 공권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마음 놓고 폭력을 행사한다.

심지어 제주도에서는 군대가 폭력을 행사한다. 해군이 민간인을 폭행하고 민간인의 배를 뒤집고 있으니, 대체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이랍시고 정치인들이 제주도를 방문하지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방문이 아니라 해군과 국방부의 책임자들을 문책하고 쫓아내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해군 관계자들이 "제주 해군 기지는 제주도민과 해군 간에 해결해야 할 사안이며 정치적 논리에 따라 좌우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게 문민 정부에서 가능한 논리인가? 군이 정치의 명령을 따르기는커녕 정치 논리를 내세우지 말라고 요구하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인가?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지금 당장 국방을 내세워 오만한 발언을 일삼는 군인들을 모조리 해임시키는 일이다.

정말 세상이 1퍼센트 대 99퍼센트의 구도라면 폭동이라도 일어나야 할 텐데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왜 이리 평온한가? 국가만이 아니라 재벌들이 우리 삶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 폭력성에도 국가를 '기댈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재벌가의 회장을 선거로 뽑지는 않지만 대통령은 선거로 뽑는다는 그 허위가 우리를 착각하게 만든다. 박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국가의 폭력성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사회 경제의 '합리적 조절자'로서의 국가에 가장 큰 희망을 거는 것이다."

그리고 박노자가 강조하지 않은 내용으로 말하면, 한국이 중앙 집권형 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눠진 사회이다. 중앙 정치, 독점 재벌, 중앙 언론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서울에 미군 기지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면, 그래서 곳곳에 폭약을 심고 터뜨린다면 시민들이 참고 있을까? 서울에 핵발전소나 핵 폐기장을 만들겠다고 하면 서울 시민들이 가만히 있을까? 국가의 폭력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은 대부분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지 않는 비수도권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도권의 주민들에게 국가는 온정적인 지배자이다.

이런 구조적인 골들이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더구나 우리는 폭력을 문제삼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박노자의 말처럼 한국에서는 학교와 종교마저도 애국과 호국을 부르짖으니.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스며든 폭력에의 순응은 평화의 감수성을 떨어뜨린다.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박노자의 질문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다. 우리라면 엄두를 못낼 질문을 그는 던진다. "우리는 과연 북파 공작원들이 사살 내지 폭살한 북한의 군인과 민간인이나 베트남 파병 한국군이 죽이거나 강간하거나 부상 입힌 수많은 베트남인의 아픔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인가?", "만국 노동자의 연대를 염원하고, 세계 지도를 국경이 아닌 계급 사이의 경계선으로 그려보려는 사회주의자 내지 노동계 진보 정치인이 '최정예'의 방법으로 북한의 군복 입은 노동자와 민간인을 도살해야 할 남한의 군대를 '우리 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면 그는 우리 사회에서 바로 매장될 것이다. 매장될 수 없는 경계에 있는 박노자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고,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없다는 점이 우리 사회의 억압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박노자는 국가의 폭력성이 자본주의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좋은 정치인을 뽑아 덜 폭력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특수(산업 호경기)'가 없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며 장기적으로 지탱되지 않는다. 후발 주자가 늘 뛰어들어 언젠가 시장이 포화되면서 출혈 경쟁으로 이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소비재와 달리, 무기와 같은 '유사 자본재'의 수급과 가격 등은 시장과 거의 무과하게 사실상 독점에 가까운 생산 업체와 정부의 담합으로 결정된다. 그러기에 주기적 불경기로 소비재 시장이 위축될 때 적당한 투자처가 없는 엄청난 잉여 자본을 가격이 안정적인 무기 생산에 쏟아 부어 불황을 유보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운영 기법이다."

결국 단순히 몇몇 정치인을 바꾸는 것만으로 국가의 폭력성은 사라질 수 없다. 그래서 박노자는 좌파 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념과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나는 한국 사회의 국가 폭력이 노동자와 시민에 대한 폭력으로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박노자가 지적하는 노동자에 대한 폭력에 시민들이 둔감한 것은 우리의 일상이 폭력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익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타자를 짓밟는 것에,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들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짓밟고 말살하는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수천, 수만 년까지 후손들을 위협할 핵발전소라는 엄청난 폭력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는 우리의 생각은 폭력을 넘어선 공포이다.

▲ 강정 마을 주민들은 해군 기지가 '평화의 섬' 제주도에 들어올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프레시안(최형락)

강정 마을의 저항을 보며 이를 해군 기지라는 국가 정책의 문제, 주민 동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절차상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구럼비라는 바위의 보존은 부차적인 것으로 다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는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 가서 구럼비 바위에 손을 대 보고 거기 살고 있는 많은 생명들을 느껴보면 해군 기지와 구럼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강정 마을 주민들이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멀리서 그냥 머리로 생각하며 관조하고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평화를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래도 서평이니 책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을 얘기하자면 박노자가 이전에 썼던 책보다 논리의 탄탄함이나 무게감이 떨어진다. 동서양의 고금을 넘나들며 쏟아내는 지식은 현란하지만 왠지 탄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먹음직스러운 빵을 집어 들었는데 손에서 퍼석퍼석 부서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책에 대한 아쉬움을 없애는 즐거운 소식이 책을 읽는 재미를 늘린다. 얼마 전 박노자는 이번 19대 총선에 진보신당 비례 대표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있고 국가 속에서 국가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의 앞날에 많은 기대를 걸게 한다.

물론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그런 일이 실현되기는 어렵다. 지난 3월 4일 진보신당은 사회당과의 통합 당원 대회를, 녹색당은 창당 대회를 가졌다. 진보 좌파 정당을 지향하는 진보신당과 탈핵과 기본소득, 비폭력 평화를 지향하는 녹색당은,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진보신당과 농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녹색당은 다른 길을 걷지만 서로를 지지할 수 있는 좋은 벗이라 생각한다.

박노자가 진보신당의 비례 대표로 꼭 당선되면 좋겠고, 그와 함께 녹색당의 탈핵 비례 대표가 국회에서 제대로 한번 국가를 물 먹이면 좋겠다. 같이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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