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빠'와 '강용석빠'의 불편한 공통점은?

[김성희의 '뒤적뒤적'] 캐스 선스타인의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지난해부터 출판계엔 '가까 붐'이 일었다. 음, 이건 어떤 정치적 의도를 담은 비아냥이 아니다. '~가' '~까'로 끝나는 제목이 쏟아지는 현상을 두고 붙여본 이름일 따름이다. 추측컨대 인문서로는 아주 드물게 대박을 친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탓으로 보이는데 편집자들의 상상력이 아쉬운 대목이긴 하다.

어쨌거나 이런 유의 책은 시류를 좇는 것 같아 일단 낮춰보는 편이 마땅하다고 보지만 그 중엔 꽤 괜찮은 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캐스 선스타인의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이정인 옮김, 프리뷰 펴냄)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다.

일단 인간 행동 변화의 비밀을 들춰낸 전작 <넛지>(안진환 옮김, 리더스북 펴냄)에서 보여준 통찰력도 그렇고, 하버드 대학 로스쿨 교수란 직위도 믿음을 더한다. (표지에 자랑스레 박은 이유겠다.) 무엇보다 원제에 충실한 제목이 흥미를 돋운다. 바로 오늘 이 땅에 발 디디고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도 유혹적이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우리 편, 네 편 아니 '좋은 나라' '나쁜 나라'로 갈려 벌이는 논란을 보면 상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기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해법에 목말라서다.

지은이가 초점을 맞춘 것은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온갖 분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은 서로 생각이 같은 집단 속에 들어가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실 이런 현사에 주목한 것은 지은이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1930년대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논하긴 했다. 이 책은 선악의 잣대를 떠나 극단화를, 철학 대신 사회학 또는 심리학의 관점에서 다뤘다는 점이 니버의 책과 다르다.

▲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정인 옮김, 프리뷰 펴냄). ⓒ프리뷰
책은 집단 극단화의 정체와 그 원인, 그 결과로 어떤 일이 빚어지는지,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를 순서대로 논한 뒤 '착한 극단주의'를 이룰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로스쿨 교수가 쓴 덕인지 아주 체계적이고 풍부한 사례와 실험 결과 등을 토대로 해서 명쾌하고 알차다.

이 중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아무래도 집단 극단화의 원인과 처방이겠다. 제2장 '극단화는 왜 일어나는가'에서 원인을 집중 분석하는데 지은이는 권력의 엄청난 위력과 악의 본질, 집단 사고라는 개념, 그리고 사회적 '폭포 효과'를 꼽았다.

눈길을 끄는 설명은 '평판의 압력'. 집단의 일원이 되면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호의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며 그 결과 능력이 신뢰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자신만이 아는 정보나 집단 의사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기를 꺼린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건강한 '라이벌들의 팀'을 구성했던 링컨 대통령과 달리 '라이벌이 아닌 사람들의 팀'으로 구성됐던 부시 행정부는 다양한 내부 의견이 통제되는 바람에 이라크 정책 등에서 '일사불란함'을 보여주면서 균형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또 아주 미미한 수준의 정보를 습득한 다음, 그것으로 자신의 극단주의를 뒷받침하려고 하는 '절름발이 인식'은 극단주의자들의 특징이라고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아들 병역을 둘러싼 논쟁에서 강용석 의원을 지지했던 이들이 그런 사례에 속한다면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이 열광하는 <나는 꼼수다> 현상은 '확증 편향'의 사례로 꼽을 수도 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 이 책에선 '확증의 힘'이라 해서 "사회적 네트워크가 사람들이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극단화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며 인터넷을 지목한다. 자신의 정치 신념에 맞는 매체만 보거나 온라인 사이트를 방문해 성향이 같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양한 생각, 논리적 반론을 접하는 대신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한다면 고정관념이 서로, 갈수록 증폭되는 '에코 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온라인 정치 시민운동의 선구자가 쓴 엘리 프레이저의 <생각 조종자들>(이현숙·이정태 옮김, 알키 펴냄)에서도 볼 수 있다. 프레이저는 구글 등 대형 포털들이 검색 필터링을 이용해 개별화된 맞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정보 편식'을 불러 반드시 편리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인터넷의 속성상 '확증 편향'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올드 미디어도 나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다양한 주제나 주장을 우연히 접하게 만드는 '우연이 만드는 건축물(architecture of serendipity)'을 제공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다양한 견해를 공정하게 소개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제임스 하킨의 <니치>(고동호 옮김, 더숲 펴냄)에 따르면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려는 매체는 갈수록 입지가 좁아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연히 극단주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로 관심이 쏠리는데 지은이는 제4장에서 세 가지를 가능한 답변으로 제시한다. 전통주의, 결과주의, 견제와 균형이 그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관점의 다양성을 핵심으로 하는 '견제와 균형'은 어쩌면 상식적인 해법이어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지지한다는 '전통주의'가 신선하게 읽힌다.

이는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영국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 기댄 것으로 버크는 '혁신 정신'을 이기심과 편협한 관점의 결과로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합리적인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상당 부분을 전통에 위임한다면서 "우리가 가진 오래된 편견들을 모조리 내다 버리지 말고 상당 부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견해가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진보나 혁신이 내일의 보수가 되거나 밥그릇 싸움의 또 다른 명분인 경우를 보았고, 또 볼 수도 있다. 그러니 "전통주의는 많은 분야에서 올바르지 않은 운동을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지은이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1930년대 파시즘에서 21세기 서브프라임 금융 위기까지 다양한 현상을 분석한 지은이는 "집단 극단화는 크게 보면 정보 교환의 산물"이라 결론짓는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인터넷을 일러 '정보의 바다'라고도 하고 정보의 쓰레기가 넘친다고 하지만 어쨌든 지은이에 따르면 그만큼 집단 극단화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진 셈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적어도 어떤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대한 가이드로 이 책은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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