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남극에 구멍을 뚫은 까닭은?

[프레시안 books] 아닐 아난타스와미의 <물리학의 최전선>

아닐 아난타스와미의 <물리학의 최전선>(김연중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은 특이한 뷔페 상차림이다. 과학 대중서에 담기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조금씩 다 들어가 있다.

여기까지라면 간단히 점심을 때울 몇 천 원짜리 뷔페라고 할 터인데, 다른 상차림에는 별로 올라오지 않아서 아쉽던 메뉴를 내세우고 있다. 그것도 맛보고 싶어 했지만, 웬만한 레스토랑에서도 내놓지 못했던 메뉴라서 자꾸 손이 간다.

우리말 부제 "지구의 극한으로 떠나는 실험 물리학 여행"처럼 저자 아난타스와미는 물리학 실험들이 벌어지는 현장을 찾아 지구 이곳저곳을 여행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아마도 그가 노렸을 미국 독자에게는 나름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윌슨 산 천문대의 100인치 망원경(1917년 완성)에서 시작한 여행은, 미네소타의 폐광, 겨울 바이칼 호수의 빙판, 안데스 산맥과 하와이 섬의 산꼭대기에 있는 천문대, 남아프리카의 고립된 오지를 거쳐 남극으로 이어진다.

남극에서는 빅뱅 때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반물질의 흔적을 찾아 띄우는 기구를 구경하고, 빙원에 뉴트리노(중성미자) 검출기를 묻기 위해 2.5킬로미터 깊이의 구멍을 뜨거운 물로 녹여 뚫는 현장을 지켜본다. 그러고는 문명 세계로 돌아와 제네바에서 LHC(Large Hadron Collider, 대형 하드론(강입자) 충돌기)를 둘러보고, 프랑스의 칸에서 공개된 플랑크 위성(2009년 발사)을 묘사한다. 지금 플랑크 위성이 자리한 L2(지구 기준 태양 반대편 150만 킬로미터 근처)까지 따라갔었다면 더욱 좋았을 터이지만, 아직 인간이 달(지구에서 최대 40만 킬로미터) 너머로 나아가 본 적이 없으니 저자에게 거기까지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난타스와미는 이 책의 사이트(☞바로 가기)와 블로그(☞바로 가기)에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사진들과 그 후 이야기들을 올려놓았다. 숭고함이 배어나오는 황량한 풍경들부터 숨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릴 것 같은 청정실의 모습까지 여러 사진들이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 <물리학의 최전선>(아밀 아난타스와미 지음, 김연중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 ⓒ휴먼사이언스

이 작은 뷔페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세계는 물리학의 물리적 밑바탕이다. 물리학이라고 할 때 칠판에 분필로 수식을 쓰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물리학은 결국 물질과 씨름하는 것이 아닌가? 고요한 오밤중에 냉기에 곱은 손으로 망원경을 조정하던 이야기,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한 복판에서 뚫은 낚시 구멍 둘레에서 웃통을 벗어 제치는 이야기. 삐거덕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폐광에서 전선을 잇는 모습들. 눈과 얼음이 아니라면 리비아 대수로관 공사장이나 석유 시추공과 구별하기 힘든 노동의 현장들. 이런 현장의 모습은 다른 과학 대중서에서 보기 힘들다.

모습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다양하다. 천문학자와 망원경 오퍼레이터 사이의 미묘한 관계, 전파 망원경 때문에 토지를 내놓은 농장주의 기대, 칼로리와 근육과 맥주의 마초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뒤섞인 홀쭉한 물리학자들. 상아탑의 칠판을 떠나서 공간적으로, 인간적으로 경계 지대(edge)를 둘러보는 여행기로서는 유일하다.

좀 더 익숙한 메뉴들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사울 펄뮤터, 우리나라에서는 정수기 광고 모델로 얼굴이 알려진 조지 스무트, 최근 번역 출판된 책들 덕분에 다중 우주론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레너드 서스킨드, 펄서의 발견자이자 국내에서 교수직을 맡았던 조셀린 벨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과의 인터뷰가 쉬지 않고 지나간다.

다양한 등장인물과의 인터뷰는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을 낳았다. 종종 과학 대중서가 한 사람 또는 한 학파의 해석과 희망을 입증된 진리인 것처럼 선정적으로 내세우는데, 이 책은 그런 유혹을 꽤 벗어났다. 아무래도 아난타스와미 자신은 초대칭성과 초끈 이론 그리고 다중 우주론에 호의적이다. 하지만 이 인기 메뉴들이 완벽한 코스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도 않고, 그런 인기 메뉴를 선호하지 않는 다른 물리학자의 생각도 그들의 입으로 소개한다. 찾아본 현장에서 진행되는 실험들이 인기 메뉴를 입증할 것이라고 섣부르게 단언하지도 않는 편이다. 덕분에 한 권의 책으로서는 21세기 초의 상황을 꽤나 넓게 그려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상투적인 찬사를 보내기에는 걸리는 점이 여럿 있다.

먼저 무리한 요구부터.

아난타스와미의 여행지 목록에서 언뜻 비치듯이, 그가 이야기하는 물리학은 사실은 우주론에 국한된다. 1장에서 등장해서 마지막 10장까지 곳곳에서 되풀이해서 등장한 수도원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듯이 물리학자가 인류의 사제 노릇을 하는 그러한 물리학. 일찍이 아난타스와미처럼 저널리스트였던 마거릿 버트하임은 <피타고라스의 바지>(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그러한 물리학을 꽤나 비판했다.

사제 물리학을 벗어나야 된다는 버트하임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물리학에서 사제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함축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교통량의 물리학이나 그래핀(Graphene)의 성질처럼 우리나라의 유능한 물리학자도 뛰어든 분야들은 언뜻 응용처럼 여겨지면서도 뭔가 물질세계의 근본 원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들이다.

물리학은 외로운 수도원에도 있지만, 지저분한 길거리에도 스며들어 있다. 아난타스와미가 자동차 번호판을 찍어대는 대학원생도 인터뷰하고, 그래핀을 구워내는 실험실, 탄소나노튜브를 뽑아내는 공장을 방문했더라면 현대 물리학 실험 현장들을 더 풍부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 아쉽기는 하다. 작은 뷔페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메뉴를 요구할 수는 없다. "우주론의 최전선"이라고 했으면 좀 더 정직한 제목이었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작은 식당의 상차림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이론적 배경에서부터 방문한 현장의 사회 문화적 에피소드까지 너무나 많은 내용이 언제나 너무나 간소하게 차려져 있다. 때로는 두서없이 반복된다. 남극 현장 이야기에는 로버트 팰컨 스콧, 로알 아문센, 어니스트 섀클턴 이야기가 짤막하게 연달아 나온다. 아마도 엄혹한 남극의 상황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되기는 하는데, 그보다는 방문한 현장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모습에 치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앨런 구스가 인플레이션 이론을 처음 내놓고 나름 문제점을 깨닫고 망설이던 상황에 대한 묘사처럼 짤막하면서도 저절로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도 여럿인지라, 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는 느낌도 든다. 그런 대목이 아주 반가운 이유는 초·중·고 12년 내내 두어 곳에만 소풍갈 때 기분처럼, 다른 책들에서 자세히 이야기된 내용을 요약 인용하는 부분을 뚫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을 둘러보자는 기획의 힘은 우람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정표가 된다.

우주론 대중서를 섭렵하는 재미를 즐겨온 독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큰 얼개를 대략 그려볼 힌트를 준다. 그 얼개가 5년 후, 10년 후의 상황과 들어맞을지,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하고 맞추어보는 재미는 우주와 사람의 이야기를 즐기는 또 다른 놀잇감이다. 하지만 젊은 독자들이 이 책으로 입문한다면, 다른 책에 좀 더 자세하고 꼼꼼한 지도들이 담겨 있다고 말하겠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서 몇 마디. <물리학의 최전선>을 여행기이자 그물코나 큰 얼개로 여기면 큰 문제는 아닐 성 싶지만, 숫자 변환이 몇 군데 틀린 부분이 있다. 예컨대, 90만 마일은 1만 5000킬로미터가 아니라 150만 킬로미터이다(407쪽). 몇몇 용어들이 관례적인 번역을 따르지 않은 것도 어색하다. "globular cluster"는 "구형 성단" 대신 "구상 성단"으로(140쪽), "standard candle"은 "표준 초" 대신 "표준 촛불"이나 "표준 촉광"으로(169쪽). 그랬더라면 다른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엮는 이정표 역할을 조금 더 편안하게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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