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엔 유인촌도 소셜테이너였는데…"

[좌담] 이라크 전쟁 10년, 반전평화운동의 현주소는

지난 3월 20일, 미국과 연합국 군대가 이라크를 침공한 지 10주년을 맞이했다. 10년 전 연합군이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던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부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와 알 카에다 연계설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당시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명분과 정당성을 상실한 침공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국제연대운동단체인 '경계를 넘어'는 10년 전 이때 전쟁과 점령, 그리고 한국군의 파병을 막기 위한 운동을 벌였던 활동가 세 명과 함께 당시의 한국 반전평화운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평화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보는 자리를 가졌다.

최재훈 (사회, 경계를 넘어 활동가) :

사담 후세인 정권 축출이 미국의 공식적인 외교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1998년 미 의회가 '이라크 해방법'을 제정하고 난 뒤였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이 단순한 가능성을 넘어서 구체적인 계획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건 9.11 이후다. 그때부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반전운동진영은 침공에 반대하는 운동을 준비해왔고 2월 15일 세계 동시다발 반전시위도 벌였다. 그날 로마에서만 3백만 명이 모이는 등 800개가 넘는 도시에서 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에 비해 한국은 침공 초기에는 다소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지 않나?

이태호(참여연대 사무처장, 당시 이라크 파병반대국민행동 정책사업단 간사) : 꼭 그런 건 아니다. 그 전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관련 평화콘서트를 비롯해서 다양한 반전운동이 전개됐었다. 그러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터지면서 그쪽으로 관심이 집중됐다가 2002년 10월에 이라크 침공 이야기가 나온 뒤로는 다시 전쟁반대 운동이 재개됐다. 다함께, 한국진보연대 같은 단체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보건의료단체연합, 참여연대, 녹색연합 등 참여하는 단체들의 스펙트럼도 넓었고, 민주노총도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2월 15일에도 3천 명 정도가 모일 수 있었다. 물론 침공일인 3월 20일에 광화문에는 3백여 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우리 반전평화운동이 막 싹을 틔워가는 시점이었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염창근(평화바닥 활동가, 당시 이라크 반전평화팀 사무국장) : 당시 국제적인 연대운동이 매일같이 대규모 집회를 벌이고 잇달아 공동행동을 조직하면서 우리 역시 고무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다양한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만들어가는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고 본다.

이태호 : 당시는 여러 면에서 운동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한반도 해빙국면이 시작되려는 순간 미국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서 남북 간, 북미 간 합의를 부정하고 대북 적대정책을 강화하는 바람에 미국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2002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게임에서 판정시비가 일어났고 그 직후 이른바 F-15 전투기 도입 반대운동, 효순이 미선이 사망사건 등을 계기로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당시 이런 이슈들과 관련된 온라인 서명에 보통 10만여 명이 참여하곤 했다. 이런 데는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감정만 작용한 게 아니라 한반도 해빙에 대한 기대, 한미동맹에 대한 누적된 불만, 그리고 9.11 전후로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등이 채택한 오만하고 일방주의적인 대외정책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거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도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그렇다고 그런 분위기가 그대로 평화운동으로 이어졌던 건 결코 아니지만.

조약골(핫핑크돌핀스 활동가, 당시 길바닥평화행동 활동가) : 2001년에 미 대사관 앞에서 아프간 침공반대 1인 시위를 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호응이 적었다. 그때만 해도 반전평화운동이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데다가 대중적인 운동의 흐름도 형성되지 않았던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그러다가 2002년부터 온라인상에서 반전운동의 필요성이 점점 제기되는 동시에 전쟁에 맞서 싸워야 할 논리들을 개발해서 전파하는 운동이 벌어졌었다.

최재훈 : 그러다가 전쟁이 시작된 지 11일 만인 4월 2일에 국회본회의에서 서희제마부대 파병안이 통과되면서 전쟁반대와 더불어서 한국군의 파병을 막아야한다는 여론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이태호 : 일단 파병을 해야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나니까 정부가 굉장히 전광석화 같이 수순을 밟아나갔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임시 국무회의 열어서 파병안을 통과시키고 그날로 국방위에서도 가결시켰다. 그리고 4월 2일 국회 본회의 통과된 뒤 불과 보름 뒤에 선발대가 출발했고. 어떻게든 공을 인정받으려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빨리 보내야했던 거다. 그러다보니 솔직히 우리도 조직적으로 대응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무조건 국회 앞에 모여서 국회진격투쟁과 농성에 들어갔다. 각계비상시국선언조차 국회 본회의에서 파병안이 통과되던 4월 2일에야 할 수 있었다. 그때 영화배우 장미희 씨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했었고, 유인촌, 이병헌 같은 영화인들도 참여했었던 게 기억난다.

조약골 : 하하, 유인촌...(모두 웃음)

이태호 : 맞다. 그 유인촌.(웃음) 외국도 보면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을 계기로 수잔 서랜든 같은 영화배우들이나 프로야구 선수들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셀러브러티(명사)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요즘 말하는 소셜테이너 개념이 생겨난 게 그 무렵부터였다. 당시는 조직적인 움직임보다는 개별적인 개인들의 참여가 더 활발하고 큰 영향을 발휘했다. 결국 이라크 파병반대운동도 개인들이 다양하게 결합해서 함께한 대중적 평화운동으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최재훈 : 그리고 부시 전 대통령이 5월 1일에 종전 선언을 한 다음부터 이라크에서 본격적인 내부 저항이 시작됐다. 그러면서 8월부터 추가파병 이야기가 또 나오니까, '아, 우리가 예언했던 게 맞았구나' 하면서.

이태호 : 그래서 꾸려진 연대기구가 이라크 파병반대국민행동이었다. 대략 350여 개 단체가 함께 했다. 촛불집회도 하고 성남비행장까지 가서 바리케이드도 쌓고. 민주노총 같은 경우에는 군수물자 수송거부 운동도 하고 부산지역 노조와 시민단체들과 함께 항만 점거도 시도했다. 비록 헌법소원이 각하되긴 했지만 파병을 거부한 군인도 있었고.

진보개혁세력 내에서도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는

최재훈 : 그런데 진보개혁세력 내에서도 대놓고 찬성은 못해도 암묵적으로는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라거나 노무현 정부의 국내 개혁정책 추진을 위해서는 이라크 파병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도 있지 않았나?

이태호 : 분명히 있었으니까 고 김선일 씨 납치 사건 때도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수가 만 명을 채 못 넘었던 거라고 본다. 재밌는 통계가 하나 있는데, 그 무렵 OECD 국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중 "대량살상무기 보유 주장은 거짓이다"와 "이라크 전쟁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문항들에 대해서 한국 국민들은 90%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거만 놓고 보면 한국은 아랍보다 더한 반전반미국가인 셈이다.(웃음)

그런데 파병 문제를 물어보면 반대가 딱 절반으로 떨어지고, 한국 정부가 파병을 안 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2~30%까지 떨어졌다. 이건 다시 말해, '전쟁은 나쁘지만 세상은 결국 힘이 지배한다, 우리는 약하니까 강자를 쫓아다녀야 된다'는 현실주의적인 인식이 우리들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거다. 혹시나 미국이 북한까지 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테고.

염창근 : 보편적인 인식은 아니었지만 개중에는 심지어 '미국정부와 군수자본이 쌓여있는 재고무기를 처리하려면 어차피 전쟁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그걸 한반도에 쓰는 대신 이라크에 쓰는 게 차라리 낫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태호 :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파병반대국민행동 안팎에서 노무현 정권 퇴진 슬로건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탄핵됐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대통령에 대해 다시 퇴진 운동을 하는 건 전술적으로 무모하다는 입장과 그래도 원칙적으로 퇴진을 내걸어야 한다는 입장이 서로 부딪쳐서 반론, 재반론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운동, 특히 시민운동 내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해 동정적인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염창근 : 사회 전반적으로는 반전평화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굉장히 고양되어 있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운동조직의 운동방식에 대한 거부감이나 회의감을 드러내는 분위기도 강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때 운동권들의 관성적인 집회 형식을 벗어나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활동하는 자생적인 그룹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은 크게 부각되거나 기억되지 않는 게 다소 아쉽다.

최재훈 : 그렇게 생겨난 자생적인 그룹 가운데 어떻게 보면 가장 완강하게 끝까지 싸운 사람들이 길바닥평화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매주 거리에 나가서 직접행동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지 않나. 심지어는 72시간을 연속으로 파병반대 노래방을 하는 걸 보고는 저건 맨 정신으로는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는데.(웃음)

조약골 : 너무너무 추웠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2004년과 2005년 해마다 연말이면 국회에 파병 연장안이 올라오니까 11월, 12월에는 거의 길바닥에서 살다시피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으면 절대 못 했을 텐데 파병을 막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행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짓을 매일 그렇게 했나 싶다.(웃음)

다른 한편으로 극복하지 못한 한계도 있다. 우리는 이 운동에 동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또 그걸 장점으로 내세웠는데 그게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모인 개인들이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성과를 이끌어내기엔 힘이 워낙 미약했다. 그런 면에서 '너희가 그래서 바꾼 게 뭐냐'고 묻는다면 만족할만한 대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라도 더 악에 받쳐서 끈질기게 갔던 것 같다.


'한국은 아직도 전쟁 중이라 포탄을 겁내지 않는 구나'

최재훈 :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평화활동가들이 승합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노래, 춤으로 반전메시지를 전하던 평화바람도 그 때 만들어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라크 반전 평화팀의 활동은 아마 한국사회에서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는 처음 경험한 방식의 운동이 아니었나 싶다.

조약골 : 전쟁이 임박했고 또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활동가들이 인간방패로 그 현장에 들어가서 직접행동을 벌인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이태호 : 이라크 반전 평화팀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단체연합이나 나눔문화, 정토회 같은 단체들도 이라크 현장에서 활동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한국 활동가들이 무더기로(?) 들어와서 포탄이 떨어지는데도 꿈쩍없이 활동하고 그러니까 이라크 주민들이 '야, 한국 사람들 정말 용감하다' 그러면서도 '아, 한국인들은 자기네 나라도 아직 전쟁 중이어서 포탄을 겁내지 않는구나' 했다고 한다.(모두 웃음)




최재훈 :
반전 평화팀 내에 갈등이나 잡음도 적지 않게 들려왔던 걸로 아는데?

염창근 : 솔직히 내부 갈등이 심했다. 팀원 가운데 절반은 흔히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었고 절반은 기존 운동권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는데, 활동 방식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딪히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내부에 각각의 소규모 팀을 꾸려서 조사와 인터뷰, 자원 활동, 인간방패 등 각자 원하는 활동을 한 뒤 한 번씩 만나서 서로 공유하는 식으로 조정했다. 그러다 의견차이나 오해가 생기면 또 부딪히고. 막판에는 차라리 빨리 해산하기를 기다리는 분위기까지 갔었는데, 결국 끝내 갈등을 회복하지 못한 채로 활동이 종료됐다.

최재훈 :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같은 지향을 가지고 운동을 벌이는 최초의 실험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간에 이라크 반전 평화팀의 경험은 하나의 운동 모델로 정착돼서 그 뒤 평택 미군기지 반대,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평범한 시민들이 평화지킴이로 참여하는 길을 틔워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이태호 : 그렇다. 그리고 이라크 반전 평화팀이 이룬 성과 중에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또 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뒤에 전 세계 반전평화 운동가들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벌였다. 거기서 결의된 것 중 하나가 '점령에 대한 감시(Occupation Watch)'였다. 실제로 이행한 나라는 몇 안 되는데, 한국 활동가들은 그걸 실천에 옮겼다. 이라크 반전 평화팀에 이어서 만들어진 이라크 평화네트워크가 이라크 6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점령을 바라보는 현지 주민들의 여론을 조사해 발표했던 사실, 2004년 팔루자 학살 때 미군의 봉쇄가 풀리자마자 윤정은 활동가가 맨 먼저 들어가서 묘지까지 일일이 다 확인해가며 2차에 걸쳐 피해 보고서를 냈던 성과 등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염창근 : 그때의 성과들을 토대로 그 위에 새로운 걸 쌓아가야 하는데, 일이 터질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일단 안정적인 기반이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까 각자가 생활면에서 버티기 힘든 측면도 있고, 재단 같이 체계적인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틀을 못 만들어놓은 것도 후회가 된다.

조약골 : 과거의 수직적인 운동문화가 점차적으로 없어지고 권위에 대한 반대가 생겨난 데는 이라크 반전평화운동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태호 : 최근 십여 년 사이 우리 사회에 무기 마니아들이 엄청 늘었다. 그러자 언론사나 인터넷 포털에서 경쟁적으로 무기 관련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고, 국방부에서도 잠재적인 지지세력이라고 생각해서 무기 관련 정보를 일반인들에게 자발적으로 공개한다. 이건 그만큼 군사주의가 커질 수 있는 기반이 더 확대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고 더 잘해야 한다.

또 한 가지, 흔히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하지 않나? 예를 들어, 이라크 파병 때 다이만 부대라는 항공 수송 부대는 국회 동의도 없이 은근슬쩍 파견돼서 자이툰 부대를 수송했다. 이건 명백히 헌법 위반이다. 여기서 보듯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커다란 가치 담론을 가지고 벌이는 운동과 세부적이고 기초적인 각론을 따져 드는 운동이 나란히 같이 갈 때 평화운동이 운동성과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