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창밖으로 군인들이 보인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는 신호를 우리에게 보낸다. 사방으로 교통이 차단된 상태다. 우리를 인솔하는 마틴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데다 바깥의 날씨가 너무 추워서다.
잠시 밖에 다녀온 그는 "많이 춥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어라. 여기부터 걸어야 한다. 목적지까지 10블럭 정도 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장시간 버스 여행에 질린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14시간 이상 버스를 탔으니 지겨울 만도 하지.
마틴은 "늦어도 오전 9시까진 내셔널몰에 입장해야 한다. 취임식을 가까이 보고 싶은 분은 의사당 가까이 가시면 된다"고 충고한다. 내셔널몰은 링컨 기념관과 미 국회의사당 사이에 위치해 있다. 양쪽 거리는 걸어서 1시간 남짓이다.
| ▲ 취임식장으로 가는 사람들 ⓒ김춘효 |
| ▲ 의사당 근처에 자리잡은 사람들 ⓒ김춘효 |
인종, 성별, 연령 뒤섞인 '취임식 가는 길'
필자는 오전 5시 50분에 버스에서 내렸다. 사방은 칠흑 같이 어두웠다. 초행길이어서 거리를 가늠하기는 더욱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걸었다. 설마 대통령 취임식날에 무슨 일이라도 날까 하는 생각에서다. 조지 워싱턴대학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걸었다. 20분 정도 걷으니 길이 끊어졌다. 왼쪽에 링컨기념관, 오른쪽으로는 큰 탑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머뭇거리는데 "혼자 걸어다녀도 괜찮아"하고 패티(Patty)가 말을 건다. 나는 "군인과 경찰, 경찰견들이 이렇게 많은데 별일 있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 뒷좌석에 딸과 같이 앉았던 마음씨 좋은 50대 흑인 아주머니다.
나는 그에게 "오늘 왜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우리가 만들어낸 희망을 축하하려고 왔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잖아. 그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축하해야지"라고 답한다. 그는 "오바마는 현재 진행형인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이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역사적인 순간에 참석하는 것도 생의 한 즐거움이라고 말하며.
그의 일행과 함께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둠속에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온다. 그들의 연령과 인종, 성별을 '감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앞에 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오바마를 보려온다. 마치 좋아하는 가수 공연을 보기 위해 야외 공연장을 찾는 팬들처럼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취임식장으로 간다. 어둠과 한기를 뚫고서. 이렇게 오바마는 현재 미국인들에게 최상의 인기 스타인 듯했다.
| ▲ 손에 손에 성조기가 들려 있었다. ⓒ김춘효 |
의사당 방향으로 걸어가던 중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숨진 이들을 기념하는 탑들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미국의 주(states)의 이름이 돌에 새겨져 있다. 같이 걷던 서던 일리노이드 주립대학 라디오 텔레비전 전임 강사인 러브(Love)가 이 탑들은 몇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링컨기념관과 의사당 사이에 미국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기념하는 장소는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은 세월이 지나도 국가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현재 미국은 지나간 세대의 희생과 죽음 위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탑 주변에 미 성조기가 나부낀다.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자원봉사자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넨다. 인사를 받는 사람들도 똑같은 말로 답례를 한다.
의사당 방향으로 계속 걷다보니 보이스카우트 소년들과 중년 부인들이 성조기를 나눠준다. "국기 받아 가세요." 엉겁결에 나도 성조기 하나를 받았다. 이유는 없다. 웃으면서 국기를 주는데 안 받을 수 있나. 그래서 그냥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갔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려와서 옆으로 빠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의사당 100m 앞까지 갔다. 거기까지가 내가 갈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가족끼리 친구끼리 그룹을 지어서 모여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아예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고 있었다. 시계를 봤더니 오전 7시다. 취임식이 시작되려면 앞으로도 5시간이나 남았다. 그런데 현충탑 앞 쪽은 꽉 찼다.
| ▲ ⓒ김춘효 |
| ▲ 일출 무렵 의사당 주변의 모습 ⓒ김춘효 |
"부시가 아직도 대통령이야?"
서서히 날이 밝는다. 30분 동안 멍하니 있다가 그 자리를 떴다. 너무 발바닥이 시리고 추워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그새 사람들이 꽉 찼다. 골격 큰 미국인 사이를 뚫고 나오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 호피 무늬 겨울 코트를 입은 흑인 중년 여성이 길을 뚫고 있었다. 그녀 뒤를 쫒았다. 미네소타에서 온 백인 중년 여성 한 명도 만났다. 그의 쇼핑백에 신문지가 가득이다. 그녀의 아들, 딸에게 깔고 앉으라고 신문지를 건넨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준다. "고맙습니다"라며 얼른 챙겼다.
또 그러던 중 빨간 옷을 입은 흑인 여성 두 명이 "델라웨어" "델라웨어"를 외치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델라웨어 주에서 온 사람들인 듯하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환호한다. 손에 든 성조기를 흔들면서 "오바마" "오바마"를 연창한다. 그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나는 다시 뒤로 뒤로 향했다. 어린 백인 여성이 성조기를 간절히 찾고 있길래 내가 쥐고 있던 것을 줬다.
오전 10시. 아직 취임식은 시작되지 않았다.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 주의사항들이 적혀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몰려온다. 나는 계속 뒤로뒤로 갔다. 내셔널몰을 거의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흙먼지가 가득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셔널몰로 향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한 겨울의 뿌연 흙먼지였다.
손에 손에 성조기를 들고 오바마 배지나 모자 그리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흙먼지였다. 추위를 녹이기 위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었다. 좋아하는 대통령을 만난 미국인들에 대한 부러움을 차 한 잔에 녹이고 싶었다.
다운타운까지 나와서 빵 전문점에 갔다. 커피를 시키고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취임식장으로 간다. 그때 한 중년 백인 여성이 아들에게 재촉한다. 빨리 음료수를 마시라고. 내가 말을 걸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메리 럽(Marry Rupp)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그는 "오바마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고 대답한다.
나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희망, 희망 하는데 무슨 희망이냐? 대통령이 바꿨다고 미국 정책이 갑자기 바뀔 것 같느냐?" 그러니 그는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현재 경제적인 어려움도 오바마가 잘 해결할 것이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아들(John Rupp)에게 오바마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고등학생인 존은 "오바마는 대단한 연설가이다. 그리고 정치적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이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서둘러 말을 끊고 취임식 행렬에 합류한다.
11시 30분쯤 현충탑 끝 부분으로 갔다. 빵가게에서 나와 취임식장 부근까지 가는 길에 오바마 달력, 티셔츠, 배지 등을 파는 잡상인들이 가득하다. 한 프레쩰 회사는 무료로 새로 나온 프레쩰을 나눠주며 사은 행사가 한창이다.
다운타운에서 취임식장 부근까지 가는 길도 빠져 나오는 길 만큼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새 많이 늘어났다. 한마디로 인산인해다.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로 서로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웃는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백인 젊은 부부도 보이고, "부시를 체포하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흑인 청년도 보이고, "오바마의 침묵은 가자인들을 죽인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도 보인다.
| ▲ 오바마 등장에 환호하는 사람들 ⓒ김춘효 |
내셔널몰 한쪽에 서 있는 나에게 중년 백인 부부가 다가왔다. 톰 마릴린 (Tom Marilyn)과 마샬 고츠(Marshall Goetz)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오하이오 주의 콜롬부스에서 살고 있다며 자신의 딸을 위해 설문에 응해 달라고 했다. 딸이 취임식장에 오고 싶지만 몸이 불편해 오지 못했다면서 딸이 알고 싶은 몇 가지 질문을 내게 했다. 이라크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오바마 정부가 100일 안에 했으면 하는 최우선 정책이 무엇이었으면 좋겠냐, 그리고 오바마가 어떤 애완견을 키웠으면 좋겠느냐 등의 질문이었다.
나는 이라크전을 반대하며 오바마는 신자유주의의 오류를 하루빨리 청산하고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진돗개"를 오바마가 키웠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톰과 마샬은 웃으면서 자신의 딸에게 그대로 전하겠다고 했다. 오늘 만난 미국 사람들 중에서 그들 부부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 ▲ '오바마의 침묵이 가자 주민들을 죽였다' 피켓 시위를 하는 사람 ⓒ김춘효 |
화면에선 역대 생존하는 미국 대통령이 화면에 한 명 한 명 호명됐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소개되자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들린다. 심지어 "아니 아직까지 대통령이었어"라는 말까지 들였다.
11시 45분에 오바마가 의사당 단상에 등장했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너무 멀리 있어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리지는 않았다. 간간히 들리는 말은 희망과 미국은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지켜볼 참이다. 미국에게만 희망이 있고 다른 나라에게는 굴욕인 그런 위대한 미국을 만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미국 정부는 미국 기업을 측면 지원하는 역할을 계속해 왔다는 것을 오바마도 알 것이다. 그래서 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 또한 알 것이다. 국가 운영 방향을 급격히 선회하지 않으면 오바마도 별 수 없다는 것도 알 것이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밟았던 전철을 그가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대형 스크린에 비친 새로운 미국 대통령을 바라봤다. 화면에 비친 그는 참 매력이 넘치는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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