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본 관객의 숫자보다도 - 〈서편제〉는 서울에서 100만 명 이상이 본 최초의 한국영화로 기록돼 있다 - 영화관이 (나를 포함한) 다수 관객의 흐느낌으로 흥건했던 점이 더욱 인상적이다. 도대체 저예산 예술영화라고 해야 할 〈서편제〉가 어떻게 엄청난 관객을 모았을까. 무엇이 관객의 흐느낌이라는 흔치 않은 정서적 반응, 공감 또는 공명을 불러 일으켰을까.
〈서편제〉를 얘기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판소리다. 판소리의 고수 유봉(김명곤 분)과 수양딸 송화(오정해 분), 의붓아들 동호(김규철 분)는 소리를 팔아 먹고사는 떠돌이 소리꾼들이다. 판소리는 그들의 삶의 수단이자 목적이다. 이들은 판소리로 인연이 맺어지고 판소리 때문에 절망하고 희열을 느낀다.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는 〈서편제〉가 시간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동호와 유봉의 친구가 지난 일을 회상하는 4개의 긴 플래시백은 내러티브의 핵심을 이룬다. 플래시백을 절묘하게 이어 붙인 내러티브 구조는 판소리(꾼)를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에 위치시킨다.
영화가 역사적 격동에서 어느 정도 비켜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서 보여지는 이들의 삶은 우리의 근대역사와 겹친다. 일제하 1940년대 초에서 시작해 60년대 말쯤까지 아우르는 〈서편제〉의 시간은 유봉 일가의 유랑과 이산으로 점철돼 있다.
이 시기가 '우리'- 여기선 모호하게 집단적 주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가 온갖 모순과 갈등, 혼란과 대립, 고통과 희망 속에서 본격적으로 근대로 진입한, 그러한 상처투성이의 시대였다. 이를 감안하면, 소리꾼이라는 유별난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봉 일가의 행적이 우리의 근대 경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판소리와의 관계와 시간을 XY 축으로 놓고 세 인물의 궤적을 살펴보자. 유봉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수구적 전통주의자다. 판소리가 최고의 음악이고 판소리가 최고의 위안이다. 판소리가 삶의 전부여서 애들 배를 곯리면서도 판소리 한 대목을 배우려 친구에게 돈을 지불하는 인물이다. 판소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송화의 소리를 좋게 한다며 수양딸의 눈을 멀게 하는 데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이는 처절한 예술가정신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시대착오다. 그는 "왜놈, 양놈 노래가 판소리를 당하기나 하냐"고 큰소리 치지만 세상이 바뀌는 것에서, 대중이 판소리보다는 서양음악을 더 좋아하게 된 것에서 눈을 돌린다.
판소리에 재능이 있는 송화는 수양아비의 손에 눈이 멀게 되면서 판소리를 시공을 초월하는 초월적 예술로 승화시키는 인물이다. 유봉이 소망하던 대로 득음의 경지에 접근하는 착한 딸이자 객지의 동호가 그리워 못 잊는 누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성(아버지)의 지향을 실현하는 인고(忍苦)의 여성상이자 언제나 남성(동생)을 품어줄 것같은 이상적 모성상인 것이다.
동호는 세 인물 중 가장 세속적이고 보편적인 인물이다. 판소리에 별다른 흥미나 재능을 보이지 않다가 결국 판소리를 집어치운다. 가난과 혹독한 훈련에 지쳐 유봉을 떠나 도회지로 나간다. 약초 수집 일을 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삶이 안정될 무렵 두고 떠나온 누이 송화와 판소리가 그리워 전라도 일대를 떠돌며 유봉과 송화의 발자취을 더듬고 판소리를 찾는다. 일종의 '돌아온 탕아'다.
〈서편제〉의 스토리는 철저히 판소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판소리에의 접근, 반발, 욕망이 세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그런데 30-40년의 시간이 흐르며 영화 내의 사건을 통해 서서히, 그러나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판소리의 쇠락이다. 유봉이 대갓집 생일잔치에 초대되어 춘향전 어사출도 장면을 공연하는 초반 장면과 송화와 유봉이 저잣거리에서 공연하는 중반 장면을 비교해보라. 앞 장면에선 유봉이 다수 관객 앞에서 신명난 공연으로 갈채를 받는 반면, 뒷 장면에선 조무래기 몇몇만이 자리를 지키다가 '베사메 무초'를 연주하는 유랑극단 밴드를 따라 자리를 떠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약장수를 따라 다니며 푼돈을 벌던 것마저 끊긴다. 약장수가 대신 바이올린 연주자를 고용키로 했기 때문이다. 동호가 가출하면서 "이젠 소리로는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여!"라고 외치는 장면은 판소리의 주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개봉 당시 (그리고 현재의) 우리에게 판소리는 무엇인가. 〈서편제〉라는 낯선 제목이 그러하듯 판소리는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다수에게 낯선 것이다. 판소리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듯한, 박제된 예술로 다가온다. 우리와는 별 관련이 없는, 일부 사람들이 전통보존의 차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증언하듯 판소리가 멸종위기의 천연기념물처럼 보존대상이 아니라 민중이 사랑하던, 신명나는 가락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변한 것은 판소리가 아니라 우리였던 것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 시대였던 것이다. 임권택의 정확한 연출은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판소리 공연은 초반에만 등장한다. 후반으로 가면 공연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관객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서편제〉는 판소리/예술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시대의 변화에 대한 영화다. 시대가 달라져도 변치 않는 판소리의 예술성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판소리를 대하는 우리의 달라진 태도에 대한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배경에서 어른거리는 근대화, 이에 부수되는 전통문화의 쇠잔과 서양문화의 득세를 고려한다면 〈서편제〉는 과거와 현재, 전근대와 근대, 동(東)과 서(西)의 충돌과 갈등을 성찰하는 영화로 읽힌다. 〈서편제〉는 우리민족 고유의 한(恨)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차원을 넘어선다.
이제 판소리는 단순히 전통문화의 기표(signifier)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서구화 과정에서 밀려나고 사라진, 그러나 소중한 그 무엇이 된다. 이 점에서 동호는'우리'의 분신(alter ego)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물질/도시/근대성을 좇아 판소리/주변/전통을 버린다. 그랬던 그가 송화를 찾아 나선다. 이 여정은 그가 버렸던 판소리, 그리고 과거를 찾아가는 것이다. 전근대의 무능력(가난, 학대)과 근대성의 매력 때문에 가출했던 동호가 (상징적 의미에서) 귀향하는 것은 과거/전근대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한편 근대성이 유토피아의 도래가 아님을 암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축에서 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정말 몰라보게 변했다. 그 중 하나는 판소리와 같은 전통문화를 버리고 서양문화를 우리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양의 근대기술과 제도를 들여오면서 서양의 문화, 종교, 가치관도 함께 들어왔고 이것들이 기존의 우리 것을 밀어내고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주요부분이 되었다. 근대화와 자본주의화, 개인화(individualization)가 역사적 필연인 것만큼 서양식 가치관과 문화 또한 필연적인 것인가. 서양 문화도 이젠 우리 것이 된 것인가. '우리'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이러한 어려운 질문들은 일단 제쳐두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판소리의 쇠락으로 상징되는 전통문화의 패퇴와 서양문화의 승리, 서양문화를 우리의 주도적 문화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은 필연적으로 애증병존의 양가감정(ambivalence)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서편제〉를 보면서 수많은 관객이 흘린 눈물의 정체는 이 양가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뒤돌아보지 않고 근대화의 길로 매진하는 동안 전통문화는 미신과 무지, 고루, 낙후, 시대착오와 동일시되어 하루빨리 버려야 할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서편제〉가 보여주듯 전통문화는 나름의 아름다움과 적실성(relevancy)을 갖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전통문화를 버리고 등한시한 것은 거센 근대화의 흐름에 떠밀려서이지 않았던가.
양가감정은 나아가 우리가 겪어 온 근대화 과정 전반에도 적용된다. 특히 이젠 지배적 양식이 된 서양식 사고방식과 문화는 새삼스레 내칠 수도, 마냥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이렇게 찢겨진 우리의 집단(무)의식이 한편의 영화를 만나 정서적 공명을 일으킨 것이 서편제 신드롬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대중들은 이제서야 과거/전통을 돌아보며 화해를 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눈가를 적셨던 것이 아닐까.
*한마디 덧붙이자면 : 미국 문화이론가 프레드릭 제이머슨은 한 민족의 집단적 역사적 경험이 구체적 문화텍스트를 통해 알레고리로 드러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적 알레고리(national allegory)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제이머슨 식으로 말하자면 〈서편제〉는 유랑하는 소리꾼 일가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극화한 민족적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제이머슨은 민족적 알레고리는 전근대적 요소가 짙게 남아 있는 제3세계에 잘 적용되는 반면 현대 서구사회에는 잘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후자의 경우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가 철저히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영화의 경우는 단선적 설명으로 충분치 않은 듯이 보인다. 90년대 이후 민족적 알레고리와는 거리가 먼 탈정치적, 탈역사적 영화가 흐름을 주도해 온 반면, 정작 흥행기록을 다시 쓴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같은 영화들은 분단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알레고리화한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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