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진짜 사람다운 삶을 보았다는 한국인이 있다. 오히려 '동물의 천국'이라는 그곳에 사는 동물들이 생명의 위엄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말한다. 왜 그럴까. 초가을 주말, '아프리카'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이 글은 원래 <녹색평론> 9-10월호에 실렸던 이화여대 서숙 교수(영문과)의 글이다. 전재를 허락해주신 필자와 <녹색평론>측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아프리카**
의외였다. 아프리카에 가서 골똘히 생각하게 된 것이 인간의 격조에 관한 것이었다니. 그 혼돈과 기아와 질병의 땅에서.
아프리카에 두주일 다녀왔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일주일 머물고 나이로비와 요하네스버그에서 잠깐씩. 안전 때문에 국빈들이 머문다는 쉐라톤 호텔을 숙소로 정하고 마카레레 국립대학에서 열리는 학회에 승합차를 타고 들락거리며, 어쩌다가 시내를 불안하게 걷기도 하며 아프리카를 보았다.
이건 그러니까 6.25 사변 직후 외국인들이 조선호텔에 머물며 자동차로 이화여대를 몇번 다닌 후, 코리아의 참상을 보았다고 하는, 그런 경우와 비슷할 거다.
나에게 아프리카는 누구인가.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독립, 지금도 진행중인 내전, 독재, 만델라, 에이즈, 현대예술의 모태가 되는 춤과 색채와 리듬, 야생동물의 천국, 사파리... 이런 나열에도 불구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불가사의의 땅. 그래서 예방주사를 맞고 말라리아 약을 챙기면서라도 가고 싶었다.
지금 돌아와서 보름이 넘었지만 머릿속에 몸속에 박힌 소리와 느낌과 색깔 들이 눈앞으로 몰려온다. 미지근한 것들에 오래 길들어 있다가, 갑자기 강렬한 것들의 집중사격을 받은 것 같다.
거리에는 건물마다 장총 든 보초들이 지키고 서 있다. 검은 매연 속에 인파와 낡은 중고차들이 뒤엉키는 모습은, 총알택시 잡으려고 난장판이던 통금 직전의 서울을 연상케 한다. 검은 벤츠들이 들락거리기도 하는 학교 앞에는 거지들이 앉아있고,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가 담배 몇 개비, 알사탕 몇 개, 껌 몇 개를 양푼에 놓고 팔고 있다.
학교가 서있는 언덕에서 옛 왕릉이 있는 맞은편 언덕을 향해 나지막한 골짜기를 지나간다. 눈앞에 전개되는 시장 풍경은 낡은 무성영화 필름 장면 같다. 마른 흙먼지가 자욱하고, 낡은 옷들이 펄럭이고, 허물어져가는 판잣집들에는 코카콜라, 헤어살롱, 레스토랑이라는 커다란 영어간판들이 붙어있고, 퍼런 바나나 더미들이 놋가리처럼 쌓여있다. 그 속에서 검은 얼굴들, 흰 눈동자들, 검은 손들이 허우적거리며 누군가를 향해 무엇인지 말하려는 듯하다.
이런 농촌의 모습도 떠오른다. 밭에는 키큰 사탕수수, 옥수수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흙은 비옥해 보인다. 초가지붕, 흙지붕들 사이로 엽서에서 본 것 같은 시골 여자들이 보인다. 수건을 쓰고 맨발로 밭을 매기도 하고, 그냥 앉아있기도 하고, 지나가는 버스들을 쳐다보기도 한다.
아이들을 빼놓을 수 없지. 까만 아이들이 참 많기도 하다. 계집애들, 사내아이들, 청소년들. 진한 초콜릿 색깔의 얼굴, 목, 팔, 종아리와 맨발들. 그들은 선명한 원색의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다. 손짓 발짓하며 웃으며 달려가는 아이들은, 꽃과 줄기는 새까맣고 잎들은 알록달록한, 그러니까 움직이는 꽃나무들 같다.
노란 해바라기, 붉은 백일홍, 자주색 맨드라미. 저녁 무렵, 무성한 옥수수밭 사이로 헤헤거리며 달려가는 영롱한 아이들. 밭에서 어슬렁거리는 까만 염소들, 강아지들, 아기들.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다.
길에서 학교에서 밭에서 스치고 지나간 이 사람들은 대단히 천연스러워 보인다. 안달이라거가 조급증 같은 것을 모르는 듯하다. 저돌적이지도 않고 눈초리가 면도날 같지도 않다. 게으르다 또는 거만하다 싶을 정도로 그냥 무심해 보인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있는 풀들 또는 나무들 같다. 그들은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얼굴을 좀 찡그린 채 저 앞을 바라본다. 그 모습들이 막막해 보이기도 하지만 도시인들의 황량함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땅과 밀착되어 있어서 그런가.
그런데 이런저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문득 아주 묘한, 지금은 잊었어도 낯익은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정밀한 느낌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비슷한 인상들이 되풀이 되면서 알게 된다.
헐렁하고 뒤죽박죽인 듯한 그들의 일상을 흐르는 느낌, 오래 묵은 조선간장에 밥 비벼 먹을 때의 짜고 개운한 맛 같은, 또는 한여름 텃밭에서 딴 토마토의 향기 같은. 더 빨리 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뜻밖의 장소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허황한 것들에 눈이 팔려 그런 느낌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서도 다시 찾을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느낌이 도대체 이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어디서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이런 분위기는,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 그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에 근거한 어떤 관조적인 태도와 상관있는 듯하다.
하루에 식비로 1달러도 쓰지 못할 때, 굶지 않는 것이 절대절명의 과제일 때, 그 삶에는 여분과 잉여가 들어설 틈이 없다.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정결함 또는 정밀함과도 같은 느낌은 이 엄정한 생존조건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가난한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확실해진다.
일요일 아침, 근처에 있는 성당에 갔다. 호텔에서 마주치는 얼굴들말고, 길에서 만나는 혼돈의 모습들말고, 조촐하고 뽓뽓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작은 성당으로 사람들은 차례로 들어와 자리잡고 앉는다. 노인들, 중년들, 어린아이들, 애기를 안고 온 젊은 부부들. 그들은 모두 단정하다. 낡은 옷을 잘 손질해 입고 머리도 차분하게 빗었다. 꺼먼 맨발에 샌달을 끌고 다닐 청년들도 흰 양말에 구두를 신었다. 제단 위에는 학예회 때처럼 알록달록한 성모상, 예수상이 걸려 있다.
사람들은 찬송가를 부른다. 영어로 먼저 부르고 아프리카 말로 부른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난다. 신부는 조용하게 짧게 강론한다. 다함께 기도한다. 성가대가 노래한다. 밖을 향해 열어놓은 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천장에서는 작은 나무 선풍기가 빙빙 돌아간다. 정숙하고 맑은 기운이 가득 찬다.
이런 소박한 예배를 드린 적이 언제였나. 나는 일년에 두세번, 부활절 또는 송년에 음악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 더 자주 가고 싶은 때도 있지만, 교회 안의 후텁텁한 분냄새가 떠오르면서, 어디 외딴곳에 개척교회가 없나 답답해 하기도 한다.
나는 그들 가운데 앉아 두리번거린다.
이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 예수님은 누구인가. 이들에게 성당이란 무엇하는 곳이며 기도란 무엇인가.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엎드려 기도하고 찬양하며 묵상하는 그들을 나는 계속 바라본다.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는, 하도 들어서 CM송이 되어버린 이 구절이 새삼스럽게 절로 떠오른다.
어느 소설 속에서 옛 선비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던 말도 떠오른다. "나의 가난으로 인해 나는 인생에서 귀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 속에 이렇게 앉아있으니, 이런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하므로 평화로울 것이라는, 가진 것 없어 맑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 없어 바르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뜻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것이다. 그들은 이 낮은 곳에 앉아 겸허하게 엎드림으로써 초월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성전을 감도는 정결한, 격조라고 부르고 싶은 이 느낌은 일종의, 삶으로부터의 거리두기, 그런 것과 관계있는 듯하다. 기름지거나 포식상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가난하므로 본질적인 것을 응시할 때 생기는 무엇인 듯하다. 그러니까 격조란 일종의 초월이다. 예배를 끝내고 나는 헌금을 하고 밖으로 나온다.
이곳 대학의 도서관 열람실 입구에 조각 작품이 서있다. 제목은 '전쟁 희생자'. 아프리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불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얼굴과 두 팔은 떨어져 나가 없고, 하나 남은 다리가 몸통을 받치고 있는 이 조각은, 꿈틀거리는 근육과 생명력 때문에 비상하는 큰 새를 연상하게 한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불굴의 정신 또는 영혼이라면, 인간의 적은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모든 것들이다. 전쟁, 기아, 과잉, 독재...
오늘 아프리카가 우리에게 묻는 것, 극도의 가난과 극도의 포만, 이 양극의 질곡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의 격조가 다시 삶 속에 돌아와 뿌리내릴 수 있을까.
아프리카는 주시하고 있다.
***사자를 보다**
사자를 보았다. 사자는 간 데 없고 사자 형상을 한 돼지가 배불러, 퍼질러 누워있었다. 사자에게도 돼지에게도 모독이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사파리를 했다. 어제 오후, 그리고 오늘 새벽. 일어나자마자 눈 비비고 나섰다.
"새벽이나 오후 늦게 나가야 동물들을 보지요. 낮에는 너무 더워 그들도 낮잠을 자거나 꼼짝도 않아요." 자동차 뚜껑을 열고 일어서서 새벽공기를 마시며 달린다. 광활한 초원. 장관이다. 검은 코뿔소들이 떼지어 풀을 뜯고 있고, 목이 너무 길어 황당한 사슴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사자를 보는 일이다. 운전기사는 키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우거진 곳을 달리는데, 영 사자가 살 곳 같지 않다. 사자가 의외로 소박하네. 하기사 밀림의 왕이므로 백년 묵은 숲에서 살 거라는 생각은 인간다운 발상이지. 세속의 왕은 궁전에서 사니까.
한시간쯤 달려와서 관목들이 엉클어진 곳에 멈춘다. 벌써 대여섯대의 차들이 와서 대기상태다. 어떤 차들은 더 가까이 보려고 앞바퀴를 덤불 위에 올려놓는다.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준비하고 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저기 저기." 누가 낮게 속삭인다. 덤불 사이로 커다란 숫사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믿을 수가 없다. 정말 사자구나! 사자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기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먼산 보듯 한다. 그 모습이 오래된 나무등걸 또는 검은 바위 같다. 그런 모습 앞에서 찰칵거리는 카메라는 경망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집요하게 사람들이 사자를 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무수한 관광객들은 왜 스무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모여드는가. 그것은 물론 그가 밀림의 왕이기 때문이다. 신성하고 용맹스러운 존재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들은 이 왕을 경배하러 온 것인가. 아니다. 왕이 추락하는 것을 확인하러, 신성한 존재를 망가뜨리러 온다. "그들의 호기심과 쾌락을 위해 온다."
덤불이 흔들린다. 나뭇잎들 사이로 사자 네마리가 더 보인다. 크고 누런 사자들. 한마리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붉은 살과 뼈가 보이고 한옆으로 남은 몸통인지 다리인지 보인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천천히 먹는다. 일제히 카메라들이 터진다. 그는 끄떡도 않는다.
사자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검은 나무 한그루 서있고, 가지마다 까마귀들이 여섯마리, 숨죽이고 앉아 대기하고 있다. 먹이를 기다리는 팽팽한 긴장 때문에 새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설치작품처럼 보인다. 매일 아침저녁,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저 넓은 초원에서 자유로운 듯 풀을 뜯고 있는 들소와 어린 사슴, 그들 중 누군가는 저렇게 먹이가 될 것이다. 사자들이 먹고 나면 새들이 먹을 것이다. 낭비와 잉여가 없는 세계. 완벽한 순환질서와 자급자족의 세계.
식사를 끝낸 사자들은 잠시 어슬렁거리더니 그대로 널부러져 누워버린다. 허옇게 드러나는 뱃살과 덜렁거리는 엉덩이살 어느 곳에도 긴장이 없다. 그의 몸 어느 구석에서도 밀림을 질주하는 사자의 용맹은 찾을 수 없다.
아프리카 대륙의 국립공원.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초원은 언뜻 보면 대자연보다 더 자연에 가깝다. 저 멀리 혼자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목에 매달린 실험용 푯말만 아니라면, 이곳이 관제 또는 사이비 야생동물 서식지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곳에 사는 사자들은 행복한가. 사자의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 눈앞에 먹이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사자는 먹을 것을 찾아 숲을 헤맬 이유가 없다. 어미젖에 매달린 어린 사슴을 응시하며 귀를 쫑긋거리는 암사자처럼 아침저녁, 먹잇감에 눈독만 들이면 된다.
그런데 먹이만 생각하는 것이 사자인가. 사자가 저렇게 배가 부르다고 만사 귀찮은 듯 포기해도 되는 것인가. 그는 동물의 왕이다. 그의 포효, 그의 질주는 어디 갔는가. 그렇다. 사자는 지금 예측할 수 없는 삶의 현장, 그것이 주는 긴장과 역동성을 박탈당한 채 갇혀있는 것이다. 산 채로 박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노루, 사슴 같은 작은 동물들은 어떠한가. 여럿이, 혼자, 유유자적 풀을 뜯는 그들은 쾌적해 보인다. 사자처럼 탈기한 채 누워버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 역시 암담하다. 야생의 숲에서도 그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더 큰 짐승들의 먹이가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숨차게 달아나 사자를 따돌리고 살아남기도 한다. 스릴과 환희. 이곳에서는 그들에게 이 숨통이, 이 여지가 없다, 원천봉쇄되는 것이다.
한참동안 널부러져 있던 사자들은, 아참, 카메라가 기다리지, 하는 듯 앞발로 옆에 누운 사자의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고, 붉은 혀로 핥아주기도 하더니, 다시 꿈쩍도 않는다.
"저거 사자 맞아? 저 게으른 것이 잠만 자는 거야." 수군거리는 불평소리를 들은 듯 큰 숫사자가 일어나더니 움직이기 시작한다. 덤불에서 나와 넓은 광장으로 걸어나간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야 사자다운 모습을 보는구나. 사자가 걸어나가는 광장 맞은편에는 트럭들이 줄지어 서있고 사람들은 일제히 카메라를 높이 쳐들고 기다리고 있다. 걸어나가는 사자의 다리와 몸은 흐늘거리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늠름하고 당당하다.
그는 마치 촬영장을 밝히는 휘황한 조명을 향해 배우가 걸어나가듯, 그야말로 중인환시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그러더니 한가운데쯤에서 멈춘다. 그는 저 하늘을 향해 포효하려는가. 이 사슬들을 끊고 뛰어넘어 초원을 향해 질주하려는가. 관객들은 숨을 죽인다. 나는 침을 삼킨다. 그는 잠시 엉거주춤하더니 한쪽 뒷다리를 엉성하게 구부리는 것 같더니 주르륵 오줌을 눈다.
사자는 거기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만천하를 향해 주먹밥을 먹인 거다. 오만하고 야비한 인간에 대한 냉소 또는 문명에 대한 조소. 추락하고 있는 것은 사자만이 아닌 것이다. 일찍이 신이 죽어버린 것은 다행이다. 인간이 지금처럼 비루해지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는 우리 속의 모순, 그 비극적인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끌어내리고 오염시킨 뒤, 두렵고 공허해져서 새 우상을 만들어낸다. 그 발밑에 엎드린다. 우리는 군림하면서도 경배해야 하는 역설적인 존재인 것이다. 문명의 이름으로 파괴한 자연을, 신성을 우리는 문명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든 물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이날 아침 목격한 사자의 무기력한 상태는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의 현주소인지 모른다. 예측불허의 현장 대신 거처와 먹이를 보장받은 사자가 감수해야 하는 것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숙소로 돌아오며 나는 심한 메스꺼움을 느낀다. 언젠가 구토에 대해 언급했던 그 철학자는 삶이 포르노로 변질되고 있는 이런 현상을 예견했던 것인가. 새벽공기 속을 달려가던 그 장쾌한 해방감은, 못볼 것을 보고 망가져버렸다.
킬리만자로의 산정에 표범 한마리가 있다. 그가 왜,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 것 같다. 영원한 표범으로 살기 위해 그는 만년설이 덮인 산위로 올라갔다. 신성한 것들의 불멸을 위해, 그는 지금도 그곳에 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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