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이자 경상대 교수(경제학과)인 장상환씨의 글이고 또다른 하나는 재미 언론인 김민웅씨의 글이다. <시각1>은 '디지탈말' 16일자에 실린 것이고 <시각2>는 '노동사회' 4월호에 실린 것으로 양측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노무현 돌풍이 거세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예비 후보는 국민경선 과정에서 울산, 광주, 강원, 경남, 전북, 대구, 인천, 경북에서 1위를 차지하여 대세를 굳혀가고 있다. 또한 본선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이회창을 앞서고 있다. 이인제는 당황하여 음모론을 제기하고 노무현에 대해 좌경급진이라고 색깔론으로 공격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도 노풍에 대해 위기감을 느껴 이회창은 총재직을 내놓고 집단지도체제에 합의했고, 극우적 성향의 구시대 정치인 최병렬까지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있다. 386세대의 다수는 노무현 예비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각 지방에서 수백명 지식인들의 지지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노무현 돌풍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
***노무현 돌풍이 일어난 배경**
노무현 돌풍은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는 다수 국민들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이인제 후보가 색깔론으로 공격했는데도 대구, 인천, 경북 경선에서도 별로 먹혀들지 않은 것은 그만큼 보수혁신의 정치구도, 좌우파 대립구도를 앞당기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무현 돌풍이 일어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민주당의 국민경선제 도입의 효과가 컸다. 민주당 예비 후보들이 한나라당 이회창에 계속 뒤진 데다가 각종 게이트로 궁지에 몰리자 승부수로 띄운 것이 비당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국민경선제였다. 민주당이 노렸던 대로 주말마다 경선을 하니까 국민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둘째, 우리 사회 모순의 심화에 대비하여 크게 낙후한 기성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에 대한 노무현의 호소력이 작용했다. 민주당 바깥으로 노무현에 대한 무당파 층의 지지가 눈에 띤다. 그동안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던 두드러진 현상은 지지정당과 지지후보가 없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거의 50%에 달했다는 것이다.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터인데 노무현의 상대적 신선미가 이들을 자극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 돌풍 이후 정치여론조사 무응답이 30-50%에서 10-20%로 급감하였다. 여기에는 '노사모' 등 노무현 후보에 대한 조직적인 지지 활동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노사모'는 '비당원 일반국민들'의 참여가 가능한 국민경선제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노무현 지지, 거품 현상의 성격 강해**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대체로 그동안 지지 정당이 없었던 젊은 사람들의 지지인데 이것은 거품의 성격이 강하다. 노무현은 지금 이미 나타나고 있듯이 수구 언론을 비롯한 우리 사회 보수세력으로부터 사상과 노선 검증을 집중적으로 받게 될 터인데 이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보수의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크고 이에 따라 거품이 꺼질 것이다.
셋째, 기성정치 내에서는 지역주의 정치와 대결하는 노무현의 독특한 행보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민주당에서는 한나라당 텃밭 부산에서 민주당의 깃발을 들고 국회의원 낙선을 감수한 노무현이 영남 출신의 호남당 대선 후보로서 한나라당 이회창과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영남권에서도 노무현의 지지율이 22-23%에서 45-48%로 약 20%나 상승하였다.
반면 노무현에 대한 경쟁세력의 무력화와 대세론의 침몰이 노무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동안 민주당 내에서 이인제를 지원해왔던 동교동 구파는 더 이상 자신의 조직력을 동원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인제는 중도개혁의 노선을 주장하고 있지만 박정희식 개발독재 이미지를 차용하는 등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노무현의 득세에는 한나라당 이회창의 지지도 후퇴도 작용했다. 이회창 측근의 당 운영 전횡으로 빗어진 한나라당의 내분과 박근혜의 탈당은 이회창 대세론을 침몰시켰다. 이회창의 초호화 빌라 구입과 며느리의 미국 원정 출산 등의 행태도 서민들에게 반감을 사서 지지율 역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넷째, 자본주의적 모순이 격화되어 진보정치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는데도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치세력의 대안적 실천이 미약했던 것이 노무현 돌풍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물론 '한 술밥에 배부르랴' 하는 속담도 있지만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지 2년밖에 되지 않는 등 아직 취약한 탓에 서민들 사이에서 아직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노당은 익숙하지 않은 정당"**
그런데 여기에는 한국 정치의 보수적 정치질서가 놓여 있다. 기성 보수정치질서는 수십 년 간 지속되어 온 결과 이제는 보수적 질서가 역사화, 구조화될 정도로 얼어붙어 쉽게 녹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대중들은 여기에 익숙해져 있다. 민주노동당이 노무현과 유사한 효과와 영향력을 아직까지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기성 보수 정당 내의 개혁' 노선이 아니라, '기성 보수정치 전반을 혁신'하고자 하는 노선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성 보수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이 높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민주노동당은 (설령 노동자·민중이라 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정치 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인 셈인 것이다. 이러한 고착화된 보수정치질서 속에서 노무현이라는 기성 보수정당 내의 상대적 개혁인사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유력한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 국민들의 익숙한 정치적 관성과 관념,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한 당적 실천과 교육, 선전과 조직화 등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노무현은 개혁적 실천을 할 수 있는가**
노무현의 그동안의 행적과 현재의 언행을 볼 경우 기성 보수정당 내의 정치인 가운데는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것은 사실이다. 특히 노무현의 '언론과의 전쟁 선포' 발언 등으로 인해 일부 보수언론들은 노무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한 개인의 정치적 실천에 대해서는 냉정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노무현 돌풍에 대해서는 노무현 개인보다는 조직과 세력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노무현이 해온 말의 개혁성 여부가 아니라, 그가 속한 정당과 세력이 그가 말하는 개혁을 과연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노무현의 조직적 기반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온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이다. 그가 개혁 세력 중심으로 정계개편을 하더라도 민주당이 주축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민주당의 신 자유주의적 정책노선은 변하기 어렵다. 현재도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크게 넘어서지 않고 있는 노무현은 민주당의 공식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에 재벌, 고위관료, 보수언론 등 지배층으로부터 비토를 당하지 않기 위해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일 것이며, 결국 신자유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지금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의 금융, 기업, 노동, 공공의 4대 구조조정정책에 대해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더욱 철저하게 추진하겠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의 부채와 자산을 모두 인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대중 정부 구조조정정책은 자본을 회생시키기 위한 개혁으로서, 민중들의 고통을 강요하는 신 자유주의적 정책이다.
노무현은 전에는 공기업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뉴앙스로 말했지만 최근에 와서는 공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신중한 방식으로 추진해야 한다'면서 발전노조 파업의 중재자로 나서기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애초의 말을 실천할 세력과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대미정책 답습**
노무현의 한계는 대미정책과 관련해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난 4월 4일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가 "한국의 대선에서 한국에서의 전통적인 미국의 역할에 의의를 제기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redefine) 지도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발언한 것에 대응하여, 노무현은 에스비에스와의 12일 인터뷰에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필요, 외교 자주권의 점진적 강화'라는 김대중 정부 대북, 대미정책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미국을 안심시켰다.
5년전 1997년 대선 때 김대중은 서민들에게 복지 확대 등 많은 것을 공약했다. 농민단체들은 큰 기대를 하고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지난 집권 4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의 약속은 말 그대로 공약(空約)으로 끝나버렸다. 분노한 농민들은 집권 직후인 1998년부터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시위를 통해 농가부채 해결과 농산물 가격보장을 요구했고, 급기야 2000년 겨울에는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극한 투쟁을 전개했다. 발전노조 파업이 한 달 이상 지속되고 80% 이상의 국민들도 졸속적 민영화를 유보해야 한다는 의견들인데 김대통령은 요지부동으로 민영화를 고집했다. 이것은 김대통령이 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해서 국내외 자본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보수정당인 민주당 소속의 노무현도 여기에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은 김대중을 한번도 제대로 비판한 적이 없다. 노무현은 보수정객인 김대중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다. 87년 대선 때 전두환의 그동안의 악역에 대비하여, 민자당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는 등 신선한 역할을 한 것은 하나회 정치군부 세력이 대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눈을 속이는 술책에 불과했다. 민주당 노무현과 김대중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진보 민중세력의 대응방향**
그동안의 행적으로 볼 때 노무현이 이인제나 한나라당의 이회창에 비해 대통령 후보로서 자본의 지배라는 틀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적인 경향이 실제로 집행되느냐 여부는 노무현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민중의 정치적 힘이 얼마나 큰가에 달려 있다. 장래에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장 노무현을 상대적 개혁의 방향으로 실천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도 진보, 민중세력의 정치적 힘이 커져야 한다. 노동자 민중들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강화가 노무현 돌풍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다.
노무현 돌풍에 대한 진보 민중세력의 대응방향으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을 검토해보자.
첫째, 진보 민중세력이 일방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하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별로 없지만, 이 주장은 노무현의 개혁성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판단 착오를 범하고 있으며, 너무나도 비주체적이고 진보정당의 성장을 방해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노무현의 개혁성은 자본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속에서의 상대적 개혁으로, 진보민중세력이 추구하는 민중적 개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다만 이러한 구걸식 논리는 과거의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 따른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과거보다는 크게 축소되었다.
둘째, 6월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진보정당을 육성하는데 주력하고 연말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노무현을 밀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진보정당의 현실적 성장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첫째 주장보다는 진전된 것이다. 그러나 미리 이러한 노선을 정해두면 노무현 진영에서는 나서서 진보민중진영과 연합을 시도할 부담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연합이 어려워지고 노무현의 개혁성을 강화하기도 어려워진다. 그야말로 '떡줄 사람의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김치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셋째, 민주노동당의 독자적인 대통령 후보를 내서 민중세력, 진보세력의 힘을 최대한 결집하고, 대선과정에서 세 부족을 느낀 민주당의 노무현이 민주노동당과의 연합을 제의해오면 그때 가서 정책연합을 검토해볼 수 있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위의 두 의견보다는 주체적이라 할 수 있다. 1997년에 김대중이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DJP 연합을 필요로 했듯이 노무현도 진보민중세력과의 정치적 연합을 필요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노무현이 민주노동당에 정책연합을 요구해올 것인가 여부는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국민들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소홀히 생각하는 문제가 있다. 민주당 노무현과의 정책연합의 문제는 전적으로 민주당 노무현 측의 진보민중세력의 역량에 대한 판단에 달린 것이다.
넷째, 한 단계 더 나아가 노무현과의 정책연합과 연정에 대한 검토 없는 독자적인 대통령 후보 출마와 독자적인 선거 실천의 방향이 있을 수 있다. 현재의 정치적 역학관계로 볼 때 민주노동당이 민주당 노무현 진영의 정책연합 내지 연정의 대상으로 심각하게 고려될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으로서는 현실성이 낮은 정책연합이나 연정의 가능성을 두고 비생산적인 논란을 벌일 필요 없이 민중진영의 정치역량을 키우는 것이 현실적이다.
결론적으로 진보, 민중진영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조건을 토대로 했을 때 네번째 실천방향, 즉 독자적 선거 실천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과제**
민주노동당은 심화된 자본주의적 모순과 대결하고 민중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진보적 구조개혁]의 대안을 실천하여 노동자, 농민 등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높이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 돌풍에 대처하는 올바른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노동자 민중들 자신의 정치적 힘을 키워야 다른 세력과의 의미있는 연대도 가능하고 역사를 진전시킬 수 있다. 눈덩이를 굴릴 때 처음의 뭉치가 너무 작으면 부서져 버린다. 어느 정도의 규모를 만들어서 굴려야 눈이 달라붙어 눈사람을 만들 정도로 커질 수 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노무현 돌풍의 한계를 직시하고 진보민중진영으로 더욱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모으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 때 노무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회창과 노무현 누가 되어도 마찬가지'라는 식의 대응이 아니라 노무현의 '제한적인 상대적 개혁성'을 인정한 위에서 '노무현과의 질적 차별화'를 당의 기본 정치실천 기조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보적 구조개혁은 부유세, 주식양도차익과세 도입 등 조세제도 개혁으로 부유층으로부터 증세(增稅)하여 정부 재정을 확충하고, 이 재원으로 교육·의료·주택· 사회 복지 등 사회적 공공 서비스 제공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폐한 공교육을 개선하고 사적 부문이 지배하는 의료체제의 공공성을 높임으로써 고비용과 낮은 질의 서비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진보적 구조개혁은 재벌체제 해소와 '노동자 경영참가법' 제정, '상가임대차보호법'과 '주택임대차 보호법'의 개정 등으로 자산소유자집단의 과도하게 강한 힘을 약화시키고 이용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진보적 구조개혁의 실천을 위해 많은 민중들의 힘과 지지를 모으는 방법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책과제 선정과 정책내용 결정, 실천방법 결정에 당원들과 민중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혁신적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정책경선제'를 도입하는 방법이 있다. 인터넷을 활용하여 당원, 각 부문 사회단체 구성원,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 투표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구체화된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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