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매년 10월1일 국경절에 천안문 광장에 쑨쭝샨의 초상화를 놓이는가? 올해 52주년 국경절에도 천안문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쑨쭝샨의 대형 초상화가 설치됐다. 이 초상화는 천안문 광장 정중앙에 있는 마오쩌뚱의 대형 초상화와 마주 보았다.
이에 대해 저명한 역사학자인 쑤슈앙삐(蘇雙碧)는 “이는 일종의 기념이자 존경이다. 쑨쭝샨은 구민주주의 혁명의 가장 걸출한 인물이고, 마오쩌뚱은 신민주주의 혁명의 가장 걸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민주혁명 과정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라고 풀이했다.
마오쩌뚱은 자신의 글 '쑨쭝샨 선생을 기리며'에서 쑨쭝샨을 위대한 혁명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또한 반동분자를 제외하고 현대 중국인들은 모두 쑨쭝샨 사업의 계승자라고 지적했다.
신해혁명은 황제를 타도한 것이다. 중국의 황제 제도는 진시황이 황제가 된 기원전 2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2년 쑨쭝샨이 개원(改元)하기까지 2천백여년 동안 계속됐다. 황제 제도는 후대로 갈수록, 특히 청나라 시대에 세계적 조류와 맞지 않는 것이 되었다.
당시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정치가 발생했고, 자본주의 경제는 많은 발전을 이뤘다. 쑨쭝샨은 세계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연구한 뒤 황제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 하면 황제 제도는 전제와 부패, 낙후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해혁명은 황제 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었다.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1912년 새해 쑨쭝샨은 상하이에서 태평천국의 난의 천왕부(天王府)인 난징으로 가서 초대 임시 대총통이 된다. 이때부터 서기(西紀)가 쓰여 1912년은 중화민국의 원년이 된다. 쑨쭝샨은 대총통 선서에서 “만주전제정부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공고히 하며, 민생행복을 도모하고, 국민의 뜻을 존중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밝힌다.
중화민국의 성립은 중국 봉건전제사회의 종언과 황제 제도의 타도를 뜻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이후 평탄치 않은 역사적 행보를 보이지만, 신기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
중국 봉건세력이 너무 강했고, 혁명대오 내부의 대부분이 자본주의 경제발전과 민주,자유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세력 봉건전제의 본질과 혁명파 공화사상의 본질간에 명확한 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권력은 매우 빠르게 구세력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위엔스카이(袁世凱)는 임시 대총통의 직위를 탈취한 이후 봉건황제와 같은 태도로 중국을 지배한다. 위엔스카이가 황제가 되려 한 데에는 이것이 가능했던 사회적 기초가 있었다. 황제 제도를 부활시키려 한 세력과 혁명당의 각성의 부족, 국민들의 무지가 이러한 반동을 불러왔고, 쑨쭝샨은 이를 매우 애통해 했다. 그는 민중을 환기시키고, 혁명의 기치를 다시 높이 들어 공화국의 적을 상대로 결연한 투쟁에 나선다.
1925년 쑨쭝샨은 서거하면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더욱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신해혁명은 발발 이후 부침을 거듭했지만 결국 황제 제도가 폐지되도록 만들었다. 위엔스카이의 반동은 단명했다. 쑨쭝샨의 황제 제도 타도는 중국의 역사적 조류에 맞는 것이었고, 세계 역사의 조류에 부합한 것이었으며, 근대 중국 역사의 쾌거였다.
마오쩌뚱은 쑨쭝샨이 세계적 조류와 인민의 요구에 부응했고, 러시아와의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을 제기했으며, 농공(農工) 3대혁명정책을 지지하는 한편, 3대정책의 신삼민주의를 수립했다고 지적했다. 쑨쭝샨의 일생은 위대했다. 역사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사상을 변혁하고, 끊임없이 전진한 일생이었다. 쑨쭝샨의 사상과 혁명의 발자취는 영원히 중국 인민 가운데 금자탑으로 남을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