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희망버스만 조직하면 사태가 해결될까? 희망버스에 오르기만 하면 김진숙 혼자 맞서왔던 전선의 긴장이 완화되고 모든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희망버스에 더해 다양한 방식의 투쟁과 다양한 실천적 의제들을 쏟아내야만 비로소 희망의 여명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연필과 붓, 물감과 광목, 부지런한 손놀림과 발걸음이 동원돼야, 그래야만 새 희망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김진숙과 희망버스의 의미를 환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물론 진행형인 크레인 투쟁과 동조단식, 계속 조직되는 희망버스의 의미를 섣불리 예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늘 혼자 다니지만 2차 때는 대학 후배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결국 경찰의 차벽에 막혀 김진숙의 아우라는커녕 육성조차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밤을 지새우던 때 툭 던지듯 내뱉은 후배의 한마디가 달이 바뀐 지금까지도 뇌리 속을 맴돌고 있다.
"김진숙 한 사람을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건 분명 감동적인 일이지만, 이것만으론 얻어낼 게 없을 거예요. 이슈와 판을 더 키워야지 않겠어요?"
즉답을 피했다. 솔직히 후배의 사고가 너무 편협하고 얕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반응한 나 자신이야말로 협량이요, 무대책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수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후배의 문제제기는 핵심을 찌르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난 며칠 후배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에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정체된 정신으로 부산의 골목골목을 유령처럼 떠돌던 3차 희망버스의 기억을 되뇌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김진숙의 의미를 나름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다. 첫째, 이 땅의 척박한 노동현실과 재벌의 실체를 극명하게 드러내준 일대 사건이다. 제2의 '전태일 충격'이며, 재벌의 악행을 만천하에 고발한 사건이다.
둘째, 분열과 지리멸렬의 정치판과 그 속에 안주 혹은 기생하는 정치인들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해준 사건이기도 하다. 진보든, 보수든, 혹은 기회주의든, 이제 김진숙 앞에선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수 없다. 외려 숨기려 하는 것 자체가 고스란히 정체성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숨을 데가 없다.
셋째, 노엄 촘스키가 설파한 대로 언론과 자본, 지식인의 '동의의 조작'에 맞서 기층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강고한 연대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일깨운 사건이다. 희망버스라는 이름의 연대는 세계사적으로 일찍이 없었던 비정치적이고 비이데올로기적이며 비조직적인 그야말로 자발적인 시민연대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연대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노동·인권·통일·환경·반값등록금 문제도 어둡고 칙칙한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공론의 장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이명박 정권은 동반성장이라는 그럴 듯한 의제를 들고 나와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동반성장은 얼핏 설득력 있는 의제로 보이지만 실은 핵심을 벗어난 기만적인 논의에 불과했다. 정작 긴급하고 중요한 의제가 따로 있어서다. 요는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공정거래와 동반성장이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의 동반성장, 사측과 노동계의 공정거래, 사람과 사람의 동반생존의 원칙과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우선돼야 하는 거다.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재능교사, 대학 내 청소용역 아주머니들, 유성기업, 한진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노동자 투쟁의 양상은 이전 정부에서의 투쟁양태와 질적으로 다르게 전개되었다. 임금협상이나 생활투쟁을 넘어 목숨을 내놓는 투쟁이어야 했으며, 죽음을 담보로 한 절체절명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얻어낼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절망의 투쟁이기도 했다.
과정 중에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삶을 내려놓았다. 정치권은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야당들은 실은 무관심하면서도 항용 수적 열세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뿐이었다. 노동계조차 의제에 대한 제각각의 해석과 대응, 사안의 중대성과 어떤 전선을 형성할지에 대한 의견차이만 보였을 뿐 싸움다운 싸움, 투쟁다운 투쟁은 고사하고 지리멸렬과 분열상만을 답습했다.
답답했을 것이다. 쌍용 대투쟁 이후 15명의 아까운 생명이 삶의 긴장을 놓아버렸어도, 유성기업 노조원들이 백색테러를 당하는 걸 두 눈으로 보면서도, 길거리에 나앉은 재능교사들의 절규가 끝없는 메아리를 만들어 내도 무심한 정치권과 무능한 노동계는 이렇다 할 해답은커녕 투쟁의 정당성과 당위에 대한 입장정리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진숙이 크레인 위로 올라 있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한진중공업 부당해고에 맞서기 위해 올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김진숙의 진정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몇 사람을 위해 올랐다. 100일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문제로 치부됐다. 100일이 지나자 의미가 달라졌다. 어느덧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50일을 기점으로 희망의 버스가 첫 시동을 걸 무렵 정치적 이슈로 부각됐다. 200일이 지날 무렵 김진숙은 다시 사람의 문제로 환원됐다.
김진숙이 경제를 넘어 사람의 문제가 되었다는 진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느덧 김진숙은 한 개인이 아니라 이 땅의 약자들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부당해고를 넘고, 한진중공업을 넘고, 노동을 넘고, 인권을 넘어, 마침내 우리네 삶을 통째로 휘감아 도는 태풍의 눈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김진숙은 지금`여기의 최전선이다.
태풍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를 알아챈 건 뜻밖에도 평범한 시민들 - 시인, 시민운동가, 날라리, 학생, 배우, 언론노동자 - 이었다. 정치권도, 노동계도 피해를 염려하며 숨을 곳을 찾고 있을 무렵 일군의 시민들이 소박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진숙은 사람이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 김진숙을 살아 내려오게 해달라."
"해고는 살인이다. 부당해고 철회하라."
혹자는 이것을 단지 경제의 문제로 보려 한다. 실현 가능한 주장을 펴야 해법도 도출할 수 있다는 하나마나한 주장을 편다. 한진중공업의 수주가 늘면 고용도 늘 것이고, 수주가 줄면 남은 노동자도 잘리는 게 경제논리이며 순리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런가. MB정권은 김진숙과 희망버스가 실현가능성이 없는 주장을 펴서 안 들어주는 게 아니라 애초 그 어떤 요구도 들어줄 의사가 없다는 잘 알면서도 딴 소리를 한다. 제 아무리 수주가 확대돼도 회사는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 헛소리를 한다. 수주가 늘면 회사는 노동자들을 살인적인 야근과 철야에 내몬다.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잘라버린다. 반대로 일감이 줄어도 마찬가지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일단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그게 바로 재벌들의 행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경제학자가 한가한 소릴 한다.
다시 김진숙은 이 땅의 최전선이다. 피아를 가릴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김진숙의 아군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김진숙이 말하는 건 노동이나 경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숙도, 우리도 사람이다. 우린 모두 살아야 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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