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음악 페스티벌에 가는 이유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대중이 음악을 만나는 길

어떤 영화에서 보았다. 실연당한 여인에게 옆자리의 남자가 "당신을 찬 놈에게 복수하고 싶으면 뉴욕에 가서 모델로 성공하라"는 농담을 건네며 위로한다. 대개는 뉴욕에서 웨이트리스로 성공(?)하는 정도일 테지만 꽤 근사한 위로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도 어릴 적에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록 스타를 꿈꾼다. 물론 잘해야 직접 해외 페스티벌을 찾는 정도가 된다. 그런데 2000년대부터는 굳이 외국에 가지 않아도 된다. 펫 숍 보이스(Pet Shop Boys),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 뮤즈(Muse)는 올 여름에 한국에서 열린 페스티벌에 초대된 손님들 중 일부일 뿐이다.

다국적 음악인들이 대형무대에서 여러 날 동안 공연하는 페스티벌의 시작은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이다. 1999년, 의욕적으로 개최를 준비하고 딥 퍼플(Deep Purple)과 같은 거장까지 초대하여 많은 음악애호가들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태풍이 데리고 온 폭우로 사실상 망해버렸다. 하지만 이후 차례로 자리 잡은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 올해에도 연달아 열리는 중이다. 여름이 지나면 그랜드민트 페스티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가을축제 시즌이 기다리고 있다.

페스티벌 문화의 정착에서 갈증을 보다

브라운관 예능스타와의 기념촬영이나 안락한 쉼터 같은 건 제공되지 않는 페스티벌에서 평생 기억에 남을 경험과 순간이 만들어진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최고의 출연진과 최고의 환경에 걸맞게 티켓값도 최고인 페스티벌도 있다. 그러나 그 가격에는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옷을 흙투성이로 만들기, 엉뚱한 환호성을 질러 사람들을 웃기기, 무아지경에 빠져 무당춤 추는 아가씨를 구경하며 키득거리기, 사실상의 난민캠프 체험하기, 대낮에 인파 속에서 술에 취해 땅바닥에서 끌어안고 잠든 커플 구경하기를 위한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유명한 뮤지션이 실수하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을 볼 수 있는 특권까지 추가로 부여된다.

비싼 돈 내고 고생하는 이들이 이해되지 않으면 잠자리 날개를 물고 가던 일개미가 남긴 "남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명언을 떠올려보자. 휴식을 원하건 광란을 원하건 아니면 모두를 원하건 자유다. 언제 결혼 하느냐는 잔소리도 없고, 안 해도 될 일까지 만들어내는 팀장님도 없고, 원숭이 떼처럼 몰려다니는 단체관광객도 없다. 모든 출연진을 보겠다고 애쓰지만 않으면 그늘에서 낮잠이나 실컷 자도 방해받을 일은 없다. 인근 숲의 고요한 밤을 지켰던 호랑지빠귀와 소쩍새는 불만을 터뜨리며 민원을 넣고 싶겠지만. (사실 잔디가 깔린 쾌적한 분위기의 리조트, 즉 스키장과 골프장은 참사 수준의 생태파괴 현장이다.)

▲집단공연은 관객에게, 그리고 음악 자체에도 영향을 준다. ⓒ엠넷미디어 제공

페스티벌에 가서 시끄럽게 떠드는 주변 관객에게 인상을 쓰며 진지하게 연주에 몰입하느니 자기 집에서 헤드폰을 쓰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런 감상 태도는 태아의 IQ와 EQ를 향상시켜주는 노래모음집과 함께 멀리 내다버려야 한다. 집단공연은 음악 자체에도 영향을 준다. 관중의 반응은 무대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기대에 따라 달라진다. 훌륭한 팀이 등장해도 어떤 관객들은 쉬면서 힘을 비축한다. 음악인들 중엔 곡을 만들 때부터 이런 공연에 어울리는 편곡과 편성을 의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음악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음악을 만드는 방식 양편에 모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문화선진국에선 오래 전부터 자연스러웠던 일이다.

도대체 왜 멀쩡한 사람들이 이런 곳에 모일까? 뒤집어서, 어떻게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만들까? 관객들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신발과 함께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비결과 같은 유용한 기술, 그리고 방충망 틈으로 들어오려는 벌레를 무찌를 수 있는 용기 외에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좋아하는 음악인과 눈빛을 교환했다는 둥 살이 맞닿았다는 둥의 자랑거리도 챙겨간다. 그런 곳에 가보고서야 록 음악도 합창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는 사람도 있고, 음악을 즐기는 방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싫어 그 정도의 돈이면 사발면과 맥주, 그리고 많은 음반을 사들고 집에 가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고생하는 스태프들과 청소원들의 수고를 덜어주긴 하겠지만 거대한 무대와 화려한 조명과 땀으로 만신창이가 된 관중을 보는 즐거움을 놓치게 된다.

좋은 페스티벌은 음악인이나 관객 입장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게 한다. 현시점에서 페스티벌은 관객개발에 성공한 편이고 개별 음악인의 팬을 발굴하는 역할도 한다. 일정한 관객층이 형성되어 있기에 아동영화, 여성영화, 동성애영화, 음악영화가 꾸준히 제작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다른 면도 있다. 페스티벌과 함께 팝스타들의 내한공연이 자주 열리는 이유를 개런티 수준이 높아지고 관객들의 분위기도 만족스러워서라고 한다. 공연기획사가 성장하고 대기업의 투자도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음악시장의 확장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사실 음원사업은 이동통신사들이 선점하고 음반사업은 수익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공연으로 집중되는 쏠림현상이라는 일종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페스티벌에 제한할 때, 차별화된 관점 없이 유사한 출연진이 반복되면 동반침체의 가능성이 없지 않고, 행사장 내의 상업성도 불편하다. 페스티벌이 확장과 생산 기능까지 보여주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간혹 분위기에 편승하여 무책임하게 행사를 기획했다가 취소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특히 일부 지자체의 음악축제들은 다음을 알아야 한다. 주최자의 야심과 실행자의 강박이 겹치면 실적에 연연하게 되고, 타협과 절충을 선택한다. 그 결과는 정체 불분명한 이상한 행사다. 실패한 행사들의 공통점이다. 반면 전문성을 통하여 신뢰를 쌓아간 예들이 있다. 일반인들에겐 출연진 대부분이 생소하다. 그럼에도 전문성과 안목으로 신뢰를 만들어내 일반인들이 모이고 갈수록 번창한다. 전국적으로, 장기적으로 성공한 사례들은 하나같이 이에 해당한다. 과연 이것이 음악축제에만 해당하는 공식일까?

많은 페스티벌을 보고, 어떤 페스티벌을 진행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음악은 여전히 새로운 감동과 경험을 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먼 거리와 수고로움을 마다않고 찾아오는 열정을 바친다. 그런데 '다양한 음악의 향유와 소개의 장이며 특별한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페스티벌의 성황은 갈증과 불만족의 반작용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다른 놀 거리가 적으며(오죽하면 월드컵 때마다 그러고 놀까?), 대중음악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미디어에 외면 받으니 충분한 통로와 만족스러운 장을 찾기 힘들다. 그래서 페스티벌 현장 안에는 열기가 가득한데 밖에는 냉기가 돈다.

▲페스티벌 현장 안의 열기는 바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페스티벌에 나오는 음악이 '그들만의 음악'이어서가 아니다. ⓒ엠넷미디어 제공

미디어의 다양화에도 갈증은 그대로

불법복제테이프를 파는 리어카가 흔했던 시절, 길거리는 당시 유행하는 곡과 조만간 유행할 곡을 기막히게 반영했다. 불법매체인 '길보드'가 대중의 기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예측했다. 지금, 대표적인 미디어인 방송은 그렇지 못하다. 연예인 등이 담소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FM방송들 중 다수에선 흘러간 팝송 아니면 일부 인기가요만을 들을 수 있다. 프로그램 별로 타깃 청취자가 중복되고, 음악 비중이 높은 프로그램은 심야시간대로 밀려나 있다. 공영방송(!)마저 청취율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는 관성과 전문DJ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나 싶을 정도인 현실은 학계에 보고해도 될 정도이다. 그러니 진짜 음악수용자에게 라디오의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진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TV 가요프로그램들 역시 예능을 포함한 전체 방송의 한 고리일 뿐이다. 대형기획사와 공생관계를 유지하다 공멸한 후 손쉬운 방법으로 순위프로그램을 부활시켰으나 대부분 아는 노래가 1위를 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듣보잡 1위곡'이 양산된다. '소녀시대'의 태연이 가수를 배려해 달라고 한 말이 화제가 되고 이하늘의 폭로가 회자되듯이 가수들까지 관행에 불만과 불신을 표한다. 순위를 떠나 <밥만 잘 먹더라>, <꺼져줄게 잘 살아>가 연달아 나올 땐 허탈하기까지 하다. 지어낸 제목들이 아니다. <바람피지마>까지 모아 특집방송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 제목 때문만이 아니다. 제목은 파격(?)이지만 노래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2000년대 가요의 특징인 직설화법과 '클릭시대'가 만나자 통속성이 아니라 즉물성이 되어버렸다. 이런 노래들이 정말 인기가요인가? 이런 것이 대중성일까?

프로듀서형, 혹은 라이브형 중견가수들은 TV에 출연하지 않고도 음악활동을 유지할 수 있지만, 신인과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에겐 그렇지 않다. 물론 음악생태계와 시장의 건전성에 기여하는 방송이 아예 없지는 않다. EBS '스페이스공감'은 다양성의 노출과 발굴·전달이라는 성격, 그리고 소극장 공연이란 형태로 음악동네에서 택할 수 있는 모범적인 모델이 되었다. '교육'이 입시준비를 넘어 의미를 확장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이런 프로그램은 장기적으로 순기능을 한다. KBS가 신설한 '음악창고'도 지속성만 있다면 지지할 만하고, 추억 곱씹기에서 재발견의 미덕을 가지게 된 '콘서트 7080'도 종종 감동을 준다.

그러면 지면 매체는? 소수의 재즈잡지와 로컬(지역)음악지를 제외하면 음악전문지는 사라졌다. 주·월간지에서 음악은 구색 갖추기와 산발적인 기획물로 제한된다. 기사형 광고를 문제시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생활정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기사형 광고(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더 이하의 것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를 배치하게 된 일간지에서 음악지면의 비중은 작다. 또한 순환근무 시스템으로 기자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영향력까지 작아지니 대형기획사는 신문을 외면하고 할리우드 스타인양 합동인터뷰로 때우려 한다. 인디음악인과 중소 기획사까지 신문을 포기하는 이유에는 모멸의 경험이 더해진다. 오래전이라 해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음반이 기자의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던 일들이 쉬이 잊혀질리 없다. 그나마 <한겨레> 등 몇몇 일간지가 건강한 관점과 특화된 기사를 제공하는 편이다.

새로 더해진 미디어인 포털은 상위 검색어 등제와 메인페이지의 기사노출에 파급력이 있으며, 이제 콘텐츠 유통 매개체에서 생산자가 되었다. 포털의 매체성은 각 경로들이 독립적이라기보다는 전체가 하나의 미디어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방송과 라디오 프로그램과 다르다. <네이버뮤직>은 자체적으로 음악메뉴를 제작하여 비중 있게 노출시키는데, 음악을 화젯거리로 생산한다는 점, 음악을 명사의 소양으로 확인시킨 점은 유익했다. 다만 다수 코너들의 공신력이 떨어지고,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한편에 질적인 면에 기여해온 음악웹진 블록이 있다. 소규모이고 영역이 분리되어 있으나 음악동네 내부와 애호가 집단, 인디음악의 음반판매량에 대한 기여는 미미하나마 유지하는 편이다.

아울러 시상식을 얘기할 수 있다. 영화와 영화제, 시상식의 순환구조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음악, 페스티벌, 시상식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방송사의 연말시상식의 몰락과 불공정성 때문에 시상식은 제 역할을 못했다. 지금도 기획사와 방송사의 힘겨루기는 여전하다. 그나마 공익 모델을 표방한 '한국대중음악상'이 있다. 외부에서 취향의 특권화라고 오해하지만 논의구조 안에 들어가 보면 공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절차의 합리성만큼은 획득해놓았다. 하지만 방송사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선지 의도적인 외면을 감수해야 하고, 운영의 안정성 문제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일본의 포스트록 밴드 토(Toe)의 공연. 이들의 공연에 대한 언급은 매스미디어에선 자취를 감췄다. ⓒ엠넷미디어 제공

대중이 음악을 만나는 또 다른 페스티벌

유기적인 관계인 '문화의 다양성과 산업의 안정성'에 대한 책무는 미디어에게도 있다. 그리고 매체의 집중도 완화와 다변화 추세에서 가치 있는 생존법은 특화다. 하지만 압도적인 시장논리와 실적강박은 특화다운 특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공익과 명분을 비현실적이라 한다. 동감하나 동의하기 힘들다. 시장성과 대중성을 등치시키고, 많이 팔리고 이미 아는 것이 대중음악의 미덕이라는 합리화가 더 문제이다. 물론 '정서유전자'를 남기고 퍼트리려는 개인들이 있다. 높은 열정과 교육수준에도 불구하고 저소득과 불안정한 미래 때문에 직접 음악인이나 레이블(음반사) 종사자가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음악을 아끼는 마음을 간직한 채 방송PD와 기자, 비평가가 된 이들이 많다. 또 공간의 유지와 경영의 어려움이 있는 음악클럽과 음악카페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운영하는 이들도 많다. 직장생활을 하는 팬들이 공연을 기획하고 동호회가 스스로 준비한 공연도 간혹 열린다.

공적 매체를 사적 매체가 보완하는 것이다. 특히 새롭게 생겨난 매체는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 허튼 소리를 보고 당신 일기장에나 쓰라는 대신 당신 블로그에 쓰라는 말이 생겼고, 종이에 쓴 글을 컴퓨터로 옮기는 일은 있어도 컴퓨터로 써서 친필로 옮기는 일은 드문 세상이다. 물론 블로그와 트위터 같은 개인공간들을 무엇을 듣고 보고 먹었는지 과시하는 데 사용하고, 자신의 취향과 격을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너도나도 '빠른 전달자 되기 경쟁'을 벌이는 문화가 생겼다. 하지만 마니아가 학자의 역할을 하게 된 지금, 훌륭한 블로거와 이용자는 일종의 지식기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

순수한 태도와 자발적인 마음과 자율적인 행동을 통하여 미학적인 계약을 체결시키는 중매쟁이 역할은 수혜자를 생산자로 만든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하면서 휙 넘겨버릴 글과 노래의 가치를 발견하고, 똑같은 것을 깊이 읽고 들으며 감동받는 힘이 대중예술을 살찌운다. 가수들이 오래된 히트곡의 멜로디를 바꾸어 부를 때 듣는 이가 마음속으로 원래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보이지 않는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에 드는 음악을 지지하는 일에 학위나 졸업장 따위는 필요치 않다. 학교 로비와 유명인사의 서재처럼 자기 방이 트로피로 채워져 있지 않아도 된다. 어느 음악인에 대한 최고의 비평은 평론가가 아니라 우연히 놀러왔던 유치원 선생님에 의해 쓰일지도 모른다.

해저지형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온 난파선이 있었다. 1985년, 누군가 그 배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영화 <타이타닉>의 유명한 장면과 주제가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배들이 많다. 자본주의는 대중음악을 낳고 키운 동시에 음악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분리시켰고, 시장권력과 국가권력의 결합은 예술과 사회를 떼어놓았다. 하지만 새로운 통로들도 만들어졌다. 많은 정보를 공유하게 된 수용자가 음악의 제작과정과 전달유형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음악에 반영되는 것도 또 다른 페스티벌이다. 생산은 창작뿐만 아니라 전달, 즉 유통과 매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니 단순한 소비자에서 발견자이자 매개자이며 '페스티벌에 참여하듯'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적인 수용자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인식만으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대중은 대상과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된다. 이것이 '대중·음악'의 참뜻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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