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기자 생활을 하다 뒤늦게 못마친 학업으로 돌아간 황 씨는 "마이클 클레어의 '에너지 파시즘'은 수년간 시베리아 송유관의 노선을 둘러싸고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격론을 벌였던 한반도에서도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며 "한국은 이 문제에 관련해서도 단순히 경제적 면만 주목하면서 지정학적 관심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현실을 소개했다.
더 나아가 황 씨는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지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며 학계의 나태함에 경종을 울렸다. 또 황 씨는 에너지 문제 등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생태적 전환'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일부 국내외 학자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학계 일반의 분위기도 고발했다. <편집자>
최근 <프레시안>은 러시아의 석유정책 행보를 '에너지 파시즘'의 시선에서 분석한 정치학자 마이클 클레어의 글을 소개했다. 관련 기사를 읽고서 본고에서 유럽, 중앙아시아에서의 송유관 갈등뿐만 아니라 한반도와도 직결된 동시베리아 송유관 사업의 지정학적 의의와 국내의 지정학적 논의를 주도해야 할 지리학계의 직무유기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시베리아 송유관과 한반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석유 수입국인 동아시아 국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과 일본은 중동의 오랜 정세불안에 따라 안정적인 수급을 위한 수입 다변화와 상대적으로 비싼 운송비의 경감을 위해 러시아 시베리아 유전에 진작부터 눈독을 들여 왔다.
지난해 결말이 난 '앙가르스크-다칭 송유관 vs. 앙가르스크-나훗카 송유관' 설치 논의만 하더라도 그 간 러시아, 미국, 중국, 일본, 한국 간에 복잡다단한 정치경제적 구도로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진 현장이었다. 결국, 송유관 갈등은 1단계로 앙가르스크-다칭 송유관을 건설한 후 2단계에서 나훗카까지 송유관을 건설하는 절충안으로 매듭지어졌다.
그간 러시아는 안보적 이유로 송유관이 중국 영토를 경유하는 것을 꺼려 왔다. 이런 러시아가 결국 앙가르스크-다칭 송유관을 우선 건설하기로 결정한 데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대응이라는 정치적 이유가 크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급증하는 석유 수요를 염두에 둔 경제적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훗카 송유관 건설이라는 2단계 포석을 둠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지정학적 권력 강화를 노리고 있다. 즉, 다칭 송유관이 중국 시장 하나만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나훗카 송유관은 중국, 일본, 한국, 나아가 미국 서부의 석유 수요까지 고려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훗카 송유관이 완성되면 러시아는 클레어 교수가 지적했듯이 "단순한 경제적 혜택을 보장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국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간 한국은 시베리아 송유관 노선 결정에 있어서 중국을 거쳐야 하는 다칭 송유관보다 직거래가 가능한 나훗카 송유관을 선호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혔었다. 이와 더불어 에너지 수급의 다양화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으로 러시아 이르쿠츠크 가스전 공동 개발에 합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한국의 대응에는 자원을 둘러싼 지정학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인 오늘날 강대국의 지정학을 답습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국제 정치의 현실 인식과 비전 제시를 위한 학문적 고민이 있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제국의 지정학이 아니라 중심국-주변국의 민중이 상생할 수 있는 지정학을 고민해야 할 한반도로서는 이런 고민 부재는 심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국내 지리학계의 한심한 지정학 연구 실태
마이클 클레어 교수의 글을 소개하는 취지를 편집자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임을 자랑하지만 에너지 소비는 세계 6, 7위일 정도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으며 필요 에너지 자원의 97%를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그러면서도 장기적인 에너지 확보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한 집 한 등 끄기 운동'이나 '주 5일제 차량 운행'이 에너지대책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에너지 불감증에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그런데 국내에서 자원에 대한 지정학적 논의가 적은 것과 관련해서는, 정부 정책이 단기적인 캠페인에 기대고 있는 측면도 문제이나 보다 큰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할 학계의 직무유기 또한 지적되어야 한다.
지구적으로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에서는 관련 연구가 절실하건만, 지정학의 모 학문인 지리학계에서는 희귀종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시베리아 송유관에 대한 논의의 바탕은 <한국지역지리학회지>(2004년 제10권 제1호)에 실린 '시베리아 송유관 건설의 정치경제학적 고찰'(경북대 이채문 교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아는 한 본격적으로 지정학적 논의를 담은 논문은 이 논문이 거의 유일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지리학회지에 실린 본 논문의 저자는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가 슬라브학회에서 발표했던 논문을 다시 기고한 것이었다.
현재 지리학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분야는 혁신 클러스터, 산업지구 등의 내생적 지역 개발론에 치중해 있다. 혁신 클러스터가 진보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논의하는 대안 경제 모델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분야에 대한 인기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론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대안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나마 현재진행형의 지정학 연구는 국제정치학계에 빼앗기다시피 했고 지정학의 본류인 지리학계는 지정학의 고전인 맥킨더의 심장이론만을 동어반복하는 훈고학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과 실천, 양 측면에서 씁쓸한 현실임은 분명하다.
설령 지리학계에서 지정학적 논의가 활성화 되더라도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본디 지정학이 탄생한 제국의 지정학이 아닌 주변부 국가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평화의 지정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이다. 그저 석유를 소실점으로 한 다칭, 나훗카 송유관 중에 한국에 유리한 송유관를 설치해야 한다는 정치경제적 합목적성을 확보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클레어 교수가 지적한 에너지 파시즘 대열에 한국이 암묵적으로 동참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이미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임을 자랑하지만 에너지 소비는 세계 6,7위일 정도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으며 필요 에너지 자원의 97%를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으로서는 에너지 파시즘의 주변부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는 게 적확한 인식일 것이다. 클레어는 나이지리아의 한 석유생산지에서 일어난 부족들의 폭동을 언급하면서 "이 지역에서 가져간 원유로 회사들은 큰돈을 벌겠지만 영토 한 중간이 훼손당한 원주민들은 가난한 채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고 말한다.
지난해 초, 노무현 대통령의 아프리카 방문에 맞춰서 한 외교통상부 관료는 <한겨레>에 '세계적 양극화 해소에도 눈을 돌리자'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보수, 진보언론을 가릴 것 없이 노 대통령의 아프리카 방문의 목적을 자원외교라고 기술했다. 한국은 정녕 이러한 아프리카 민중이 증오하는 석유에 혈안인 강대국의 대열에서 자유롭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생태학적 시선이 여전히 유토피아 망상인가
<녹색평론>이나 <환경과생명>과 같은 생태잡지를 읽으면 "우리나라는 아직"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꽤(?) 목격한다. 생태학적 시선이 여전히 유토피아 망상으로 치부되는 것은 사회과학에 대한 철학적 빈곤을 드러내는 것이다. 석유논쟁의 본질은 공급 일정표가 한정된 게임이라는 점이다. 송유관의 방향이 '다칭이냐, 나훗카냐'의 첨예한 논쟁도 결국 제한적인 시공간에 갇혀 있을 뿐이다. 지구생태계의 지속을 위해서는 생태적 시선을 더 이상 유토피아로 치부하는 선입견부터 걷어내야 할 것이다.
내생적 성장론을 주장하는 경제지리학자들 중에는 현 노무현 정부의 산업정책에서 진행 중인 혁신 클러스터 정책입안을 직접 주도한 학자도 있다. 그런데 내생적 지역성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다수 조절이론을 전공한 학자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역성장론의 이론적 추이를 살펴보면 내생적 지역성장론 이후에 조절이론으로 진행되는 것을 감안하면 '역행'이라 볼 수도 있다.
생태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무균질의 공간에서라면, 신고전경제학이든 내생적 개발론이든 그 발전은 한계에 부딪치고 기각된다. 심지어 시베리아 송유관 논쟁에서도 송유관이 통과하는 러시아 국립공원의 생태계 파괴 가능성으로 인하여 환경보호단체와 지역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중요한 이해의 축을 담당했다. 생태담론의 현실경제, 대안경제 모델의 본격적인 도입이 여전히 이르다고 볼 수 있을까.
덧붙여 조절이론에서 생태주의로 선회한 학자들에 대해 현재 조절이론을 전공하고 있는 후세대 학자들이 사석에서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1980년대 조절이론의 대부인 알랭 리피에츠(A. Lipietz)가 1990년대 프랑스 녹색당에 입당해 활동한 것이나, 조절이론을 공간에 접목시켜 학문적 두각을 나타냈던 믹 던포드(M. Dunford)로부터 사사받아 국내에 조절이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적용한 단국대 조명래 교수가 1990년대 말부터 녹색주의를 주창한 것에 대한 혹자들의 뒷담화도 귀에 거슬리긴 마찬가지다.
리피에츠는 최소한 자신이 구상한 이론의 한계를 딛고 현실에 한 발자국이나마 전진했다면 후세대 학자들은 여전히 리피에츠의 1980년대 저작에 갇혀서 리피에츠, 조명래의 생태주의로의 선회를 비꼬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어색하다. 사실 조명래 역시 조절이론의 거버넌스 연구를 생태학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에 접목하려고 노력하는 등 조절이론을 전면 포기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평화의 지정학으로 거듭나야
필자는 에너지 파시즘을 둘러싼 논의의 한국적 의의를 현재 공부하는 지리학적 입장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국내 지리학계의 지정학에 대한 도외시는 누구 말마따나 '열강의 소용돌이'였던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책임방기라고까지 할 수 있다.
우리가 거듭 관심을 가져야 할 지정학은 자원을 약탈하는 제국의 대열에 낀 지정학이 아니라 자원착취로 피폐해진 아프리카를 비롯한 후진국과 공생할 수 있는 생태학적 측면을 추구하는 평화의 지정학이다. 다시 묻는다. 누가 망상이고, 누가 더 현실적이라고 재단할 수 있는가?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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