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20세기…어떤 삶이 특별하지 않으랴"

[화제의 책]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

에릭 홉스봄은 한국에서 E. H. 카 다음으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리고 실제로 많이 읽히는 역사학자다. 서구 근대사의 기념비적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가 모두 번역돼 있고, 이어 20세기 현대사를 다룬 재기 발랄한 <극단의 시대>도 국내에 소개돼 있다.

그가 국내에서 많은 독자를 얻은 것은 학문 세계의 깊이 못지않은 그만의 대중적 서술 방식과 폭넓은 관심사 덕이다. 또 아흔 줄에 접어들어도 식지 않은 열정과 감각을 가지고 블레어의 신자유주의와 미국 일방주의를 논박하며 시대의 혜안을 요청하는 모습도 매력을 끄는 다른 요인일 것이다.

2000년 이후 소개된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강주헌 옮김, 끌리오 펴냄),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김동택·김정환·정철수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 <밴디트-의적의 역사>(이수영 옮김, 민음사 펴냄) 같은 저작들은 홉스봄과 국내 젊은 독자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히고 그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혔으니 반가운 일이었다.

한편, 1980년대부터 홉스봄을 읽었던 이들도 있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 동유럽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인간 해방의 대의를 고수하는 꼬장꼬장한 마르크스주의 학자로 홉스봄을 기억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내의 좌파에게 홉스봄은 '이런 학자도 우리 편 중에 있다'는 일종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나 역시 새내기 때 홉스봄을 추천해 준 교수를 여전히 고맙게 여긴다.

이렇게 특별한 홉스봄이 그간의 애독자에 대한 선물 치고는 무척 두툼한 자서전을 준비했다. 원체 이야깃거리가 많은 역사학자는 자신의 삶도 뇌 한 칸에 그냥 담고만 있기 아까웠을 것이다. 홉스봄의 뇌에서 흘러넘친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여기 갈무리되어 공식 서술과는 다른, 색다른 20세기 사(史)로 재탄생했다.

<미완의 시대>(이희재 옮김, 민음사 펴냄)는 <극단의 시대>보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훨씬 깊이 있고 흥미로운 20세기 이야기다. 원제 '흥미로운 시대(Interesting Times)'는 내용에 딱 걸 맞는 자연스러운 제목이다. 그래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를 동시에 염두에 둔 국역 제목은 너무 계몽적인 느낌이다.

20세기의 주요 장면들
▲ <미완의 시대>(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민음사, 2007) ⓒ프레시안

자서전은 그가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917년 언저리부터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 영국 이주, 공산당에 가입한 학창 시절, 파시즘의 위협을 극복하자마자 닥친 동서 냉전…. 책장을 넘기면서 숨 가쁘게 20세기 역사의 장면을 훑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한 중심에 서 있던 홉스봄을 만나게 된다.

여행 중 우연히 겪게 된 스페인 내전 초엽의 분위기, 푼돈을 털어 탐닉한 듀크 엘링턴 악단의 영국 공연, 런던의 핵무장 반대 시위, 1968년 5월 학술대회 중 맞이한 기묘한 파리의 풍경, 아시아와 중남미, 유럽과 미국에서 만난 쟁쟁한 정치인, 학자와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사료들이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950~60년대를 기술한 장들이다. 이 시기는 홉스봄 개인에게는 가장 쓰라린 시절이었다. 결정적으로 1956년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감행한 스탈린의 학정에 대한 폭로는 홉스봄을 비롯한 서유럽 좌파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그 충격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소련군은 헝가리를 짓밟았다.

홉스봄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영국 사회주의 역사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홉스봄, 크리스토퍼 힐, E. P. 톰슨, 존 새빌로 대표되는 이 '반골'들은 학술적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의 역사'와 세상을 바꾸려는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민중의 의지를 발굴해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당대 좌파가 겪은 심대한 타격에 대해 결과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대안을 제출했다. <뉴리즈너>, <유니버시티앤레프트리뷰>가 합쳐져 1960년에 <뉴레프트리뷰>를 창간한 것이다. 홉스봄은 결코 앞장서기를 즐기는 이는 아니었지만, 이 <뉴레프트리뷰>의 창간 이후로 그는 서구 신좌파의 주장과 활동의 앞자리에 항상 서 있게 된다.



공산당원으로서의 삶

이 자서전에서도 줄곧 언급되듯이 그는 '자발적' 공산당원이었다. 냉전 체제의 서구에서 '공산당원' 신분은 개인으로서든 학자로서든 도움보다는 족쇄가 되었다. 비록 분위기가 느슨한 영국이었지만, 그 공산당원 신분은 활동 반경을 제약했고 지위 상승을 막았다. 특히 1950년대 이후에는 자신의 당적 보유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받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왜 공산당을 선택했을까? 뜻밖에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보편적 해방의 대의, 변증법적 철학 체계가 주는 매력, 집단적 연대 행동의 황홀함 등등. 그러나 그가 영국 공산당이 사실상의 정치적 의미를 상실한 뒤에도, 당이 문패를 내리는 1998년까지 굳이 당적을 유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수많은 동년배 투사들이 소련의 배신에 치를 떠는 순간에도, '스탈린 만세'와 '공산당 만세'를 외치면서 또 굴욕과 변명을 감수하면서 당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일화가 자서전에는 소개된다. 트로츠키의 전기 작가 아이작 도이처는 1956년경 홉스봄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공산당을 떠나지는 말게. 나도 1932년에 내 발로 걸어 나오다시피 했지만 지금도 후회막급이라네."

짐작해 보건대, 홉스봄은 (또 도이처는) 사회주의 모국의 존재가 유지되어야 유의미한 현실의 변혁 정치를 기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치적으로 의탁할 집단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 말이다. 혹 이런 것이 아니었다면, 홉스봄의 공산당에 대한 '미련'은 언젠가 다시 올 새로운 정치 체제를 기다린다는 나름의 징표였는지도 모른다.

그만의 경험일까?

유대인이자 반시오니스트로서, 중유럽 출신의 심성을 가진 영국인으로서, 노동계급에 밀착된 케임브리지 학자로서 홉스봄의 배경과 역정은 유별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 치고 특이하지 않은, 아니 특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자서전에 나오는 20세기의 조각들을 홉스봄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홉스봄 덕분에 더 진국인 막간들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20세기를 살아 온 그와 비슷한 연배의 누구인들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에 대한 나름의 기억이 없겠는가? 이런 인식 탓인지 홉스봄은 이 책을 다른 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던 한 인간의 편력을 통해 세계사에서 가장 특별했던 세기를 소개하는 책으로 읽기를 주문한다.

실제로 같은 정치 조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연애할 생각조차 못하고, 학자적 능력과 관심보다는 화염병과 유인물을 들 기회를 먼저 찾아다녔던 1980년대 대한민국을 연상시키는 그 격동의 삶은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20세기의 '개인'들과 겹친다.

이런 연유로 그의 자서전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유명한, 어떤 의미로든 성공한 인물들보다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패배자의 이름이다. 홉스봄이 아둔하고 무모하다며 탄식했던 이들, 당면의 투쟁이 출중한 재주를 삼켜버린 경우들, 그리고 세계의 이름 없는 거리와 들에서 20세기의 색다른 삶을 꾸려 온 사람들. 그 선택권 없는 선택들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이 노학자가 일깨워주는, 역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철학인지도 모른다.

고마움 혹은 회한?

좋은 책을 일찍 선보이려는 다급함 때문이었을까? 일부 사진 오류와 인명과 지명의 오기는 아쉽다. (특히 593쪽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640쪽 랠프 글리슨의 사진은 서로 바뀌었다.) 국역 제목에 대한 아쉬움은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 한 번 더 부연하자면, 저자가 '흥미로운 시대'라는 원 제목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20세기에 대한 '규정'이라기보다는 한 시대를 살아냈다는 데 대한 고마움 혹은 회한이었을 것이다.

"일체감은 다른 누군가와 맞서서 정의되는 것이므로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자기 중심의 민족사든 국민사든 오로지 그 집단을 위해서만 쓰인 '끼리끼리 역사(일체감의 역사)'는 역사로서 함량 미달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